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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읽는 노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은 주인공인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가 책과 관계맺는 장면들이다.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이 늙음이라는 무서운 독에 대항하는 해독제임을 알게 된 그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책과 거짓말만 꾸며놓은 것 같은 역사책, 소년에게 참기 힘든 고통을 안기는 비겁한 소설을 지나 이윽고 연애소설에 안착한다: "그 책은 어쩌면 그가 진작부터 헤매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책에 담긴 것은 사랑, 온통 사랑이었다."(p.87) 그리고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p.45) 음절을 음미하고 그것들을 그러모아 단어를 반복하고,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는 그의 독서법은 너무나도 매혹적이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가 늙음에 대항하는, 그러니까 (아직 젊은 내가 감히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섣부르고 어줍잖게나마 말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고독을 견디는 방법이다. 그는 젋어서 혼인했으나 아이를 갖고자 삶의 터전을 떠나 아마존 개발계획을 좇아 이주했으며 도착한 그 끔찍한 곳, 풀 뽑는 속도보다 자라는 속도가 더 빠르고 맞서는 것이 무의미하며 기적을 기다리는 것 외에 방도가 없는 우기를 가진 이주지에서 두 해만에 부인을 잃었다. "그 순간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는 자신이 고향에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p.53) 홀로 남은 그는 수아르 족 인디오의 친구로 반생을 살았으나 결국 수아르가 될 수 없었으며, 엽총을 강물에 던져버림으로써 밀림을 개발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밀고 들어오는 자들에게 귀순하기도 거부한다.
문명과 자연의 대립구도 하에서 전개되는 이 소설에서 노인은 양쪽 모두에도 소속될 수 없기에 고독한 그가 위안을 얻는 때는 그가 좋아하는 연애소설을 읽을 때이다. 베네치아의 연애소설을 집에서 혼자 읽으면서 키스를 어떻게 했기에 '뜨겁게' 했다고 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주인공이 친구가 보는 곳에서 여자에게 '뜨겁게' 입을 맞추었다고 그를 그다지 좋은 녀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쾡이 사냥에 불려나가 같이 간 사람들과 뜨거운 키스와 곤돌라와 베네치아에 곤돌라가 도대체 왜 필요한지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머리를 맞대고 고민할 때, 소설을 읽는 나는 한편으로는 피식대면서도 그런 그들의 진지한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옆에서 주책맞게 나불거라는 뚱보 읍장은 그들에게 베네치아의 사실적 모습을 전달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이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뚱보가 어리석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속으로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몇몇 빛나는 순간들이 살쾡이를 엽총으로 쏴죽이면서 자연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그 엽총을 강물로 던져버리며 문명으로의 투항도 거부하기에 결국 어디에도 뿌리박지 못하게 되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를 구원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