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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 걸 - 나무, 과학 그리고 사랑 ㅣ 사이언스 걸스
호프 자렌 지음, 김희정 옮김 / 알마 / 2017년 2월
평점 :
잘 모르는 분야의 책을 고를 때 조금 더 신중해지는 편이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잘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냥 끌리는 책을 고를 수밖에 없기도 하다.
2018년에는 좀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자고 다짐한 터라 책을 구매할 때 되도록이면 분야별로 한 권씩은 포함되도록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처음 시도해 보려고 했던데 과학 분야의 책이었다.
이 분야는 과학의 '과'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라, 중고등학교 과학시간에 배운 것조차 기억나지 않는 수준이니 어떤 책을 골라도 낯설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고른 이 책은, '과학'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에 더 가까웠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자면, 유시민이 이 책을 딸에게 권해주고 싶다고 적은 추천평을 어디서 본 기억 때문에 이 책을 고른 것도 있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있지. '아.. 낚였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은 건, 위에서도 말했지만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기 때문에. 그리고 방향이 바뀌었을 뿐 책의 내용이 이상하거나 영 재미없거나 한 게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과학'이라는 걸 빼고 읽으면, '자신의 영역을 열심히 개척해 나가는 한 여성에 관한 이야기'로 읽으면 꽤 괜찮은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식물학자로서의 삶을 유년시절부터 결혼, 출산을 겪은 이후의 시간까지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이 글은 쉽지 않은 과학자로의 여정을 한 여성 과학자가 어떻게 헤쳐나갔고,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차분하게 이야기한다. 그녀 스스로의 목소리와 문장으로.
그런데 여기서 드는 아쉬운 생각.
결국 과학자 앞에도 '여성 과학자', '여성 식물학자'라는 이름이 붙는구나.
여성으로서 결혼과, 출산 그로 인한 조울증과 싸우면서 입원을 하고 약물 치료를 하면서도 견뎌낸 그 삶의 이야기가 어쩐지, '여성'이라서 더 힘들었나, '여성'임에도 꿋꿋하게 잘 해왔다는 건가, 자꾸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
나는 왜, '딸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라는 평에 혹했을까. 어쩌면 나 스스로가 '여성'의 한계에 대해 이미 너무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게 많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아쉬움까지.
좋은 책을 읽고 뒤에 남은 이 씁쓸한 느낌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
그럼에도, 밑줄 긋고, 포스트잇을 붙이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는 건 뭐라 설명해야 할까.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p33
모든 시작은 기다림의 끝이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난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람 한 사람 불가능하면서도 필연적인 존재들이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이었다. p52
나무와 곰팡이는 왜 공생할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곰팡이는 어디서 어서 나 혼자서 잘 살 수 있지만, 더 쉽고 독립적인 삶을 포기하고 나무뿌리를 둘러싸고 도와주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식물의 뿌리에서 직접 나오는 순수한 당분을 찾도록 적응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 당분은 숲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이질적이고 농축된 화합물이다. 어쩌면 곰팡이도 공생 관계를 이루어 살면 혼자서 외롭게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p152
살지 않아야 할 곳에서 사는 식물은 골칫덩어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살지 않아야 할 곳에서 번창하는 식물이 잡초다. 우리는 잡초의 대담성에 화를 내지는 않는다. 모든 씨앗은 대답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화를 내는 것은 잡초들의 눈부신 성공이다. 인간들은 잡초밖에 살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잡초가 많이 자란 것을 보면 충격을 받는 척, 화가 나는 척한다. 우리가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은 사실 아무 상관이 없다. 식물의 세계에서는 이미 혁명이 일어나서 인간이 개입한 모든 공간에서는 침입자들이 쉽게 원주민들을 내쫓고 부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가 아무 힘도 없이 그저 입으로만 잡초를 욕해봤자 이 혁명을 멈추지는 못한다. 지금 목격하고 있는 혁명은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라 촉발한 것일 뿐이다. p182
삶이 두렵지도, 죽임이 두렵지도 않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슬픔도, 비통함도 없다. 태초부터 인류가 해온 답이 없는 모든 탐색에 대한 답이 의식 저변에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신의 존재와 우주의 창조에 대한 재론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내 손안에 있다. 나야말로 세상이 기다려온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을 세상에 돌려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 무릎까지 차오르는 끈적한 사랑, 사랑, 사랑 속에서 뒹굴 것이다. p208
우리가 서로 사랑한 것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희생하지도 않았다. 너무도 쉬웠고, 내게 과분했기에 더 달콤했다. 되지 않을 일은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노력해도 되지 않고, 마찬가지로 어떤 일은 무슨 짓을 해도 잘못될 수가 없다. 나는 이 사실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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