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코프와 플라토노프는 둘 다 1899년에 태어났다. 나는 한동안 이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것 같다. 그 때문에, 마샬 버만의 <<현대성의 경험(All that is solid melts into the air)>>을 읽을 때, 구체적 개인들의 모습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도 이 사람들이다. 이 두 작가와 그들이 살던 시대를 각각 따로 또 같이 생각하는 것이란.
나보코프 전기에 이어 플라토노프의 전기적 사실을 주워삼키기 위해 Thomas Seifrid의 <<Andrei Platonov - Uncertainties of spirit>> 을 보고 있다. 플라토노프에 '대한'책은 커녕 작품도 다 번역이 되지 않은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한국어로는 플라토노프에 대해 읽을 만한 것이 없어서 돌아다니는 pdf 파일을 검색해서 찾았다(쿨럭). 플라노토프에 대한 전기적 사실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플라토노프의 작품에 대해 제기된 주요한 비평적 관점과 플라토노프가 영향받은 러시아 사상가/철학자들을 다룬 후 작품 해설로 나아가는 좋은 플라토노프 가이드인데 안타깝게도 주저 <<체벤구르>>와 플라토노프의 다른 면모들을 엿보게 한다는 초기 시선을 비롯한 작품들이 아직 출간되지 않아 이 책의 반은 이해하지 못하게 생겼다. 지금부터의 내용은 내가 알고 있는 이런저런 전기적인 이야기에 Seifrid 의 책에서 본 내용을 더한 것이 될 것이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1899-1951)는 1899년 9월 1일 러시아 남서부 보로네시(Voronezh) 의 마부촌에서 철도 기계공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플라토노프가 태어났을 당시 이 지역은 철도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황량한 농촌과 다른 한 쪽은 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산업사회와 농촌의 대조, 어중간한 중간자적 환경을 어린 시절부터 겪었던 셈이다. 그의 단편들에서 두드러지는 빈곤에 대한 묘사를 볼 때 플라토노프 가정은 풍족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나보코프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게도 문화적 주변부에 살았고 겨우 초등 교육 정도를 받았으며, 혁명의 덕택에 교육 기회를 부여받고 고향의 공업 학교에서 기술자 학위를 받는다. 조상 대대로 문화적 유산을 물려받은 데다가 자유주의자 부친으로 인해 유럽 각지의 다양한 가정교사를 두고, 정치, 외교, 군사,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한 가닥씩 하는 친척들과 지인들에 둘러싸여 유년 시절을 보냈던 나보코프와 같은 1899년에 태어났다는 것이 매우 극적인 차이인 것처럼 느껴진다.
안드레이 플라토노프는 일찍이 지역 문단에서 활동하면서 재능을 나타냈으나, 러시아 혁명 이후 전 인민이 혁명적 재건의 역사적 과업을 떠맡게 되자 문학과 같은 사변적인 일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다는 판단에 집필을 잠시 중단하고 토지개량 기술자와 댐 기술자로 근무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전념하고 싶은 것은 문학이라고 생각한 것처럼 보이며, 후일에는 비록 문학활동은 제재를 받았을지언정 이런 저런 편집이나 잡지 기고 등 글 쓰는 일을 전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는 문단에서 보리스 필냐크와 교류하였는데, 필냐크와 공저한 작품들이 잇따라 당시 문단의 주류를 차지하던 프롤레타리아 작가연맹으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면서, 점차 창작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주된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필냐크였으나, 플라토노프는 필냐크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여겨져 함께 공격을 받았으며, 러시아 농촌지역에서의 집단농장화 사업에 대한 풍자 소설들이 잇따라 공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1931년에서 1934년에 이르는, 플라토노프가 알아서 조심하는 '침묵의 시기' 가 이어진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플라토노프는 조심스럽게 회복과 복귀를 꿈꾸었으며 경제 5개년 계획을 비롯한 소비에트 재건에 참여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플라토노프는 침묵하는 기간동안 자신의 작품을 당시의 정치적 기후에 맞게 다듬으며, 자신이 소비에트 작가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 아니면 이미 이것은 불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애타게 알고 싶어 했다(고리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행동을 저항심의 부재나 문학적 타협으로 보기에는 플라토노프는 좀더 예민하고 또 복잡한 인물이다. 플라토노프가 한 말에서 인용된 것으로 보이는 다음의 서술을 보아도 그렇다.
"I will not be a professional writer if I expound only my own unchanged ideas. Nobody will read me. I have to vulgarize and vary my thoughts in order to produce works that are acceptable... If I were to put into my works the real blood of my brain, nobody would read them... My true self I have never shown to anyone, and probably never will. For this there are many serious reasons, but the chief one is that nobody really needs me."
