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1
소포클레스 외 지음, 천병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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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의 모든 장면들은 크레온이 완고하고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지만, 크레온이 안티고네를 추궁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는 양 쪽의 주장은 모두 설득력을 가진다. 크레온은 폴뤼네이케스가 테바이를 침략하였기에 그의 시체를 새떼에게 던져주고자 한다. 반역은 징치되어야 하며, 폴뤼네이케스는 테베의 신전을 유린하려 하였으므로 신들에게 죄를 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크레온의 말: "착한 이에게 나쁜 자와 같은 몫이 주어져서는 안 되지."(p.292)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인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모두 전쟁에서 죽었으나, 하나는 조국을 지키려다, 하나는 조국을 범하려다 죽었다. 각자가 마땅히 자신에게 돌아가야 할 몫만큼을 받는 것이 정의라면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내버려 두는 것이야말로 정의롭다.

  크레온의 주장은 흠잡을 데 없다. 그럼에도 폴뤼네이케스를 모독하고자 하는 그의 법에 대해 <<안티고네>>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크레온이 실수하였다고 비난한다. 어째서? 폴리스(polis)의 존속보다 배반자를 매장하는 것이 더 중요하단 말인가? 사실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주장은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 각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이 정의이다. 크레온의 반대자들은 사자(死者)를 매장하는 것이 신의 뜻에 합치하는 것, 하데스의 몫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옳은 것이며, 크레온의 법은 하데스의 몫을 하데스에게 돌리는 것이 아니어서 부정의하다.

   대립하는 두 주장이 동일한 논리에 의한 것이라면 신의 몫을 빼앗는 것보다는 인간의 몫을 양보하는 것이 더 정의롭다. 희랍인들은 옳은 행위는 그 행위가 신의 뜻에 합치하기에 옳은 것으로 간주된다고 생각했다. 아마 실상을 인류학적으로 추적해보면 그 반대였을 것이다. 안티고네는 그의 오라비인 폴뤼네이케스를 매장하는 것이 신들의 뜻에 비추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고, 크레온의 법에 거역했다. 그리고 죽은 자를 매장해야 한다는 건 희랍인들 전체가 공유하고 있던 관습법 같은 것이다. <<일리아드>>에 이를 예증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헥토르를 죽인 후 그의 시체를 마차에 매달아 끌고다니면서 능욕하자, 헥토르의 아비인 프리아모스는 전쟁 중임에도, 그리고 그가 한 나라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밤중에 적진으로 찾아가 아킬레우스에게 헥토르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돌려주기를 무릎 꿇으며 간구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반성하며 헥토르의 시체를 매장하도록 돌려준다. 아킬레우스는 적에 대한 분노보다도 사자를 매장하는 것의 필요성을 중시했고, 이런 관념은 당시의 희랍인에게는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의 손을 들어주면서 희랍인의 관습에 호소했다. 다만 더 근본적인 차이. 크레온의 법은 폴뤼네이케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을 빼앗는다. 안티고네의 법은 모두에게 각자가 받아야 할 몫을 돌려준다. 폴뤼네이케스에게는 안식을, 하데스에게는 경의를. 크레온의 법이 분노에서 나온 것이라면 안티고네의 행동은 사랑에서 나온 것이다. "나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어요."(p.292) 사랑이 옳았음이 파국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하는 아이러니. <<안티고네>>의 진짜 비극성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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