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다섯 미선 씨
윤이재 지음 / 꿈의지도 / 2018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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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다섯.
앞으로 6년 남았다. 마흔다섯까지.
큰 아이는 13살, 작은 아이는(태어날) 7살.
두 아이를 키우면서 일을 하고 있겠지. 소소한 일상에 감사하면서, 때론 지겨워~ 힘들어~ 볼멘소리도 해가면서.
사춘기에 접어들 큰 아이와 전쟁을 치를지도 모르고, 신랑과 권태기를 겪고 있을지도 모르고......
반대로 매일매일이 너무 행복할 수도 있을 테지.

 

 『마흔다섯 미선 씨』를 읽으면서 다가올 나의 마흔다섯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나의 마흔다섯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소설 속, 미선 씨는 청소년기의 자녀 두 명(딸, 아들)을 두었고, 남편의 요구로 이혼을 했다.
그리고 그 남편(전 남편이 된 남자)는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얼마 전 사망했다.
교과서에 실리는 삽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간간이 작업을 하면서 미선 씨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40대 중반. 이혼이라는 과정을 겪고, 남겨진 두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 현실에 놓인 미선 씨의 모습이 얼핏 안쓰럽다~ 싶기도 하지만, 소설 속에서 미선 씨는 담담하게 자신 앞에 놓은 삶을 살아간다.
아내로, 엄마로, 딸로, 며느리로 살아가는 사십 대 여성의 삶이 어찌 늘 반짝거리기만 하겠는가. 소설 역시 일인 다역을 해내며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이 시대의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아닌 당신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아무것도 아니었던 우리들을 잊지 않기 위한 나의 의례다.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 프롤로그 중에서



그래서, 조금 더 현실적이라도 느껴졌다.
너무 우울하기만 했으면, 너무 과장되게 밝았으면 이 소설은 자칫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삶,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들은 언제나 비현실적이지만.

소설은 중편 정도의 분량이다.
읽다 보면 중간에 멈출 것도 없이 한 번에 읽을 수 있을 만큼.
나는 이 소설을 실내 놀이터의 보호자 의자에 앉아 읽었다. 시끌벅적한 놀이터 안에서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뛰놀고, 아이들이 다칠까 눈으로 아이를 쫓는 부모들 틈에 앉아서.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예윤이가 어디에서 뭘 하고 놀고 있나 찾아보기도 하면서.
내 옆에 앉은 엄마가 휴대폰을 들고 아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잠깐잠깐 힐끗거리면서.

그렇게, 이 소설은 그냥 일상처럼 자연스럽게 읽혔고 내 이야기인 듯, 옆 사람의 이야기인 듯 받아들여졌다. 그래서일까. 다 읽은 뒤에 책을 덮고 나서 뭔지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아, 나는 오늘도 내 몫의 삶을 나름 잘 살아내고 있구나 싶은 안도하는 맘 같은 거.
그리고 또 생각했지.
'아, 앞으로 나의 삶이 미선 씨의 삶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야. 많은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살아가야 될 거야. ' 라는 생각.
그리고 다짐했지. 마흔 다섯 미선 씨 처럼.
낡고 허접한 살림살이들을 말끔히 치우듯, 부질없고 쓸모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모두 버리고 가야지. 누구에게도 빌붙지 않고 스스로를 먹여 살리며 그렇게 꼿꼿하게 늙어야지. 이제 겨우 반환점. 아직 살아야 할 날들이 까막득히 남았으니까.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아도 결코 남루하지 않은, 마흔 다섯 미선 씨가 선명하게 새긴 다짐이었다. p196

부부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는 것일까? 사랑했다가 미워했다가, 싸웠다가 풀어졌다가, 다시는 안 살 것처럼 모진 말들을 내뱉었다가 다시 또 봄에 언 눈 녹듯이 사르르 달콤한 말들을 속삭이기도 하는, 그야말로 변화무상하고 지랄 맞은 사이. 천지간에 둘밖에 없다고 굳게 믿고 잘 걷다가도 아루아침에 세상천지 둘도 없는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일 듯이 물어뜯을 수도 있는 관계. 깜깜하게 어두운 밤, 달도 숨어 보이지 않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며 미선 씨는 하염없이 생각했다. p49

