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정상가족 -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일곱 살 언니 되면 할게."
나나, 신랑이 아이에게 "이제 혼자 밥 잘 먹어야지~", "옷도 혼자 다 갈아입고~", "장난감방 정리도 하고~", "약속한 건 잘 지켜야지~"라고 말할 때마다 여섯 살 아이가 한 말이다.

아이는 그렇게 일곱 살이 되었다.

지난밤, 아이 아빠는 말 안 듣는 아이에게 말했다.
"일곱 살되면 혼자 잘 한다며~ 말도 잘 듣는다며~, 아빠는 이럴 때 혼을 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해야 해?"

"음, 화 안 내야 해~"라며 해맑게 웃는 아이.

이제 곧 둘째가 태어나기는 하지만, 아이는 6년 동안 혼자 자랐다. 모두의 사랑을 혼자 독차지했고,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건 거의 다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때론 우리가 아이를 너무 버릇없이 키우나, 너무 부족한 거 모르게 키우는 건가 싶어 고민을 하기도 했다.
한 번 큰 소리를 내고 나면 이게 잘하는 건가 싶고, 울먹이는 아이를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가족'이라는 말만큼 마음을 약하게 하는 말도, 행복하게 하는 말도, 슬프게 하는 말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지 오래. 그러고 보면 '가족'이라는 이름만큼, '가족'이라는 공동체만큼 모순적인 게 없다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가장 아파야 하고, 가장 아끼고 싶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상처를 주는 어느 집이나 비슷비슷한 모습 말이다.

대부분의 체벌이, 학대가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책을 통해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깊게 관심을 갖고 싶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사화되는 학대받는 아이들. 버려지는 아이들. 이 아이들 역시 '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자행되는 폭력에 무자비하게 노출되어 있었다.

저자는 '가족 내에서 가장 취약한 사람인 아이를 중심에 놓고 우리의 가족, 가족주의가 불러우는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자고 제안하고 싶어 ' 이 글을 썼다 했다.

이 책 속의 글들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건, '아이'는 부모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종종 나는, 아이에게 느끼는 책임감이 무서울 정도로 부담스러울 때가 있다. 아이가 다칠까 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아플까 봐, 공부시키고, 좋은 거 먹이고, 예쁜 옷 입히고 그렇게 내가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책임감 말이다.
그 책임감 때문에  나 역시 아이가 마치 '나'의 부속품인 듯 생각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아이에게 큰소리를 내고, 체벌이라는 이유로 때론 '너 잘 못했지?'하고 윽박지르고......

저자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출발된 글은 1.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2. 한국에서 '비정상'가족으로 산다는 것, 3. 누가 정상가족과 비정상 가족을 규정하나, 4. 가족이 그렇게 문제라면 의 챕터로 나눠 이야기하고 마지막에 가서는 자율적 개인과 열린 공동체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울타리인 가족 안에서 더 많이 이루어지는 학대,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무시하고 차별하는 현상, 혈연으로 묶이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 너무 오래 뿌리를 내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올바른 가족 모델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조금 더 진지하게 하게 했다.

1부 가족은 정말 울타리인가, 속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자녀 살해 후 자살하는 가해자 중 압도적으로 어머니가 많다는 점. 서양과 달리 국내의 경우 영유아기를 넘어선 뒤에도 부모 중 한쪽이 자녀 살해 후 자살을 시도할 경우 어머니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것. 더불어 아버지 단독에 의해 자녀 살해 후 자살의 경우 가장 중요한 원인은 시대 변화와 상관없이 '배우자의 가출' 이었다는 점.
결국, 한국 사회에서 '친엄마'가 없는 것이 자녀 살해와 죽음을 선택할 만큼 고통스러운 상황이며, 친엄마 역시 자녀의 생존을 자신과 분리시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 개인이 자신뿐 아니라 자녀의 생사를 선택하는 무서운 결정을 할 때조차 한국 사회에서 어머니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짙게 배어 있다, 내용을 읽으면서는 무섭기까지 했다.

 가족이, 부모가 정상적인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할 때, 아이들은 누가 보호해 주어야 할까.
여전히  개인적인 ' 가족일'로 치부한 채 학대로 내몰리는 아이들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위의 단어들은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에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 정리한 기록이다.

