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무엇보다도 중고등학교 때 시험을 위해 달달 외우기만 했던 조선 중기의 굵직한 역사적 일들-당파의 계보, 대동법, 북벌론, 예송논쟁 등-의 의의를 자세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다만, 이덕일의 송시열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좀 과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저자의 논지를 거칠게 요약하면 이렇다. 송시열이 살았던 시대의 조선은 격변의 시대였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는 사대부의 지배는 파산에 이르렀고, 사회경제적 변화는 종래의 사농공상의 신분질서를 위협했다. 따라서 이미 순기능을 다한 주자학은 상대적인 위치로 내려와야 했으며, 사대부의 자리가 아니라 백성의 자리에서 세상을 해석할 것이 요청되었다. 그러나 송시열, 그리고 그로 대표되는 서인은 사대부의 지배, 서인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오히려 주자학 절대주의를 고수한 역사의 반동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후 조선은 백성의 나라가 아닌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이덕일이 책의 마지막에 인용하는 <<논어 >>의 구절: "군자는 두루 통하고 편벽되지 않지만 소인은 편벽되고 두루 통하지 못한다."(p.398) 결국 저자는 송시열이 소인배에 불과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평가는 타당한 것일까? 이덕일의 지적대로 우암은 정치가보다는 학자의 삶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의 주자학에 대한 종교적 맹신, 지적인 편벽성과 결벽주의는 정치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덕목이다. 나도 책을 읽으면서 송시열의 꼬장꼬장함에 짜증을 낸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의 짜증과 우암에 대한 평가는 별개이다. 송시열이 서인의 수장이었다는 점, 그리고 서인이 인조반정 이후 내내 조선의 집권세력이었다는 점 때문에 송시열이 과도한 비판의 포화를 맞는 것은 아닐까? 송시열이 중심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 중에서 책에서 중히 다루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이다. 1)효종의 북벌론 2)대동법 3)예송논쟁. 우선 세 번째의 예송논쟁에 대해 살피자면, 이 예송논쟁이 중요했던 이유는 소현세자의 죽음 이후 즉위한 효종, 그리고 그의 아들인 숙종으로 이어진 왕권의 정통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론 자체는 사대부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녀, 예송논쟁 자체는 당시 대립했던 서인과 남인에게는 정권과 목숨이 달린 중대한 문제였을 테지만 백성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내용이었다. 
  
   또한 효종의 북벌론. 저자는 효종과 송시열이 북벌론의 주역이라는 국사교과서의 서술과 달리, 송시열이 군사적 북벌에 반대함으로써 효종의 군사적 북벌론과 선을 그었다고 설명한다. 물론 송시열은 명을 멸망시킨 청을 증오했지만, 청을 정벌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도道가 조선으로 왔으니 이제 조선이 소중화이며, 따라서 청과 국교를 단절하고 명과의 의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군사력은 청의 간섭을 저지할 정도이면 족하며, 효종의 군사력 증강을 오히려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의심하고 이에 반대했다. 결국 송시열과 효종은 청을 증오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견해가 갈리게 된 원인은 현실인식에 있다. 우암은 청을 군사정벌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반면, 효종은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덕일은 효종의 인식에 공감한다. 효종의 전략은 조선이 공격한다면 피지배민족인 한족이 지배민족인 만주족에 대해 같이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는 가정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이 가정이 현실이 된다면 수가 적은 만주족은 조선의 군사에 대응할 만한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덕일은 효종의 구상이 군사전략상으로는 허황된 것이 아니라며, 이러한 중국의 정세를 이용하지 못한 서인을 책망한다. 나는 효종의 인식이 얼마나 적확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청과의 일전은 조선과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결정이다. 송시열의 보수적인 판단이 현저히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 않을까?

   대동법. 송시열은 대동법에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막상 정책이 실질적인 실행단계에 이르자 반대하였다. 대동법은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조선기 최대의 개혁안이나 사대부의 이익에는 반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전면적으로 시행되기까지는 100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우암과 서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다면 대동법을 전면적으로 시행했을까? 예컨대 서인과 끊임 없이 대립하였던 남인. 남인은 숙종 때 제2차 예송논쟁을 기화로 정권을 획득했으나, 서인과 화합하려 시도하기보다는 서인에게 보복했다. 정권에서 소외되어 왔던 남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는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태도이나, 이덕일의 송시열 비판의 핵심인 주자학 절대주의와 지적, 정치적 편협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남인도 별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어차피 당쟁이 사대부 계층 내의 권력투쟁이었다면 다른 집단과 다른 인물이 권력을 쥐었더라도 사대부의 힘을 약화시키는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을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송시열에 대한 이덕일의 가혹한 평가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이유는 송시열이 무죄라서가 아니다. 사실 저자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인조반정과 소현세자에 대한 평가에 있을 것이다. 이덕일에게 있어 인조반정은 등거리 외교정책을 펼침으로써 조선을 전란의 참화에서 건져냈던 현군 광해군을 서인들이 권력욕 때문에 축출한 사건이었고, 그 결과 양 호란을 불러일으킨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간 시대착오적 사건"(p.41)이었고, 소현세자의 죽음은 그의 개방적인 사고가 200년 후의 "조선과 일본 두 나라의 운명을 뒤바꿔 놓을 수도 있는"(p.59) 것이었다는 점에서 조선의 운명을 극단으로 끌고 간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광해군에 대한 평가와 인조반정에 대한 평가는 이론이 있는 부분이며(광해군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오항녕의 <<조선의 힘>>, 6장에서 전개되고 있다. http://blog.aladin.co.kr/mayolove/4273112) 저자가 조선이 근대국가로 일찍 나아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지라도 그 화풀이를 송시열에게 하는 것이 적절한 태도일까?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조선이 근대국가로 나아갈 가능성은 일단 닫혔다. 이건 우암이 살았던 당시에 그에게 주어졌던 조건이다. 결국 송시열의 한계는 그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소현세자의 죽음으로 닫혀버렸던 조선이라는 세계의 한계가 아니었을까? 송시열에 대한 후대의 맹목적인 찬사는 그의 말대로 허황된 것이지만, 이덕일 역시 인조반정과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서인의 대표인 송시열을 너무 과도하게 깎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송시열은 인조반정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예송논쟁 당시에는 숙종과 대립하면서 소현세자가 조선 왕실의 적통임을 주장하였던 인물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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