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가 안 맞네요. 블로그 글을 옮기고 있는 탓입니다. ^^;
12일부터 19일까지 유니버설발레단에서 존 크랑코 안무의 드라마발레 <오네긴>을 하고 있다. 새삼 공연 설명을 되풀이할 필요는 없으므로 이 작품에 대한 설명은
http://pann.news.nate.com/info/252334252 을 참조하면 되겠다. 12일 7시 공연을 보았는데, 참... 여러 모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작품이다.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연기에 대해서는 그저 감탄 말고는 보내고 싶은 것이 없지만(발레는 피겨스케이팅이 아니라고 믿고 있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다.
제 1막이 끝나고서는 너무나 감동했는데,
차이코프스키보다 나은 너무나도 적절한 편곡과 은근하면서도 알기 쉬운 표현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다. 올가와 렌스키의 2인무는 철없고 경박한 올가의 성격을 잘 나타내는 것이었고, 그러면서도 시골 소년과 소녀의 해맑고 자연스러운 애정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책에 파묻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감출 길 없는 타티아나의 몸짓과, 그런 그녀를 뒤에서 너무나도 부드러운 가벼움으로 들어올리는 오네긴의 안무는 푸슈킨의 시를 그냥 축약해 놓은 것만 같았다. ㅠㅠ 타티아나가 오네긴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는 유모(바로 그 유모!)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디테일도 아름다웠고, 타티아나가 편지를 쓰다 잠든 후 꾸는 꿈 안무는 상투적이지만 정열적인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증폭되는 기대감으로 인터미션을 보낸 것도 잠시... 2막에서 나는 너무나 당황하고 말았다. 타티아나의 명명 축일 파티 장면에서 오네긴은 타티아나와 2인무를 추는 듯 하더니 힘차게 그녀의 허리를 밀어내 버린다. 여기에서부터 나는 '오버 액션'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1막에서 그 많은 성격들과 감정선들을 안무만으로 완벽하게 표현해 냈기에 더더욱 여기에는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것 같다. 드라마'발레'가 아니라 '드라마'발레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듯... 오네긴이 그 자신의 권태와 우울, 사랑에 대한 불신 때문에 타티아나의 사랑을 거절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지겹게 따라다니던 스토커 애인을 발로 걷어차기라도 하는 듯이, 오네긴의 급변한 행동에 당혹스러워하는 타티아나를 붙들고 그녀를 세게 흔들며 눈 앞에서 편지를 박박 찢어 던져버리기까지 한다.
나는 정말 내가 뺨을 맞은 줄 알았다... 1막에서의 그 은근한 표현력은 어디 간걸까. 타티아나의 명명 축일 파티에서는 소극적으로 춤추는 모습을 보여주고, 편지는 돌려주는 것 정도로 거절할 수는 없었던 걸까. 나는 이 작품의 해석이 점점 더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예브게니 오네긴>>이 아니고 <<오네긴>>이다. 대체 존 크랑코의 '오네긴'은 어떤 사람인 걸까? 그저 질 나쁜 바람둥이?
작품에 대한 재해석은 얼마든지 가능할 터. 오네긴이 질 나쁜 바람둥이어도 사실 상관은 없다. 질 나쁜 바람둥이로서 끝까지 이해될 수만 있다면. 하지만... 오네긴은 렌스키와 춤을 추는 올가를 빼앗아서(심지어 두 사람이 올가를 사이에 두고 밀고 당기기까지 한다) 춤을 추고, 여기까지는 약혼녀를 빼앗아 춤을 추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안무라고 이해한다고 해도, 나를 더욱 당황스럽게 만들었던 것은 렌스키가 그런 올가의 팔을 다시 잡아당겨 자신에게 오라고 하자 올가가 두 팔을 흔들며 NO, 를 표현했다는 것이다. 올가는 별 생각이 없는 아가씨로, 정혼자가 있든 없든 그 나이대 아가씨가 젊은 남자에게 으레 보일 수 있는 애매한 태도로 인해 오네긴과 춤을 추게 되어야 한다. 렌스키에게 적극적으로 NO, 를 표현한다면 그저 오네긴과 바람난 것밖에 되지 않는다. 원작에서 오네긴이 올가와 춤을 추는 이유는 그가 타티아나의 사랑을 거절하긴 했지만 무의식 속에서 타티아나를 강력하게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울한 오네긴을 움직이는 것은 일종의 자살 충동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선이, 슬프면 우는 시늉을 하고 기쁘면 자리에서 방방 뛰며 거절할 때는 손을 내젓는 것 같은 단순한 제스처로 표현될 수 있는 걸까? 1막에서 안무만으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해냈던 안무가의 능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격분한 렌스키와 오네긴은 급기야... 서로 싸대기를 번갈아 날리는 막장 치정극을 연출하며 갈등을 표현한다. 아아,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연기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저히 박수를 칠 수가 없었다. 이 극의 클라이막스여야 할 부분들이, 줄거리 읊듯 표현되고 있다. 이런 것은 연극으로도 보고 싶지 않다. 하물며 발레는... 더욱더.
