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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부터 노조 상근 일을 하게 되었다. 마음의 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린 폭력적인 결정이었다. 그 바람에 며칠째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려, 베스트셀러에 대한 오랜 편견에도 불구하고 <미움받을 용기>까지 읽었다. 내심에 반해 내린 직업적 결정이, 혹시나 멍때리고 대충 살다가 거절을 못하고 사람에게 싫은 소리 하기 싫어 공연한 일에 휩쓸리고 마는 그런 패턴이었던 게 아닐까 싶어서.


아니나다를까, 책은 건질 게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순간만 살아서 이게 뭔가 싶을 정도인데. 이런 책이 필요한 인간형은 따로 있을텐데, 열등 콤플렉스, 인정욕망은 어느 정도는 편집증적인 거라 그런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고 순순히 수긍할 지는 의문이 든다. 여러 모로 보아도 심리학보다는 자기계발서가 맞다. 아들러 심리학의 권위를 이야기하기 위해 데일 카네기와 스티븐 코비를 동원하는 건 경악스럽기까지 했다(29p). 하지만, 자기계발서로 알고 읽은 것이니 지나치게 까탈스럽게 굴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바를 순순히 받아들여 나의 노조 상근 행을 해석하자면, 어쩌면 나는 실은 이 일이 하고 싶었는데 결과가 두려워서 내심에 반한 결정이었다는 핑계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 단순화를 수긍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직면할 힘을 주긴 하는 것 같다. 사실 미움 받을 용기는 예나 지금이나 갖고 있는데, 그냥 만사가 지독하게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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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일본의 정치현장, 그 ‘숙의의 공간’이 얼마나 갑갑하기에 이 사람은 트위터에 이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국정감사, 국회 의사생중계 모두 공개되고 있으며, 대선 토론이 tv에서 방송되는 날에는 트위터가 일종의 아즈마적 ‘역동적 피드백 모니터’역할을 하는(게다가 트위터 반응을 실시간으로 받아쓰다시피 하는 웹언론 때문에 더더욱) 한국은 완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일본에 비하면 상당히 아즈마가 말하는 세상에 가까울 것인데, 지난 18대 대선에서 우리가 목도한 것은 인터넷 정서는 곧 민의가 될 수 없으며, 그 인터넷 정서조차 결코 아즈마가 쉽게 ‘대중의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균질한 것이 아니라는 뼈아픈 사실 뿐이지 않았는가. 심지어 아즈마는, 대중의 무의식적 욕망 덩어리인 이 데이터베이스 - 각종 SNS에 산재하는 관심의 표지들 - 가 숙의의 현장(정책결정의 현장, 지식인과 관료, 정치인의 현장)에 실시간으로 반영되고, 참고되는 현상은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므로, 설령 포퓰리즘이라 할지라도 촉진되어야 한다고까지 하는데, 이런 무책임한 소리를 하기 위해 루소까지 동원되어야 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이 책은 결국 내겐, 트위터에 과몰입한 한 일본 비평가가 호들갑으로 묶어낸 일본의 정치무관심 해소책, 으로 남게 되었다.


한국이라면, 디테일은 다를 수 있어도 결국 숙의의 민주주의에 해당하는 것이 지역구 국회의원을 기반으로 한 기존 정당 체계라면, 데이터베이스에 해당하는 것이 넷상 민심일텐데, 이것이 서로를 참조한다 함은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넷상 민심은 이미 각종 여론조사와 인터넷 사용인구 스스로에 의해서 반영이 되고 있고, 이것이 무매개적으로 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숙의’의 필터를 거쳐야 한다는 아즈마의 주장은 결국 “기업과, 국회와, 에.. 잘 협의해서, 좋은 방향으로 해보겠습니다. 소통도 하고요…”란 소리나 다를 것이 없어질 뿐.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을 다룬 다른 이들의 리뷰를 보면, 아즈마가 다른 데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일반의지 2.0> 에서는 끝까지 <숙의>를 버리지 않고 책 후반까지 질질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뒷부분을 보지 않은 양, 니코동 데이터(정보공학)에 근거한 정치가 얼마나 파격적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은 끝까지 보면 생각보다 훨씬 어중간하다. 아즈마 히로키는 평소 SNS에서 하는 것 보면 안 그럴 것 같은데, 책에서는 미적거리며 신중하려고 해서 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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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에서 김화영은, 카뮈가 오랑(알제리의 도시)에 바친 글 <미노타우르스>에서, 오랑 시청 앞의 두 마리 대형 청동 사자상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 것을 인용한다.