‘딸아 있잖아. 너는 내 가슴 속에서 찬란한 유리잔이야.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맑고 투명한 유리잔. 너무 얇고 빛나서 나는 늘 두려워. 순간의 실수로 깨지면 어떡해. 모든 게 산산 조각나면 어떡해. 어쩌면 너는 나의 이런 불안이 진절머리 나겠지. 사사건건 너의 발목을 잡고 간섭하니까. 그러나 미안해. 나도 너를 처음 키워 봐. 난 너의 엄마지만, 사실 너를 잘 모르겠어. 너를 너무 사랑해서 미안해.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나도 참 힘겨워. 사랑하는 만큼 불안한 걸까? 가끔은 주저 앉아 울고 싶어. 내가 울 때 너도 울겠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대 우리 서로 함께 울었듯이. 네가 나처럼 살지 않기를 간절히 바래. 내 엄마도 그렇게 바랬겠지. 하지만 우리 엄마도 뜻대로 안됐을 거야. 나도 엄마 말을 안 들었거든. 엄마의 사랑을 헤아릴 줄 몰랐거든. 그래서 더 불안한가 봐. 너무 내 말 뜻을 너무 늦게 깨달으면 어쩌나 하고.....‘ p74

"엄마 꿈은 뭐야? 너희들이 내 꿈이다 이런 식상한 거 말고."
"훗! 엄마 꿈? 엄마가 꿈이 어디 있니? 그냥 안 죽고 살아 남는 게 꿈이지."
"에이, 그게 뭐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꿈이 없으면 사는 게 아니야. 엄마도 꿈은 있어야지."
"다 잊었어. 꿈 같은 거. 니들 키우느라 정신없어서 꿈을 가질 새가 없었어. 먹고 사느라 바빠서 꿈꾸는 게 사치 같았어. 촌스럽게!"
"참 촌스럽네! 그럼 어릴 때 꿈은 뭐였어?"
"난 화가가 되고 싶었지. 누가 척척 돈 벌어다 주면서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림만 그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맨날 상상했어. 그럴 수만 있다면 평생 기쁘고 행복하게 그림만 그리면서 살 텐데. 날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만 실컷 그리면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맨날 꿈꿨지. 돈은 안 벌고 싶고 먹고 놀고만 싶은 도둑 심보였나 봐. "
"지금도 그림은 그리잖아."
"그래, 맞아.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아니지만, 책 속에 넣는 삽화 그림 그리는 것도 그림 그리는 거니까. 뭐, 나쁘진 않아. 그래도 이런 재주라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 매일매일 감사해. 안 그러면 너희들하고 어떻게 먹고 살아? 더 힘들었겠지." p105

"나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돌이킬 수 있을까?"
미선 씨는 나직한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멀리서, 모르는 누군가라도 미선 씨에게 한 마디만 해 주었으면 싶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딸이 선물해 준 건 포근한 캐시미어 목도리였지만 미선 씨가 받은 건 낯선 시작이었다. 무엇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하고 싶은 걸 하나씩 시작하겠다는 마음가짐. 그것은 봄을 알리는 빗소리만큼 설레는 것이었다. p190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변한 건 없다고,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두리번거리는 모든 것은 그대로‘라고 미선 씨도 답했다. 변한 것이 있다면 육체뿐, 마음은 늙지 않는다. 다만 이제부터는 상황과 조건에 떠밀리지 않고 내 뜻대로 살겠다는 단단한 의지를 나약한 마음 위에 꽂았다. 미선 씨에게 변한 게 있다면 그게 다였다. 낡고 허접한 살림살이들을 말끔히 치우듯, 부질없고 쓸모없는 감정의 찌꺼기들을 모두 버리고 가야지. 누구에게도 빌붙지 않고 스스로를 먹여 살리며 그렇게 꼿꼿하게 늙어야지. 이제 겨우 반환점. 아직 살아야 할 날들이 까막득히 남았으니까.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아도 결코 남루하지 않은, 마흔 다섯 미선 씨가 선명하게 새긴 다짐이었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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