오네긴과 렌스키는 결투를 한다. 원작과 같이 만들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질 나쁜 바람둥이 오네긴과 올가의 바람난 이야기여도 된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원작에서 오네긴은 렌스키와의 결투를 피하고 싶어한다. 자격 없는 입회인을 골라 결투의 예법을 다하지 않고, 결투장소에 늑장을 부리며 나타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오네긴과 렌스키는 서로 격렬한 증오를 표출하고, 이를 타티아나와 올가가 매달려 말림으로써 결투가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복선을 준다. (정말 치정 살인극이다. ㅡㅡ) 그래서 분노는 서로를 향한 채로, 오네긴은 총을 발사하고 렌스키는 바로 맞아 죽는다. 그리고
무대 뒤쪽에서 렌스키를 쏴 죽인 오네긴은 몸을 휙 돌려 무대 앞쪽으로 나오더니 갑자기 몸을 움츠리며 고뇌한다. 갑자기.
...대체 원작을 읽지 않은 채로 이 발레를 보는 사람들은, 렌스키를 죽이게 된 오네긴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게 될까?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1막 인터미션 후에 사람들에게 꼭 보라고 호들갑을 떨며 남겼던 구글 플러스의 포스팅을 취소하고 싶었다.
3막을 보러 들어가는 기분은 아쉬움으로 인해 참담한 기분이었다. 1막의 표현력에 감탄했기에 더더욱... 3막은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와도 같이, 수도의 파티장으로 시작한다. 공작과 결혼한 타티아나는 성숙하고 안정적인 춤을 춘다. 2막의 충격이 아니었더라면 이 안무도 아마 아름답게 보았으리라. 실제로 타티아나가 오네긴을 발견하고 한번 더 되돌아보는 장면과, 오네긴의 구애 편지를 받고 심적으로 갈등하는 장면은 적절해 보였다. 특히 아름답게 느낀 것은 편지를 읽고 있던 그녀의 방으로 남편인 공작이 들어왔을 때의 2인무다. 공작은 사람 좋게 아무 것도 모르고 춤을 추고, 타티아나는 남편에 대한 자신의 충실함을 확인하듯 춤을 춘다. 타티아나의 몸짓은 '이 사람이 내 남편이야.' 라는 것을 자신에게 거듭 확인시키는 듯한 몸짓이다. 과연 1막에서 확인한 표현력이었다.
이어 오네긴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오고, 타티아나는 그의 때늦은 구애를 거절하는 제스처로, 편지를 또 박박 찢는다. (아, 이번엔 내가 따귀를 날리는 것 같다...) 처음에 오네긴이 타티아나의 편지를 찢을 때 너무 충격이 커서 차라리 이 부분이 대구를 이루는 것이 그나마 이 작품의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안 드는 것도 아니다. 이어 마음 속은 어쩔 수 없이 오네긴에게 끌리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 안기고는 또 밀어내는 2인무가 펼쳐진다. 이 피날레는 이 작품을 그나마 좋은 마음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마지막에 오네긴을 내보내고 난 후, 타티아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울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끝나는 장면은 본래의도상 타티아나의 오열로 읽어야겠지만, 내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주먹에 너무 힘이 들어간 나머지 '타티아나의 분노'처럼 느껴지긴 했다. 이 작품의 클라이막스들이 치정 살인극이 되어버린 이상, 타티아나의 분노가 옳은 해석은 아닐까? ㅡㅡa
그리하여 이 작품은, 줄거리를 늘어놓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그 아름다움을 설명할 수 없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서 '드라마'의 요소만을 뽑아내서 만든 명실공한 '드라마'로, 발레의 표현력을 통해 서정시를 읽고자 했던 원작 팬의 가슴에 생채기를 남기고 끝났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굳이 평할 목적이 아니라면, 이 작품이 무척 아름다운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보기에 굉장히 재미있다는 것을 굳이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황혜민/엄재용 캐스팅으로 보았는데, 다른 캐스팅으로 또 보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다음 주는 출장을 가야 해서 어쩔 수 없이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안무가의 원작 해석에는 의문을 금할 길 없었지만, 올가와 타티아나, 오네긴과 렌스키가 토슈즈와 발레 타이즈를 입은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예브게니 오네긴>> 팬들에게는 큰 기쁨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