"여기에 시시한 작품을 남긴 한 명성 자자한 예술가가 있다. 선멋 부리는 시청 앞에다가 그가 세운 그 순해 빠진 야수들에 몇십만명의 사람들이 익숙해져 있다. 이것도 딴것과 마찬가지로 예술에서 성공하는 길의 하나다... 카인은 바다 건너 식민지 어느 상업적인 지방 광장에 우스꽝스러운 낯짝 두 개를 만들어 세웠다. 한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언젠가 피렌체와 함께 허물어질 것이지만 이 청동사자는 아마 재앙을 면하게 될 것이다... 이 작품 속에는 무의미와 견고함이 있다. 여기서 정신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물질은 큰 의미를 가진다. 범용한 작품은 무슨 수단으로든 영속하고자 한다. (후략)"

그리고 김화영은 구청이 관리하는 서울의 집 뒷동산 입구에, 어느 '시인'의 수필만도 못한 글이 새겨진 커다란 자연석의 '무의미와 견고함'을 보면서 카뮈의 말을 다시 새긴다. "감히 '돌에 새기는 무의미'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는 '예술'과 '영속'의 욕망" 이 도처에 있다고.

이것을 읽고 나니 내 머릿속에도 '무의미와 견고함' 의 대명사처럼 자리잡을 만한 한 곳이 떠오른다. 가본 적은 없지만, 가보자는 지인들을 뿌리치느라 애를 먹었던 곳이다.

http://www.largefac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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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가 안 맞네요. 블로그 글을 옮기고 있는 탓입니다. ^^;

12일부터 19일까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존 크랑코 안무의 드라마발레 <오네긴>을 하고 있다. 새삼 공연 설명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http://pann.news.nate.com/info/252334252 을 참조하면 되겠다. 12일 7시 공연을 보았는데, 참... 여러 모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작품이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연기에 대해서는 그저 감탄 말고는 보내고 싶은 것이 없지만(발레는 피겨스케이팅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다.

제 1막이 끝나고서는 너무나 감동했는데, 차이코프스키보다 나은  너무나도 적절한 편곡과 은근하면서도 알기 쉬운 표현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올가와 렌스키의 2인무는 철없고 경박한 올가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시골 소년과 소녀의 해맑고 자연스러운 애정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책에 파묻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감출 길 없는 타티아나의 몸짓과, 그런 그녀를 뒤에서 너무나도 부드러운 가벼움으로 들어올리는 오네긴의 안무는 푸슈킨의 시를 그냥 축약해 놓은 것만 같았다. ㅠㅠ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는 유모(바로 그 유모!)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디테일도 아름다웠고, 타티아나가 편지를 쓰다 잠든 후 꾸는 꿈 안무는 상투적이지만 정열적인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증폭되는 기대감으로 인터미션을 보낸 것도 잠시... 2막에서 나는 너무나 당황하고 말았다. 타티아나의 명명 축일 파티 장면에서 오네긴은 타티아나와 2인무를 추는 듯 하더니 힘차게 그녀의 허리를 밀어내 버린다. 여기에서부터 나는 '오버 액션'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1막에서 그 많은 성격들과 감정선들을 안무만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냈기에 더더욱 여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것 같다. 드라마'발레'가 아니라 '드라마'발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듯... 오네긴이 그 자신의 권태와 우울, 사랑에 대한 불신 때문에 타티아나의 사랑을 거절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지겹게 따라다니던 스토커 애인을 발로 걷어차기라도 하는 듯이, 오네긴의 급변한 행동에 당혹스러워하는 타티아나를 붙들고 그녀를 세게 흔들며 눈 앞에서 편지를 박박 찢어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나는 정말 내가 뺨을 맞은 줄 알았다... 1막에서의 그 은근한 표현력은 어디 간걸까. 타티아나의 명명 축일 파티에서는 소극적으로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편지는 돌려주는 것 정도로 거절할 수는 없었던 걸까. 나는 이 작품의 해석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예브게니 오네긴>>이 아니고 <<오네긴>>이다. 대체 존 크랑코의 '오네긴'은 어떤 사람인 걸까? 그저 질 나쁜 바람둥이? 