"내가 나만의 변하지 않는 생각들에 대해서만 장황하게 설명한다면 나는 직업 작가가 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도 내 작품을 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받아들여질 만한 작품을 써내기 위해 내 생각들을 다양화하고, 격에서 탈피할 필요가 있다... 내가 내 머리에 진짜로 흐르는 피를 내 작품에 주입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읽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나 자신을 나는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이 없으며, 아마 앞으로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많은 중대한 이유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Thomas Seifried, <<Andrei Platonov - Uncertainties of spirit>> p.20에서 재인용)
플라토노프에게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을 전업 작가로서 만드는 일이었으며,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읽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하게 의식했다. 그에게 예술과 문학은 독자와 비평가, 다시말해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당시 플라토노프가 속한 사회가 소위 요즘 말하는, 잘 팔린다는 의미에서의 '먹힐 만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을 요구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도 더불어 생각해 보면, 위의 인용문은 플라토노프가 작가가 된다는 것, 작품을 쓴다는 것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타인을 강하게 의식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자서전에 따르면 나보코프는 치기어린 시절 쓴 시가 출판된 후 굉장히 쑥스럽고 부끄러웠으며, 이 때의 악연으로 평생 비평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 뭐라 하건, 어떻게 생각하건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보기에 따라 다소 거만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엘리트주의적이라는 것은 작품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몇 번을 고쳐 쓴 자서전을 통하여 그는 비평가와 심지어 독자까지도 조롱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마 그는 읽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도, 자신의 예술적 성취에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범인들이 거기 있는줄도 모르고 지나치고 마는, 나무에 붙은 나방의 보호색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했기 때문이다. 나보코프는 자신이 예술을 희구하는 한 작가가 될 수 있었다.
나보코프에게는 기억과 회상의 탐색으로 얻어지는 인상과 표현들이 작품의 재료였다. 기억이 물질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를 통하여 그는 일종의 절대적인 것을 향해서 나아갔다. 그것은 순간과 영원의 형태로 나타났으며, 예술은 이것들을 밝히는 데에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플라토노프에게 있어서 작품의 재료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마주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를 대리하는 그의 주인공들은, 그와 아버지 플라토노프의 이름을 따서 진리를 희구하는 이들이지만, 이들 앞에는 언제나 진리를 밝힐 목적이자 과정으로서 존재하는 현실과, 이 현실을 표현하는 구체적이고도 물질적인 대상이 있었다.
플라토노프는 지역에서 댐 기술자로 일하다가 탐보프(Tambov) 로 파견을 가게 되었는데, 일종의 중앙 기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곳에서 그는 업무를 지도하러 나가는 농촌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지역 관리들의 저항과, 댐의 배수(背水, backwater)이라는 엄청난 자연-기계적 현실을 마주하고 이를 다스리는 일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는 편지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탐보프에서의 고생, 외로움을 토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중략) "...wandering these backwaters I've seen such dreary things that it was hard for me to believe that somewhere there exist Moscow, art, and prose. But it seems to me that genuine art and thought in fact can only appear in such a backwater."
"이 배수(背水) 주위를 배회하며 나는 너무나 황량한 광경들을 보았고, 내게는 이 세상 어딘가에 모스크바와 예술, 산문시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실한 예술과 사유는 실은 이러한 배수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고 느꼈다." (같은 책에서 재인용)
나보코프에게 당신의 작품들은 망명 작가로서 당신을 형성한 사건들, 정체성들과 떼어놓을 수 없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러시아 혁명이 당신의 작품을 만든 셈이라고 말한다면 지독한 악담일 것이다(세계 안의 존재로서 이 점을 부정할 다른 방법이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하지만 플라토노프는 이러한 점을 더욱 깊이 의식하는 작가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 혁명은 플라토노프를 작가로 만들었고 키웠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슬픔만큼이나 많은 재료를 주었다. 진실한 예술과 사유를 길어낼 수 있는 구덩이나, 댐, 철도 같은 것을.
플라토노프를 작가로 만든 혁명은 그러나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플라토노프의 15세 아들은 1938년 반 소비에트 활동단체를 이끌었다는 죄목으로 수용소로 보내지고, 숄로호프의 중재로 풀려나긴 했으나 1943년 수용소 생활 중 얻은 결핵으로 사망하게 된다. 아들을 돌보던 플라노토프도 이 때 결핵이 옮아, 1951년 1월 5일 52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플라토노프의 대표작으로 여겨지지는 <<체벤구르>>와 <<코틀로반>>이 후기 작품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아쉽고도 또 아쉬운 죽음이다. 그의 작품들은 1958년이 되어서야 겨우 복간되며 조금씩 복권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였고, 서구에 본격적으로 소개되며 알려진 것은 1980년대에 들어서였다.
플라토노프와 나보코프... 이 두 사람을 대조하는 것의 의미가 같은 년도에 태어난 다른 계급의 작가라는 데에 있다면 그것은 그냥 -프 자 돌림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만큼이나 한심한 일일 것이다. 지표로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자의적이기는 하나, 두 사람의 너무도 대조적인 삶과 정치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작가관과 문학관의 차이로 나타났는지를 생각하면 할 수록, 마샬 버만만큼 능숙하지는 않더라도 이 작가들의 표정을 통해서 20세기 문학의 표정을 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이 과연 서로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있는지, 그랬다면 어떻게 평가를 했을런지가 못내 궁금하다. 나보코프는 플라토노프를 읽었을지도 모르겠다(나보코프가 플라토노프에 대해 언급한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아시면 꼭 제보를...) 플라토노프는 아마 나보코프를 몰랐을 것이다. 플라토노프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살았기에. 그리고 나보코프보다 26년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