어른들이 느낀다고 해도,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단어들이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어 온 무수한 폭력이 더 이상은 아이들에게 행해져서는 안된다는 책임감.
나와 다른 가족의 형태라고 해서 무시하고, 차별하고,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지 말아야겠다는 반성.
아이도 어른도, 가족 안에서 각자의 자율성을 존중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진실을 실제 삶에서도 적용시키고 싶다는 바램.

이 한 권의 책이 내게 던져준 질문과 생각거리가 너무 많고 무겁다.

작년부터 나는 '미혼모'와 '입양'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아이를 낳고 키우다 보니 버려지는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우리 사회가 건강해지려면, 좀 더 올바른 어른들을 많이 만들어 내고, 아이들을 행복하게 자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려면 '미혼모'에 대한 지원이, 그들이 키우는 아이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절실하다.

이 책은 여러 통계를 기반으로 우리 사회가 '정상가족'이라는 이름 하에 행하고 있는 무차별적인 학대와 비정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한 번 더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 책. 함께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은 책이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리스트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따로 적어두고 올 한해 천천히 읽고 보고 싶다.

늘어나는 비혼과 저출산으로 가족 해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나는 가족 해체보다 여전히 더 큰 문제는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한 완강한 가족주의라고 생각한다.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현실과 달리 사람들의 의식과 제도에는 여전히 가족주의와 그것의 강력한 작동 방식인 ‘정상가족‘ 이데올로기가 깊게 스며들어 있다. p9

아이들은 문자 그대로 ‘작은 인간‘이다. 그저 작을 뿐 성인과 다르지 않은 사람,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초대받아 성인과 종류만 다를 뿐인 불안을 견뎌내야 하는 여린 생명체다. 한 사회에서 가장 약한 자가 그 사호의 수준을 드러내 보여준다면 작은 단위의 사회라 할 가족도 이를 중심에 놓고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p11

부모의 훈육적 체벌은 의도가 선하기 때문에 신체의 온전성 및 인간 존엄성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사실상 부모 중심, 성인 중심 해석일 뿐이다. 체벌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에 대해 인류학자 김현경은 『사람, 장소, 환대』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 체벌은 갖가지 이유로 행해질 수 있고, 거기 따라붙는 훈계도 그만큼 다양하다. 하지만 표면상의 다양성을 넘어서, 체벌은 언제나 단 하나의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전달한다. 바로 체벌이 언제라도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이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모욕의 역설을 이해하게 된다. 모욕은 타인의 인격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러한 부정에 대해서 부정당하는 사람의 동의를 강요한다.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의 일부이며 질서의 일부가 된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p29

문제없는 가정에서 자신이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저는 맞아도 싸요"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 "나만 없으면 우리 집은 행복할 것"이라고도 말한다. 자신이 가족의 행복을 해치는 비정상적이고 문제 많은 존재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p70

우리는 어떤가. 잇따른 아동학대 사망사건들과 세월호의 비극 이후 아이들의 삶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과연 이대로 좋은지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반성과 자각을 하고 있나.
사회가 함께 도와줄 것이라는 신뢰 없이, 남을 이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불안으로 모두들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놀지도 못한 채 일찌감치 떨려나거나 부모의 소망은 충족시켰을지언정 자기 인생을 위해서는 아무 결정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아이들에게 맘껏 놀며 자기 속도대로, 원하는 방향으로 힘껏 가보라고 격려해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가 그토록 어려운 걸까. p76

과거 친권은 사람의 물건에 대한 지배권처럼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갖는 일종의 지배권이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부모 권리의 객체였을 뿐이다. 그렇게 친권을 ‘권리‘라고만 표현하다가 ‘자녀를 보호, 교양할 권리, 의무‘라고 정의한<민법> 조항처럼 ‘권리이자 의무‘로 부르게 된 것도 과거에 비하면 큰 진전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친권이 아이들을 보호하기는커녕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가족이 그 안에 속한 개개인, 특히 아이들의 차별 없는 권리와 평등을 보호해줄 수 있으려면 권리보다는 의무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공공의 역할이 필요하다. p109

나는 미혼모가 양육을 선택하지 못하고 아이를 버리게 되는 첫 번째 이유로 출산은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야만 정상으로 규정하고 이를 벗어나면 ‘비정상‘과 ‘부도덕‘으로 몰아세우는 한국의 가족주의를 꼽겠다.
한국의 가족주의는 소위 ‘정상가족‘인 가부장적 가족만 인정하는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법적 혼인절차가 수반되지 않은 임신과 출산, 양육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인정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결혼=출산‘의 등식이 지나치게 확고한 탓에 제도의 바깥에서 출산함으로써 가족의 순수함을 훼손했다고 여겨지는 미혼모와 그 자녀들은 제도적, 사회적 차별에 시달린다. p115