작품에 대한 재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할 터. 오네긴이 질 나쁜 바람둥이어도 사실 상관은 없다. 질 나쁜 바람둥이로서 끝까지 이해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오네긴은 렌스키와 춤을 추는 올가를 빼앗아서(심지어 두 사람이 올가를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기까지 한다) 춤을 추고, 여기까지는 약혼녀를 빼앗아 춤을 추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안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렌스키가 그런 올가의 팔을 다시 잡아당겨 자신에게 오라고 하자 올가가 두 팔을 흔들며 NO, 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올가는 별 생각이 없는 아가씨로, 정혼자가 있든 없든 그 나이대 아가씨가 젊은 남자에게 으레 보일 수 있는 애매한 태도로 인해 오네긴과 춤을 추게 되어야 한다. 렌스키에게 적극적으로 NO, 를 표현한다면 그저 오네긴과 바람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원작에서 오네긴이 올가와 춤을 추는 이유는 그가 타티아나의 사랑을 거절하긴 했지만 무의식 속에서 타티아나를 강력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한 오네긴을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자살 충동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선이, 슬프면 우는 시늉을 하고 기쁘면 자리에서 방방 뛰며 거절할 때는 손을 내젓는 것 같은 단순한 제스처로 표현될 수 있는 걸까? 1막에서 안무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해냈던 안무가의 능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격분한 렌스키와 오네긴은 급기야... 서로 싸대기를 번갈아 날리는 막장 치정극을 연출하며 갈등을 표현한다. 아아,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박수를 칠 수가 없었다. 이 극의 클라이막스여야 할 부분들이, 줄거리 읊듯 표현되고 있다. 이런 것은 연극으로도 보고 싶지 않다. 하물며 발레는... 더욱더.

오네긴과 렌스키는 결투를 한다. 원작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질 나쁜 바람둥이 오네긴과 올가의 바람난 이야기여도 된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원작에서 오네긴은 렌스키와의 결투를 피하고 싶어한다. 자격 없는 입회인을 골라 결투의 예법을 다하지 않고, 결투장소에 늑장을 부리며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오네긴과 렌스키는 서로 격렬한 증오를 표출하고, 이를 타티아나와 올가가 매달려 말림으로써 결투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복선을 준다. (정말 치정 살인극이다. ㅡㅡ) 그래서 분노는 서로를 향한 채로, 오네긴은 총을 발사하고 렌스키는 바로 맞아 죽는다. 그리고

무대 뒤쪽에서 렌스키를 쏴 죽인 오네긴은 몸을 휙 돌려 무대 앞쪽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고뇌한다. 갑자기.

...대체 원작을 읽지 않은 채로 이 발레를 보는 사람들은, 렌스키를 죽이게 된 오네긴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1막 인터미션 후에 사람들에게 꼭 보라고 호들갑을 떨며 남겼던 구글 플러스의 포스팅을 취소하고 싶었다.

