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의 숲
강유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3월
평점 :
일시품절


나는 친구들과 대화할 때 '확고한 관점'이라는 말을 입에 종종 올리곤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내게 있어서 말 그래도 확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최면에 가까운 것 같다. 오히려 나는 내가 가진 생각이 과연 유지할 만한 것인지에 대해 끊임 없이 의심하는 쪽에 가깝다. 내가 끄적이는 글들 중에서 나 자신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는 글보다 타인의 글에 대한 코멘트의 형식을 띤 것이 훨씬 많은 이유도 이러한 나의 내면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나는 아직 읽어야 하는 쪽에 있지 말해야 하는 쪽에 속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후자 쪽으로 이동할 자신감은 평생 가도 생기지 않을 것만 같다. 내 독서를 추동하는 주된 동력의 하나는 그러니까 막연하고 자신 없는 나의 사소한 견해와 동일하거나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 이를 통하여 내가 가진 몇몇 생각들의 불확실함이 나에게 가져다주는 불안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에 있다.

   나는 최근에 김별아의 <<미실>>을 재독하였는데, 그 끝머리에서 세계문학상 심사평 중 몇몇은 "호주제 폐지가 기정사실화된 현 시점에 <<미실>>이야말로 여성 인권 신장에 한 켜를 보탠 혁신적 성과"(김원일)라거나, "여성의 새 시대를 예고"(박범신)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다. 내 생각에 미실은 자신의 시대를 자유로이 살다 세상에서 사라졌으나, 그는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을 무기 삼아 결국은 권력자인 남자에게 기대어 그가 원하는 것을 얻어냈을 뿐이었다. 미실이 사라진 후에 신라는 미실 이전과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을 것이다. 극소수의 절세가인만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할 수 있을 뿐 대다수의 평범한 여자들은 여전히 그 모양 그 꼴이며, 그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결국은 남자에 기대어서 무언가를 얻어낼 수밖에 없는 세상이 '혁신적 성과'이며 '여성의 새 시대'라니. 이건 여성에게 있어서 너무 처량한 것이 아닌가.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김원일과 박범신은 한국 문학사에서 일가를 이룬 무림맹의 중추이며 나는 문학공부를 해본 적도 없이 재미로 책을 읽는 아마추어 독자요 강호의 시정잡배일 뿐이니, 내가 읽지 못하는 무언가를 그들은 <<미실>>에서 읽었단 말인가. 아아 결국 나는 문학의 표피만을 쓰다듬을 뿐 그 비의(秘意)를 꿰뚫어보지 못하는 겉절이에 불과하단 말인가. 이런 자괴감이 불끈불끈 올라올 때 강유정의 이러한 말은 나에게 '그래도 내가 아예 허투루 읽은 것은 아니로구나'하는 안도감을 주는 것이다: "'미실'은 자신의 성적 능력을 십분 남용해 황제가 지닌 권력의 핵심에 밀착하고자 한다. 이는, 미실이 성적 능력을 이용해 펼쳐 보이는 판타지의 낱낱이 남성의 지배 질서에 대한 전복이 아니라 교묘한 반복이자 재현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안타깝게도 '미실'은 '색공지신'이라는 호명이 지닌 정치적 불합리와 이데올로기적 파행에 무심하다. 그녀는 다만 '색공지신'의 정치적 함의 그 자체에만 충실하다. ... '미실'에게 '성'이란 여성의 권능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권력에의 왕도이며 성공을 위한 방편일 뿐이기에 그녀는 스스로 자신의 성욕을 남용한다. 미실에게 성이란 자연스러운 본능으로 오인된 성취욕인 셈이다."(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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