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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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작가의 글과, 이미지를 천천히 떠올려 본다.

처음 작가의 작품을 읽은 건,
2006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 <밤이여, 나뉘어라>였던 것 같다.
그 이전에 아마도 나는 정미경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은 해마다 빼놓지 않고 읽었고, 그때 아, 이런 작가가 있었구나 했었을 거야.
어쩌면 수업시간에 한두 번 들어 본 작가의 이름과, 작품을 그냥 스치듯 지나갔었는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그 이후 내가 작가의 작품을 거의 다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는 것.

그렇게 나는 작가의 작품들을 만났고,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뿐.

작가의 부고를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했을 때, 아- 짧은 탄식이 나왔었겠지만, 나의 하루에, 일상에 막대하게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니었을거다.
그래야 난, 고작 그의 작품을 좋아했던 한 명의 독자였을 뿐이니까.

누군가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식은 각기 다를 것이고, 그게 그 사람과 얼마만큼의 연결고리가 있는지에 따라 또 달라질 테지.  그런데 이상하다. 이 소설집을 읽는 내내 차분해지고, 자꾸 아프다.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점점 더 느려졌다.

 

 소설가 정미경의 마지막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읽으면서,
한 사람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마주했다.
그들은 동료이기도 했고, 후배이기도 했고, 반려자이기도 했다.
단순히 독자로서가 아니라, 삶의 한순간을 같이 보낸 이들이 보내는 애정 어린 마음.
그 마음이 고스란히 와닿는 순간들이었다.

생전에 작가가 쓴 단편 다섯 편과, 작가를 기억하는 또 다른 작가 정지아, 정이현의 추모 산문. 작가의 평생 반려자이자 동료였던 남편 김병종 화백의 추모글까지.

다섯 편의 소설 <못>,<엄마, 나는 바보예요>,<새벽까지 희미하게>,<목 놓아 우네>,<장마>는 기존에 읽어왔던 작가의 여느 소설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지만 어쩐지 조금 더 아련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이건, 소설들을 읽고 있는 순간의 내 감정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섯 편의 소설들은 가깝지만 완벽히 타인인 관계들에 대해 들려준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다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고, 타인이라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에 대해 한번쯤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 공은 자신의 욕망에 전력으로 매달림으로써 불안을 유예하는 쪽이었다. 금희의 방식은 반대였다. 미리 내려놓음으로써 불안의 싹수를 자르는 식이었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다. 여름 바다에 둥둥 떠 있는 튜브 같은 목소리를 들으며 금희는 끝을 예감했다. 어떤 일은 그랬다. 끝나버린 후에 알게 되는 게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려는 바로 그 순간 알게 된다.
- <못> 중에서 p36」

「 길어지는 침묵이 짐작보다 훨씬 아프다. 어떤 고통의 감각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다는 생각이 심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가지 사실만 빼곤 그에게 놀랍도록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고 생각했으나 진짜 자신은 그에게 말했던 것들과 말하지 못했던 것들 사이에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고 지냈다.
- <목 놓아 우네> 중에서 p158」

「 남자는 왼손을 들어 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몇 가닥만 남기고 다시 흘러내린다. 네온의 명멸처럼 짧지만 환한 어떤 것이 가슴속에서 반짝 빛났다.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 <장마> 중에서 p189」

이 글을 쓴 사람이 이제 없다, 고 생각하고 나면 한 문장 한 문장이 마치 사라질 줄 알았던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남겨질 이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인사처럼.

작가 정미경은 떠났다. 떠나왔던 자신의 별로, 그리고 그 떠난 자리마다 기적처럼 피어난 꽃들을 나는 바라본다. 지난 1월 18일 새벽 3시 반에 그녀는 내게 눈으로 말했다. 미안해. 나는...... 여기까지였어. 그랬을 것이다. 몸의 진액을 짜내어 살아온 삶. 더이상은 무리였을 것이고말고다.
 이제는 그녀를 놓아주어야 할 시간이다. 문학이라는, 내가 그리워만 하며 건너지 못했던 강 저편의 아슬한 능선에서 늘 푸르른 나무 한그루로 서 있던 사람. 나의 가난한 응원에도 늘 넘치게 답했던 사람. 나는 그녀의 차가워오는 이마에 마지막 키스를 했다. 잘가라 아내여. 내가 진실로 사랑하고 흠모했던 이 세상 단 한 사람의 작가여.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여.
- 추모산문 <나의 피투성이 연인> 김병종,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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