3막을 보러 들어가는 기분은 아쉬움으로 인해 참담한 기분이었다. 1막의 표현력에 감탄했기에 더더욱... 3막은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와도 같이, 수도의 파티장으로 시작한다. 공작과 결혼한 타티아나는 성숙하고 안정적인 춤을 춘다. 2막의 충격이 아니었더라면 이 안무도 아마 아름답게 보았으리라. 실제로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발견하고 한번 더 되돌아보는 장면과, 오네긴의 구애 편지를 받고 심적으로 갈등하는 장면은 적절해 보였다. 특히 아름답게 느낀 것은 편지를 읽고 있던 그녀의 방으로 남편인 공작이 들어왔을 때의 2인무다. 공작은 사람 좋게 아무 것도 모르고 춤을 추고, 타티아나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충실함을 확인하듯 춤을 춘다. 타티아나의 몸짓은 '이 사람이 내 남편이야.' 라는 것을 자신에게 거듭 확인시키는 듯한 몸짓이다. 과연 1막에서 확인한 표현력이었다.

이어 오네긴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오고, 타티아나는 그의 때늦은 구애를 거절하는 제스처로, 편지를 또 박박 찢는다. (아, 이번엔 내가 따귀를 날리는 것 같다...) 처음에 오네긴이 타티아나의 편지를 찢을 때 너무 충격이 커서 차라리 이 부분이 대구를 이루는 것이 그나마 이 작품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이어 마음 속은 어쩔 수 없이 오네긴에게 끌리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 안기고는 또 밀어내는 2인무가 펼쳐진다. 이 피날레는 이 작품을 그나마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마지막에 오네긴을 내보내고 난 후, 타티아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끝나는 장면은 본래의도상 타티아나의 오열로 읽어야겠지만, 내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주먹에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타티아나의 분노'처럼 느껴지긴 했다.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들이 치정 살인극이 되어버린 이상, 타티아나의 분노가 옳은 해석은 아닐까? ㅡㅡa

그리하여 이 작품은, 줄거리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그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없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드라마'의 요소만을 뽑아내서 만든 명실공한 '드라마'로, 발레의 표현력을 통해 서정시를 읽고자 했던 원작 팬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고 끝났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굳이 평할 목적이 아니라면, 이 작품이 무척 아름다운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보기에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을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황혜민/엄재용 캐스팅으로 보았는데, 다른 캐스팅으로 또 보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다음 주는 출장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안무가의 원작 해석에는 의문을 금할 길 없었지만, 올가와 타티아나, 오네긴과 렌스키가 토슈즈와 발레 타이즈를 입은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예브게니 오네긴>> 팬들에게는 큰 기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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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코프와 플라토노프는 둘 다 1899년에 태어났다. 나는 한동안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 같다. 그 때문에,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All that is solid melts into the air)>>을 읽을 때, 구체적 개인들의 모습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 사람들이다. 이 두 작가와 그들이 살던 시대를 각각 따로 또 같이 생각하는 것이란.

