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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농의 샘 2 - [초특가판]
다니엘 오떼이유 외 감독, 엠마누엘 베아르 외 출연 / 드림믹스 (다음미디어) / 2003년 8월
평점 :
베르디의 운명의 힘. 들어도 들어도 명곡이다. 이번엔 오프닝에서 하프시코드로 연주되니 전편의 하모니카와는 또 다른 종류의 구슬픔이 전해진다. 그래도 하모니카가 더 낫다. 그래도 하모니카는 좀 더 따뜻함이 있기 때문이다.
마농의 샘 덕분에 돈을 불리고 있는 위골랭(다니엘 오떼유)은 아주 그냥 신났다.
예상치 못한 의외의 설정들
어머니를 닮은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란 마농(엠마누엘 베아르)의 첫 등장은 지질에 관심이 많은 교사 베르나르(이폴리트 지라르도)와의 만남이다. 베르나르는 분량은 짧지만 2부의 스토리 진행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농이 당연히(?) 어머니를 따라 도시로 나가 살 것이라 생각했지만 더 생각해보니 영화의 설정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사람에 대한 신물이 날 경험을 했으니 오히려 사람을 더 멀리하는게 맞는 듯. 마침 산속에 세입자가 있다는 설정도 있었으니 개연성 굿.
개인의 희생과 공동체의 안정
동네 사람들은 마농의 아빠가 '누구' 때문에 '왜' 죽었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오지 않는 한 간섭하지 않는다. 마을과 본인 일상의 안정을 위해 불의에 간섭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 정녕 공동체에 유익한 것일까?
천둥과 폭우가 치는 밤 홀로 비를 맞으며 아버지의 묘지 앞에서 하모니카를 연주하는 마농. 그녀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상상하며 눈시울이 붉어질 뻔했는데... 연주하는 연기가 너무 티 나서 눈물이 싹 말랐다.ㅎ
짐승과 인간의 사랑
우연히 위골랭은 산속에서 목욕하는 마농의 '나체'와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지는 장면에서 나체를 강조한 것을 보면 마농에 대한 위골랭의 그것은 단지 욕망일 뿐이란 걸 의미하는 것 같다. 샘에 이은 또 하나의 소유욕. 번식을 위한 짝짓기. 그것에 타자에 대한 존중, 인간성, 양심 따윈 없다.
한 번도 마농의 얼굴을 보지 않았지만 이미 꿈에 그녀가 나올 정도로 호감을 느끼게 된 베르나르와 너무나 대립된다. 그는 위골랭과는 정반대로 마농을 소유물이 아닌 인격체로 대하고 있다.
위골랭에게 일말의 양심이 있었다면 마농에 대한 감정에 오히려 더욱더 괴로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개 짐승일 뿐인 그는 좋~다고 득도 없는 어설픈 구애나 하고 앉았다. 혹자는 위골랭을 부끄럼 많고 순진한 시골 청년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순진한 게 아니라 그냥 사람이 아니무니다. 인간이라면 소중히 여겨야 할 부분이 그에겐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니 말이다.
욕망의 쳇바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샘만 확보해서 카네이션 재배만 잘 되면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한 가장의 생명을 뺏고 가정을 파탄 내는 것마저 실행에 옮겼다. 그런 그가 이제 다음 목표가 생겼고 그 목표(마농)를 소유하지 못하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이렇듯 욕망에 휘둘리면 삶의 대부분이 불행할 뿐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온전히 내 것이란 없으니까. 심지어 내 몸뚱이와 감정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교양의 존재 이유
욕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 교양이다. 교양이란 인문학에 대한 이해 정도다. 얼 만큼 교양이 있는가는 얼마만큼 인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다. 인문학은 쉽게 말해 나(인간)와 타자(나 이외의 모든 존재), 그리고 세상을 이해하는 학문이다. 물론 교양이 모든 욕망을 없애주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그 욕망에 대해 생각할 재료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극 중 진정한 교양인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은 보여지는 바로 마농과 베르나르 둘뿐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에 목을 매지 않는다. 직접 소유하지 않아도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문학을 통해 쌓은 교양 덕분일 것이다.
누가 누구보고 불쌍하다 그래?
