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딩, 턴
서유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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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렇게 사는 건 아닌 거 같아서.
- 살다 보면 이런 때도 있는 거지, 뭐. 다들 깨 볶으면서 사는 거 아니야. p17

싸우고, 감정 다치고, 추스르고, 사과하는 법에 서툴러서 내 연애는 늘 소극적이었다.
어지간하면 상대에게 맞춰주면서 별거 아냐, 이 정도쯤은 이렇게 스스로에게 말했던 것 같다.
내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면 상대방이 화를 낼까 봐, 혹은 헤어지게 될까 봐 때론 두려워했던 것도 같다.

그래봐야 고작 십 대 시절의 풋풋했던 연애 한 번에, 이십 대에 짧은 연애 한 번과 지금 신랑과 한 7년간의 연애 세 번의 연애가 전부지만 연애를 통해 나를 많이 알게 된 건 사실이다.

신랑과 긴 연애가 가능했던 이유는 서로 그 감정싸움을 할 필요가 없어서였던 것 같다.
내가 굳이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대부분 맞았고, 서로 같이 있지만 따로 있는 것처럼 자유로웠다.
만약, 그때 우리가 헤어졌다면 나는 이런 이유를 댔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날 자유롭게 두니까, 날 사랑하지 않는 거 같아서."

결혼을 하고 난 뒤에, 그게 얼마나 서로에게 장점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사내 연애에, 결혼하고 나서도 같은 직장에 다니는지라 서로 손바닥 안일 수밖에 없는 생활 반경.
그나마 부서가 다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결혼 이후 내가 지금까지 꼭 지키는 게 하나 있다면, 같은 직장이라도 어지간하면 퇴근 후에 직장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 신랑이 퇴근 후가 갖는 술자리엔 잘 아는 동료들이라고 해도 같이 합석하지 않는 것. 술자리에 누가 함께 했는지 뭘 했는지 묻지 않는 것.

 

서유미 작가의 <<홀딩, 턴>>을 읽으면서 결혼에 대해, 결혼한 부부에 대해, 그 관계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소설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소소한 갈등을 겪고, 별거를 하고, 이혼을 결심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박을 하거나 큰 빚을 지거나 폭력을 휘두르거나 엄청난 시집살이에 괴로워 헤어지는 부부들도 많겠지만 어떤 부부들은 정말 사소한 것들로 헤어짐을 결심할 수도 있겠구나.
같이 있는 게 더 이상 행복하지 않다거나, 남자가(여자가) 싫증이 났거나, 혼자서 자유롭게 살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데, 그런 사소한 이유로 헤어진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 다들 그렇게 살아. 별거 없어. 그니까 그냥 어지간하면 그냥 살아."라고.

- 사는 게 이런 건가. 다들 이렇게 사나. 둘러보게 되더라.
   어쩌다 한번 싸우는 게 아니라 가끔 화해하며 사는 사람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원수가 되거나 한집에 살면서 같이 밥을 먹는데 서로에게 가장 냉소적인 사람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한 번쯤은 꽉 막힌 수챗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덤볐다가 역류해서 바닥이 지저분해지고 옷이 다 젖을까 봐 겁이 났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해 가고 싶었다.
- 네가 이혼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천천히 해나가고 싶었어.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p44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나, 피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할 때 때론 오히려 더 담담해지기도 한다.

소설 속 남자와 여자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아릿했다. 작가는 이별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쓰고 나니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소설을  읽는 내내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도, 이별도 때론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니까.

잘 지내는 것 같던 연인이나 부부의 관계가 깨질 때 상대의 불륜이나 변심, 파산, 폭력, 중독은 선명한 파경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로 명명하기 어려운 이유들이 자잘하게 집 여기저기에 곰팡이처럼 번져버린 경우도 있다. 볼 때마다 닦고 주기적으로 꺼내서 말리는데도 은밀하고 깊숙하게 번져나간 곰팡이를 목격할 때면 어느 순간 맥이 탁 풀리며 손을 놓고 싶어진다. 곰팡이가 관계를 삼켜버리는 것이다. p47

 

부부 사이의 일은 부부만 알 수 있다는 말에 공감한다.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는 부부에게도 건드릴 수 없는 약한 부분이 있을 테고, 진짜 맞지 않아 보이는 부부 사이에도 그들만의 접점이 되는 맞는 부분이 분명 있겠지.
타인의 이야기를 쉽게 하거나, 타인의 상황을 쉽게 이해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알지 못하는 영역 때문이 아닐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혼자 헤어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결혼 4년 차쯤.
육아도 혼자 하는 거 같고, 외로운 거 같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 같았다.
싸움도 없었고, 서로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도 없었다.
대신 대화가 줄었고,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지나왔는지 지금은 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도 그랬을까.
- 사는 거 다 비슷비슷하겠지. 그래도 우린 나쁜 건 아니잖아.

이별이나 이혼에 대해 말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은지 알 수 없었다.
지원은 빈 머그잔을 꼭 쥐었다. 이혼 문제를 이렇게 쉽게 결정해도 되나, 하는 염려와 고민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같이 있는 게 힘들고 서로에게 상처를 준다면 헤어지는 게 맞지, 하는 체념이 동시에 들었다. 이 합의가 드레스와 턱시도를 차려입은 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고 평생 함께 하겠노라 선언하던 그 장면을 훼손하는 거라고 여기지 않기로 했다. 결혼이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면서 행복해지려고 했던 거라면 이혼에 대한 고민도 앞으로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합의하는 순간 타당한 일이 된다. 물론 이유를 불문하고 지원이 이혼했대. 누군가 말하고 옮길 때 부정적인 궁금증과 억측, 짐작을 몰고 오리라는 건 뻔했다. 다른 사람의 이혼 호식을 접했을 대 지원도 그랬으니까. 입방아에 오르거나 안됐다는 시선을 받을 걸 알면서도 그 일에 과감히 뛰어들려고 하는 건 그러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해서다. 남은 날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꾸려는 것이다.
- 네가 잘해보려 했던 거 알고 나도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많이 부족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이렇게 돼서.
영진은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 나도 미안해. 결국 이렇게 돼서. p147-148

적어도, 남은 날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지금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은 용기 있는 사람들.
아이 때문에, 부모 때문에, 시선 때문에 조금 덜 행복한 쪽을 찾는 많은 사람들보다는(물론, 현실에서는 그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분명히).

이런 소설이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정의하거나, 긴박한 스토리가 아니더라도 소소하게 마치 일상을 그리듯 이야기해 주는 소설.
그래서 지금의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소설.

-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꼭 해어져야 해?
그 질문들은 그동안 지원이 이별한 사람들에게 던졌던 것이라는 점에서 예측 가능했다. 그 입장이 돼보니 말의 온도가 달랐지만 돌려받을 차례가 된 거라고 생각하면 야속하거나 섭섭하지 않았다.
살다 보니 누군가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러서 신뢰가 깨지고 그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던지고 부수고 머리끄덩이를 잡고 서로 죽일 듯이 싸워야만 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대화는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서로의 뒷모습을 보며 적의가 담긴 눈길을 쏘아대는 순간 헤어짐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p229

사랑도, 이별도 거창한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니 너무 겁먹지 말자는 다독임. 위로.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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