나보코프 전기에 이어 플라토노프의 전기적 사실을 주워삼키기 위해 Thomas Seifrid의 <<Andrei Platonov - Uncertainties of spirit>> 을 보고 있다. 플라토노프에 '대한'책은 커녕 작품도 다 번역이 되지 않은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한국어로는 플라토노프에 대해 읽을 만한 것이 없어서 돌아다니는 pdf 파일을 검색해서 찾았다(쿨럭). 플라노토프에 대한 전기적 사실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플라토노프의 작품에 대해 제기된 주요한 비평적 관점과 플라토노프가 영향받은 러시아 사상가/철학자들을 다룬 후 작품 해설로 나아가는 좋은 플라토노프 가이드인데 안타깝게도 주저 <<체벤구르>>와 플라토노프의 다른 면모들을 엿보게 한다는 초기 시선을 비롯한 작품들이 아직 출간되지 않아 이 책의 반은 이해하지 못하게 생겼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이런저런 전기적인 이야기에 Seifrid 의 책에서 본 내용을 더한 것이 될 것이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는 1899년 9월 1일 러시아 남서부 보로네시(Voronezh) 의 마부촌에서 철도 기계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플라토노프가 태어났을 당시 이 지역은 철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황량한 농촌과 다른 한 쪽은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산업사회와 농촌의 대조, 어중간한 중간자적 환경을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셈이다. 그의 단편들에서 두드러지는 빈곤에 대한 묘사를 볼 때 플라토노프 가정은 풍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나보코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게도 문화적 주변부에 살았고 겨우 초등 교육 정도를 받았으며, 혁명의 덕택에 교육 기회를 부여받고 고향의 공업 학교에서 기술자 학위를 받는다. 조상 대대로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은 데다가 자유주의자 부친으로 인해 유럽 각지의 다양한 가정교사를 두고, 정치, 외교, 군사,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한 가닥씩 하는 친척들과 지인들에 둘러싸여 유년 시절을 보냈던 나보코프와 같은 1899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매우 극적인 차이인 것처럼 느껴진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일찍이 지역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재능을 나타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전 인민이 혁명적 재건의 역사적 과업을 떠맡게 되자 문학과 같은 사변적인 일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는 판단에 집필을 잠시 중단하고 토지개량 기술자와 댐 기술자로 근무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전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보이며, 후일에는 비록 문학활동은 제재를 받았을지언정 이런 저런 편집이나 잡지 기고 등 글 쓰는 일을 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문단에서 보리스 필냐크와 교류하였는데, 필냐크와 공저한 작품들이 잇따라 당시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던 프롤레타리아 작가연맹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점차 창작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필냐크였으나, 플라토노프는 필냐크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여겨져 함께 공격을 받았으며, 러시아 농촌지역에서의 집단농장화 사업에 대한 풍자 소설들이 잇따라 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1931년에서 1934년에 이르는, 플라토노프가 알아서 조심하는 '침묵의 시기' 가 이어진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플라토노프는 조심스럽게 회복과 복귀를 꿈꾸었으며 경제 5개년 계획을 비롯한 소비에트 재건에 참여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플라토노프는 침묵하는 기간동안 자신의 작품을 당시의 정치적 기후에 맞게 다듬으며, 자신이 소비에트 작가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아니면 이미 이것은 불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애타게 알고 싶어 했다(고리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저항심의 부재나 문학적 타협으로 보기에는 플라토노프는 좀더 예민하고 또 복잡한 인물이다. 플라토노프가 한 말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 다음의 서술을 보아도 그렇다.
 
"I will not be a professional writer if I expound only my own unchanged ideas. Nobody will read me. I have to vulgarize and vary my thoughts in order to produce works that are acceptable... If I were to put into my works the real blood of my brain, nobody would read them... My true self I have never shown to anyone, and probably never will. For this there are many serious reasons, but the chief one is that nobody really needs me."

"내가 나만의 변하지 않는 생각들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설명한다면 나는 직업 작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내 작품을 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받아들여질 만한 작품을 써내기 위해 내 생각들을 다양화하고, 격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내 머리에 진짜로 흐르는 피를 내 작품에 주입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나 자신을 나는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중대한 이유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Thomas Seifried, <<Andrei Platonov - Uncertainties of spirit>> p.20에서 재인용) 

