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지음 / 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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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을 갈 때마다 의사는 물었다.
"아기는 잘 놀죠?"
태동이 활발하냐는 걸 묻는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나는 그때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아.. 그런 듯도 하고, 제가 둔한 건지...." 늘 이렇게 얼버무렸다.
실제로도 그랬다.
첫아이 때는 조금만 물컹해도, 신기해~ 어머~ 꺄~ 호들갑이었다.
막달로 갈수록 쿵쿵 발차기 하는 힘이 세지는 걸 느끼면서 아, 내 뱃속에서 아기가 크고 있구나, 오롯이 느꼈다.

둘째는, 태동이 시작됐구나. 아.. 잘 때는 조금만 얌전해주면 참 좋겠다. 좀 편히 푹~ 자고 싶다. 하던 것 같다.

첫아이와, 둘째 아이를 받아들이는 온도가 내 스스로도 다르다는 걸 임신 기간 내내 느꼈다. 아니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랬다. 내 앞에 있는 첫아이의 마음을, 첫아이의 감정의 온도를 신경 쓰는데 집중했다.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군가와 무언가를 나눠야 할 때, 때마다 그게 누군지에 딸 마음의 온도가 달라졌다. 정이현의 <<우리가 녹는 온도>>라는 글을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본다.
나와 당신의 거리, 온도, 마음에 대하여.

 

 책을 펼치기 전까지 그냥 에세이인 줄 알았다. 그래서 딱 그만큼의 기대가 있었다.
예쁜 표지, 달달한 제목, 수록된 예쁜 사진들. 추운 날씨에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마음이 몽글거릴 것 같은 딱 그만큼의 기대.

열 개의 제목이 달린 열 편의 짧은 소설(혹은 산문)과 그들은, 나는, 우리는이라는 제목을 단 그만큼의 산문이 함께 실려 있는 독특한 구성의 이야기들이었다.
소설 같기도, 에세이 같기도 한 글들이 주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기르던 동물과의 이별,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 헤어졌던 사람과 다시 만나는 순간, 우정, 그 순간순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온도들. 나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 옆의 누군가를, 나를 스쳐갔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글들이었다.

따뜻하게 이불 덮고 누워 천천히 읽기 좋은 글들.
너무 춥지 않게, 손 시리지 않게 다독여 주는 글들.
분명 작가의 소설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을 듯(간혹, 아 이런 말랑말랑, 멜랑꼴리하게 만드는 글들 싫어! 하는 사람이라면 과감하게 패스하시길).

은이 떠나고 나서 얼마간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뎠다. 그러다 문득 멍해지는 순간이 왔다. 길을 걷다 풀린 운동화 끈을 묶거나,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칫솔질을 하다 말고 그는 갑자기 동작을 멈추곤 했다. 평온해서,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아서. 심장을 옥죄어오던 격렬한 통증이 어느새 순해져 버려서.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계절이 바뀌었을 뿐인데.
이윽고 그녀의 통증에 생각이 미쳤다. 그녀도 아팠을 것이다. 아프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는 분명히 믿었다. 먼저 떠난 사람이 덜 아플 거라는 추측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뒤늦게 그것을 생각했다.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인간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한 확신이었다. 아팠더라도 너무 심하게는 아프지 않았기를, 이제쯤에서 그녀의 마음도 누긋해져 있기를 바랐다. 그 기원이 너무 뒤늦어서 가슴 저렸다.
- <괜찮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 중에서. p36

사랑에 대해, 사람에 대해, 여전히 잘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에게서 ‘무슨 말을 듣든 다 괜찮다고 또다시‘ 말할 거라면, 다시 시작하지 말라고. 괜찮을 땐 괜찮다는 말을, 괜찮지 않을 땐 괜찮지 않다는 말을, 여하튼 언제나 당신의 진심을 말하라고.
서로에게 관여하지 않는 ‘좋은 관계‘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 <괜찮다는 말, 괜찮지 않다는 말> 중에서. p44

상대방이 싫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 옆의 내가 싫어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옆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할 때, 혹은 그 모습이 스스로도 생각지 못하던 방향으로 변해갈 때 우리는 이별을 결심한다.
일상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일 년 후의 삶이 까마득한 암흑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게 모두 ‘그 사람과의 관계‘ 탓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 ‘내 탓‘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과는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과 이별한다. 가방 가까운 옆 사람과 헤어지면 내가 조금은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너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어‘라는 말과 ‘미안해‘라는 말 사이에 생략된 문장이 있다면 이것이 아닐까. ‘나는 나를 더 사랑해 혹은 ‘나는 나를 더 사랑하고 싶어.‘
- <지상의 유일한 방> 중에서. p93

결혼이란 두 사람이 함께 사는 생활 속으로 돌입한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 범속한 일상들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생활비를 벌어야 하고, 공동의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 그 세월의 더께 속에서, 실은 두 사람이 최초에 무척 특별한 감정으로 맺어졌던 관계임을 상기할 여력은 사라진다. 욕실의 타일 줄눈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어떤 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아주 서서히 일어난다.
삶의 무게가 두 사람의 어깨에 고르게 배분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때론 내 어깨가 무겁다는 것보다 저 사람의 어깨가 나보다 가벼워 보인다는 사실에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하루하루 살아가느라,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차가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는지 낱낱이 기억할 여력은 없을지도 모른다. 차가운 커피와 뜨거운 커피 따위가 도무지 뭐가 중요하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치명적인 것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것인가를 누가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 <커피 두 잔> 중에서. p125

가족 사이의 문제 역시 결국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임을 나 역시 자꾸 잊는다. 보통의 인간관계라면 섭섭하고 속상하고 상처받았다가도 너무 어렵지 않게 털어내거나 잊는데, 혈육 사이의 문제 앞에선 유독 다른 상태가 되곤 한다. 더 섭섭하고 더 속상하고 더 상처받기도 하지만,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꾹 참다가 엉뚱한 순간에 엉뚱한 방식으로 폭발해버린다.
- <장미> 중에서. p154

‘위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익숙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위로를 하는 쪽이라면 차라리 낫다. 그러나 위로를 받는 일은 번번이 어색하기만 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오래도록 나는 위로받을 필요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애쓰며 살아왔다. 괜찮은 척하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 정말로 곧 괜찮아지는 줄 알았다.
실제로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픈 일에 대해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동안 시간이 지나갔다. 그래서인지 웬만한 통증은 혼자 견딜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진짜 그랬을까? 모든 통증이 다 그렇지는 않았다. 어떤 것은, 아주 작고 단단하게 뭉쳐져 가슴 맨 밑바닥에 남았다.
- <눈+사람> 중에서. p166

사라진 것들은 한때 우리 곁에 있었다.
녹을 줄 알면서도, 아니 어쩌면 녹아버리기 때문에 사람은 눈으로 ‘사람‘을 만든다. 언젠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오늘을 하는 것처럼.
곧 녹아버릴 눈덩이에게 기어코 모자와 목도리를 씌워주는 그 마음에 대하여, 연민에 대하여 나는 다만 여기에 작게 기록해 둔다.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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