마농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양치기를 하며 살지만, 지식인이었던 '장'의 딸답게 책에서 다양한 지식을 쌓는다. 그리고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를 닮아 춤과 음악을 즐긴다. 겉으로 보기엔 딱하고 한심해 보이는 그녀의 삶이지만 계속 지켜보면서 드는 생각은 되려 소비에 중독된 현대인의 쳇바퀴 돌듯 반복되고 여유 없는 삶이 더 딱해 보인다.
어필할 것이 돈밖에 없는
위골랭은 마농을 베르나르에게 뺏길 것 같으니 그제서야 한다는 짓이 돈 자랑이다. 평소와 전혀 다른 잘 차려입은 모습으로 거짓말을 쏟아내며 돈 자랑을 하는 남자. 진짜 최악이다. 어필할 것이 돈밖에 없는 사람, 돈이면 무슨짓이든 하는 사람이 날 너무나 사랑한다고 외친다. 물론 돈 많은 상대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의견도 존중한다. 가치의 우선순위가 서로 다를 뿐이니까. 하지만 '소유'에 관심 없는 상대를 대할 땐 그런 행동은 분명 최악 중의 최악이다.
가장 좋았던 것은 마농을 악녀로 만들지 않은 부분이다. 필자는 2부 시작부터 거대한 복수를 꿈꾸며 계획을 착실히 준비해나가는 마농의 모습을 예상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한국식 막장 스토리에 너무 찌든 탓이었다;;;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우연히 진실을 모두 알게 되고 이 때문에 매우 소박한(?) 복수를 실행한다.
소박한 복수의 시작
마을의 샘이 막히자 그제야 난리가 난 마을 사람들. 본인의 목에 칼이 들어오자 드디어 반응을 그것도 오스카급 리액션을 보여준다. 인상적인 장면은 어렵게 모셔온 농공 전문가의 설명을 알아들을 능력도 의지도 없는 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이건 재앙이다'라는 외침과 빨리 물이 나오게 하라는 억지뿐이다.
이 장면은 교양 없는 인간, '개인'이란 인식이 없었던 중세 이전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 백미는 바로 위골랭의 대사다. 물이 다시 나오게만 해준다면 그게 무엇이든(원 대사에선 'progress') 찬성할 거고, 내 돈 100프랑을 전부 줄 거라는 것. 모든 것 위에 돈과 욕망이 자리하고 있는 위골랭을 아주 잘 대변하는 대사다.
많이 알기만 하는 지식인(헛똑똑이) = 일자 무식자
이 작품에선 지식인 또한 풍자한다. 지식인들은 배우지 못한 다른 이들을 줄곧 무시한다. 그런 그들은 성당에 다니는 사람들 역시 무시하다가 샘이 막히자 태세 전환하고 성당에 들어온다. 지식인과 교양인은 다르다. 지식이 많을수록 교양인일 확률은 높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종교인이라고 다를까? 신부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마농의 일을 무시하다 결국 샘이 막히고서야 마농에게 미사에 함께 할 것을 부탁한다. 그들 역시 마을 사람의 일부일 뿐이다.
어쨌든 약간의 반전을 포함해 욕망의 노예였던 위골랭과 빠뻬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이 난다. 결국은 소유다. 소유가 최우선인 사람은 그것을 소유하지 못하면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진짜 나를 버릴만한 일일까?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나로선 이해할 수 없다. 내가 그것을 가질 수 없어서 나를 버린다니... 내가 그것을 소유할 수 있어서 소중한 게 아니다. 이미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것이다.
마무으리
소유와 욕망, 교양과 인간관계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오래전 영화고 친숙하지 않은 프랑스 영화였지만 전혀 지겹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었다. 이 리뷰를 읽고 '필자 넌 그럼 전혀 욕심 없는 똑똑하고 지혜로운 놈이냐?'라고 되물을지 모르겠다. 당연히 그럴 리가 있나. 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교양을 쌓기 위해 남들보다 좀 더 노력할 뿐이다. 나와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져가며 소비와 소유 외에 또 다른 삶의 가치와 행복을 찾을 뿐이다. 내 말은 살면서 '돈'만, '소유'만 외치지 말자는 거다.
교양을 이야기하면서 기본적인 돈 공부를 천시하는 것 역시 모순이다. 돈 또한 우리 세상을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니, 말이다. 별점 다섯 개 만점에 넷 반. 1부 2부 합치면 다섯 개 주고 싶다. 1부, 2부 두 편 합쳐 약 4시간 정도 되니 주말에 연달아 보시길 추천해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