플라토노프에게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을 전업 작가로서 만드는 일이었으며,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읽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에게 예술과 문학은 독자와 비평가, 다시말해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플라토노프가 속한 사회가 소위 요즘 말하는, 잘 팔린다는 의미에서의 '먹힐 만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도 더불어 생각해 보면, 위의 인용문은 플라토노프가 작가가 된다는 것, 작품을 쓴다는 것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타인을 강하게 의식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자서전에 따르면 나보코프는 치기어린 시절 쓴 시가 출판된 후 굉장히 쑥스럽고 부끄러웠으며, 이 때의 악연으로 평생 비평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뭐라 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따라 다소 거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은 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몇 번을 고쳐 쓴 자서전을 통하여 그는 비평가와 심지어 독자까지도 조롱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읽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도,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범인들이 거기 있는줄도 모르고 지나치고 마는, 나무에 붙은 나방의 보호색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나보코프는 자신이 예술을 희구하는 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나보코프에게는 기억과 회상의 탐색으로 얻어지는 인상과 표현들이 작품의 재료였다. 기억이 물질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를 통하여 그는 일종의 절대적인 것을 향해서 나아갔다. 그것은 순간과 영원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예술은 이것들을 밝히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토노프에게 있어서 작품의 재료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를 대리하는 그의 주인공들은, 그와 아버지 플라토노프의 이름을 따서 진리를 희구하는 이들이지만, 이들 앞에는 언제나 진리를 밝힐 목적이자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현실과, 이 현실을 표현하는 구체적이고도 물질적인 대상이 있었다.

플라토노프는 지역에서 댐 기술자로 일하다가 탐보프(Tambov) 로 파견을 가게 되었는데, 일종의 중앙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에서 그는 업무를 지도하러 나가는 농촌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지역 관리들의 저항과, 댐의 배수(背水, backwater)이라는 엄청난 자연-기계적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다스리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는 편지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탐보프에서의 고생, 외로움을 토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략) "...wandering these backwaters I've seen such dreary things that it was hard for me to believe that somewhere there exist Moscow, art, and prose. But it seems to me that genuine art and thought in fact can only appear in such a backwater."

"이 배수(背水) 주위를 배회하며 나는 너무나 황량한 광경들을 보았고, 내게는 이 세상 어딘가에 모스크바와 예술, 산문시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실한 예술과 사유는 실은 이러한 배수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느꼈다." (같은 책에서 재인용)

나보코프에게 당신의 작품들은 망명 작가로서 당신을 형성한 사건들, 정체성들과 떼어놓을 수 없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러시아 혁명이 당신의 작품을 만든 셈이라고 말한다면 지독한 악담일 것이다(세계 안의 존재로서 이 점을 부정할 다른 방법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하지만 플라토노프는 이러한 점을 더욱 깊이 의식하는 작가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 혁명은 플라토노프를 작가로 만들었고 키웠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슬픔만큼이나 많은 재료를 주었다. 진실한 예술과 사유를 길어낼 수 있는 구덩이나, 댐, 철도 같은 것을.

플라토노프를 작가로 만든 혁명은 그러나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플라토노프의 15세 아들은 1938년 반 소비에트 활동단체를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수용소로 보내지고, 숄로호프의 중재로 풀려나긴 했으나 1943년 수용소 생활 중 얻은 결핵으로 사망하게 된다. 아들을 돌보던 플라노토프도 이 때 결핵이 옮아, 1951년 1월 5일 52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으로 여겨지지는 <<체벤구르>>와 <<코틀로반>>이 후기 작품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아쉽고도 또 아쉬운 죽음이다. 그의 작품들은 1958년이 되어서야 겨우 복간되며 조금씩 복권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서구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며 알려진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플라토노프와 나보코프... 이 두 사람을 대조하는 것의 의미가 같은 년도에 태어난 다른 계급의 작가라는 데에 있다면 그것은 그냥 -프 자 돌림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일일 것이다. 지표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자의적이기는 하나, 두 사람의 너무도 대조적인 삶과 정치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작가관과 문학관의 차이로 나타났는지를 생각하면 할 수록, 마샬 버만만큼 능숙하지는 않더라도 이 작가들의 표정을 통해서 20세기 문학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과연 서로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있는지, 그랬다면 어떻게 평가를 했을런지가 못내 궁금하다. 나보코프는 플라토노프를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나보코프가 플라토노프에 대해 언급한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아시면 꼭 제보를...) 플라토노프는 아마 나보코프를 몰랐을 것이다. 플라토노프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살았기에. 그리고 나보코프보다 26년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p.s. 보로네시 현지에 세워진 플라토노프 동상. http://www.panoramio.com/photo/5488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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