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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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독가의 지식은 단순한 기름기에 불과하다."(p.32)라고 단언하며 지독(遲讀)을 주창하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며칠 전에 읽은 루이스 세풀베다의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한 문단을 떠올렸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위의 책, pp.45-46)

   이 문단은 히라노 게이치로가 슬로 리딩을 통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에 대해서 명확히 통찰한다. 그 지점은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와 같은 극단적인 슬로 리딩까지는 아니더라도, 책을 조금 읽더라도 그 책이 오롯이 자기 양분이 되도록 빨아들이는, 그리하여 5년 후, 10년 후를 내다보는 독서술이 슬로우 리딩이다. 나도 지식의 양이 개인의 지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인쇄술 발명 이전의 지성들은 현대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적은 책을 읽었겠지만 그들의 지성이 찬란히 빛남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슬로 리딩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책은 빨리, 그리고 느리게 읽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는 저자가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인용구와도 관련된 것인데, 그 인용구는 이러하다: "롤랑 바르트는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은 꼭 두 번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의 미로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다."(p.8, 강조는 나의 것.) 

   나는 책을 사면 반드시 한 번은 최대한 빠르게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빨리 읽는 편이 구조를 전체적으로 파악하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처음 읽으면서 숲과 나무를 모두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슬로 리딩은 속독보다 압도적으로 장점이 많으며 결국 독서의 최종적인 방법이지만, 처음부터 슬로 리딩을 할 경우 개별적인 나무를 보다가 지쳐서 숲의 전체를 보지도 못하고 나가떨어질 우려가 있다. 나의 전략은 일단 숲을 주마간산으로 훑고, 그 다음에 각각의 나무를 천천히 감상하는 것이다. 속독과 지독은 상호보완적으로 시도되어야 하며, 그렇기에 책은 사서 봐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두 번 이상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 보는 것은 책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라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은 책에 있어서도 그대로 유효하다. 책을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책을 두 번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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