중요한 것은 친엄마의 양육이 더 좋고 입양이 더 좋고를 떠나서 여성이 출산과 양육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회구성원들처럼 미혼모에게도 자신과 아이에게 가장 좋은 방법을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말뿐인 다양한 가족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차별 없이 다양한 가족이 공존할 수 있도록 결혼을 둘러싼 법 제도의 개선, 여성의 양육권과 아이의 인권 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더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p128

양극화된 가족 삶의 최대 피해자는 아이들이다. 사교육 과열 양상이 보여주듯 중산층은 계층 하락을 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총력 경쟁에 나선다. 저 높은 곳을 향해 나아가야 하므로 아이의 자율성, 개별성이 고려될 여지는 희박하다. 반면 소득과 경제적 유지가 불안정한 저소득층은 아이들을 돌보지 못하는 ‘돌봄 공백‘ 상태에 빠진다. 이 탓에 아이들은 자주 방임 상태에 놓이고 스트레스 해소의 대상이 되어 학대에 시달리는 아이들도 늘어난다. 국가가 모든 책임을 가족에게 전가해버린 탓에 가족이 각자도생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에서 가장 약한 자인 아이들이 늘 피해자가 된다. p176

가족주의를 떠나서 보편적으로 부모와 자녀의 심리적 분리는 부모뿐 아니라 자녀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자신 안에 내면화한 부모의 모습과 싸우고, 달래고, 도망치고, 협상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곧 사람이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성장의 과정이다. 나이가 든다고 끝나는 일도 아니고 어쩌면 평생 지속해야 하는 과제이다. 나는 그 과정을 어떻게 치러내는가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각자도생의 경쟁 속에 이기적 가족주의의 강력한 영향이 모든 사람의 삶에 어른거리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p190

거의 모든 복지국가들이 운영 중인 아동수당은 모든 아이들이 부모의 성별, 재산, 혼인상태, 사회적 출신, 종교, 출생지 등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도 차별받지 않고 자라야 한다는 점을 사회적으로 인식하자는 차원의 제도이다. 그래서 부모의 소득이나 자산을 조사하지 않고, 한 부모인지 아닌지, 부모가 둘 다 취업상태인지 아닌지, 부모가 원하는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고 평등하게 지원해야 그 취지에 맞다. 왜냐하면 아동수당은 아이들의 시민권에 대한 공적 보상이고 모든 아동의 생존권과 건강한 발달을 보장하는 것이 핵심인 정책이기 때문이다. p24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폭력에 반대하는 개인의 인권의식이지 남의 아이도 내 자식처럼 돌보는 엄마의 눈, 전 사회의 ‘확대가족화‘가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이를 때리는 것을 보았을 때 항의하고 신고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더 약한 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인 것이지, 우리가 모두 이웃의 아이를 함께 지키는 대가족 구성원의 마음자리를 가져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폭행하는 가정폭력에 대한 해법으로 공동체 회복을 말하지 않는다. 아동폭력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으로 어릴 뿐 온전한 인간인 ‘작은 인간‘에 대한 폭력과 인권유린을 없애는 게 우선이다. 체벌, 아동학대, 자녀 살해 후 자살은 모두 아이들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아서 빚어지는 비극인데 해법도 더 많은 공동체를 내세우며 개인을 소거해서는 안 된다. p260

변화는 필연적이다. 이미 시작되었다. 2016년 겨울부터 전국을 달궜던 촛불집회에서 나는 그 희망을 본다. 그 어떤 공동체에 속하지 않고도 각 개인이 광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도 연대할 수 있음을 우리는 가슴 뜨겁게 경험했다.(중략) 촛불의 벅찬 경험이, 민주주의의 학습이 각자가 속한 삶의 장에서도 중단 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촛불로 태어난 정부가 공공성 강화를 통해 가족의 짐을 덜어주고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각 개인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 보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도 괜찮은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좋겠다. 가족 안팎에서 ‘정상가족‘의 숨 막히는 틀 대신 수평적 유대관계를 통해 아이들의 자율을 존중하고, 다음 세대에선 나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지 않는 개인들이 자라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p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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