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의 세계 살림지식총서 18
정규웅 지음 / 살림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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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00원짜리 살림지식총서의 얇은 책. 나는 헌책방에서 1000원에 구입하였다. <<SF부족들의 새로운 문학 혁명, SF의 탄생과 비상>>과 동일한 이유, 그러니까 추리소설의 약사(略史)를 좀 알아볼까 해서 읽었다. 저자는 에드가 앨런 포우로부터 시작된 근대 추리문학의 발전과 변모과정을 크게 영국, 프랑스, 미국으로 구분하여 쓰고 있으며, 각각의 주요 작가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작가들이 어떠한 위치와 맥락에 놓여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책은 도움이 되었고, 앞으로 추리소설을 읽을 때 보다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내게 있어서 이 책의 효용은 이 정도. 그러니까 史만을 간략하게 서술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나, 저자의 論이 책을 다 버려놓았다. 이하는 내 주장의 논증. 
 
   '추리소설의 진정한 대중화'를 염두에 뒀다는 저자가 '대중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책 앞날개의 저자의 말: "우리나라에서 추리소설이 아직 활성화되지 않는 까닭은 추리소설이 통속소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독자들의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의 대중성을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추리소설의 진정한 대중화를 염두에 두었다."  이 문장에 따르면, 추리소설의 진정한 대중화를 이루려면 추리소설이 통속소설이라는 독자들의 시각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 결과 저자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쓰고 있다: "독자는 추리소설이 읽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문학에서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는 문학이라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며, 작가는 자신이 대중작가 혹은 통속작가라는 의식을 떨쳐버리고 항상 노력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자세로서 창작에 임해야 할 것이다."(p.94) 그런데 바로 위에서는 "추리소설이 대중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당당한 문학의 한 장르로서 다른 장르의 문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도록 위상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점이다."라고 쓰는데, 이 문장만 보면 대중성의 유지는 위상을 끌어올리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위상을 끌어올리는 것이 대중성을 위한 전제조건인가? 아니면 대중성의 확보와 위상을 끌어올리는 것은 별도의 층위의 문제인가? 저자의 저술만 가지고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런 혼란은 애초에 저자가 말하는 '대중성'이 사회 성원 일반을 향한 개념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엘리트들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저자는 추리소설이 후진 소설이니까 사람들이 많이 읽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추리소설이 순수문학에 버금가는 위상과 지위를 확보할 것을 촉구한다. 그런데, 애초에 순수문학은 대중성을 갖는가? 보다 일반적으로 질문을 바꾸어서, 작품의 수준이 높으면 사람들이 많이 찾는가? 그렇다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수억 명이 보았어야 하고 김진명의 소설들은 다 불쏘시개로나 써먹어야 할텐데, 사람들은 전자보다 후자에 더 열광하지 않는가?

   애초에 흥행이나 대중화는 작품의 수준과는 별반 관계가 없으며 오히려 마케팅과 배급, 그리고 대중의 구미에 얼마나 부합하는가에 달렸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의심할 바 없는 걸작이나 그 책이 터진 이유는 노무현이 탄핵 정국 때 읽었기 때문이며, 김진명 책이 수백만 권씩 팔린 이유는 그것이 한국 사람들의 추레한 민족주의적 감성에 뽕을 놓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저자는 위상을 높여야 '대중화'가 된다고 말할까? 성급한 비약일 수 있으나, 내 생각에는 그래야 자기 주변의 '수준 있는 사람들'도 관심을 가지고 읽기 때문에.(책날개에 쓰인 저자의 약력을 보건대, 저자와 어울리는 사람들은 아마도 '수준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저자가 책 마지막에 쓴 문단은 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취미도 알고 보면 수준 있는 것이니까 읽어보라는 권고와, 추리 작가들에게 자기 친구들 수준에 맞게 고급 작품을 좀 써 내라는 요청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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