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와의 티타임 - 정소연 소설집
정소연 지음 / 래빗홀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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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초기 노래 중에 <9와 4분의 3의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큰 아이가 덕질 중인 아이돌이라 귀가 따갑게 얘기를 듣는 중인데, 이 노래의 제목을 듣고 나서 "야, 무슨 노래 제목이 그러냐!" 말했던 기억이 있다.

그렇다. 나는 해리포터 시리즈를 보지 않은 사람이다.

호크와트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매 새 학기마다 학부모들이 킹스 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학생들을 배웅한다.

이것도 검색해 찾아낸 내용이다.

정소연 소설가의 <<앨리스와의 티타임>>을 읽으면서 세계와 세계 사이를 연결하는 '문'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과 저쪽을 오갈 수 있지만 눈에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는(특정인들에게만 보일 수도 있는) 그런 문.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문.

묘한 느낌이 들어 계속 검색창에 생각나는 단어를 넣고 검색했다. 그러다 발견한 게 킹스 크로스역 9와 4분의 3 승강장이었다.

그러고 나니 연쇄반응처럼 투모로의바이투게더의 노래 제목이 떠올랐던 거다.

숨겨진 9와 4분의 3엔

함께여야 갈 수 있어

비비디 바비디 열차가 출발하네

비비디 바비디 우리의 매직 아일랜드

이 터널을 지나면

눈을 뜨고 나면

꿈속은 현실이 돼

내 영원이 돼줘 내 이름 불러줘

- <투모로루바이투게더,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 부분>

가사를 찾아 읽고 나니 어떤 이미지들이 떠올랐고, 다시 소설 <<앨리스와의 티타임>>으로 생각이 연결됐다.

어떤 사람들은 본 적도 없을 우주의 한복판에서 정연이 이처럼 흔들렸던 순간이 있었다.

정연은 잠시, 지영에게 저 틈 너머에 수많은 세계가 있다고,

지영도 원한다면 그 사이로 아득히 흩어지며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맞지 않는 세계에서 오랫동안 버텨온 지영이 얼마나 대단하고 대견한지 진심으로 칭찬하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정연은 지영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한 번 더 말했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그리고 틈이 닫혔다.

- <비거스렁이> 중에서, p64

그러면서 계속 마음에 남은 단어가 있다.

'틈' 혹은 '틈새'

대체로 '틈이 생기다'처럼 쓰일 때 긍정보다는 부정의 느낌이 전해지는 이 단어가 소설에서는 자꾸 '희망'의 단어처럼 느껴지는 거다.

'벽'처럼 단단히 막혀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그 '틈'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고, 결국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희망.

높기만 해 보이는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을 차근히 밟고 올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만나게 될 희망.

어쩌면, 지윤이 다른 계단을 더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학교 밖으로 통하는 계단을, 서혜가 어디에 있든 서혜에게로 열리는 계단을.

사라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어쩌면 열리는 계단들을 처음 찾아낸 것은 지윤 같은 사람들이었을지도 몰랐다.

먼저 앞서 나갈 만큼 용감하지는 않은 사람들, 조금 느린 사람들, 저 밖에서 내 곁으로 무사히 데려오고 싶은 이가 있는 사람들.

학교에는 아직, 지윤이 밟아보지 않은 계단이 아주 많았다.

- <계단> 중에서, p108

궤도선이 천천히 내려앉더니 이윽고 멈추었다. 우주항의 출구를 나서자 기다리고 있던 부모님이 나를 금세 발견하고 일어섰다.

아버지가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우리 사이의 틈을 메우듯 성큼성큼 다가와 내 손을 당겨 잡았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가 물컹한 젤리처럼 밀려난 공간에, 희미하게 온기가 퍼졌다.

나는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고, 나보다 훨씬 길로 큰 아버지의 손을 감싸 쥐었다.

- <귀가> 중에서, p246



SF 소설을 많이 읽지 못했던 건 언제나 내 발이 '현실'을 딛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설의 내용도 대체로 현실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했고, 내가 가능할 수 있는 세상의 이야기를 읽기를 바랐다.

정소연의 소설을 읽으면서 세계와 세계 사이, 틈과 틈 사이, 현실과 현실이 아닌 것 같은 세계에도 결국 사람이 있고, 삶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혐오 받는 사람들, 상처 입은 사람들, 그러나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이. 그들이 살아가는 삶이.

나는 언제나 누군가가 빈자리를 채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세계의 루트벤은 다른 사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셸던 부인이 낯선 시공을 헤매며 만들어간 것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가 빈자리로 남은 세계가 아니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 <앨리스와의 티타임> 중에서, p34

언제나, 누군가는 살아가고 있고 나도 그렇다.

틈을 넘어가야 보일지도 모르는 내가 모르는 세계에 겁내지 않기를,

그 틈을 보아야 내가 아닌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보일 것임을,

손 내밀기를 주저하지 말기를,

소설을 덮고 난 뒤 오래 한 생각이다.


"아주 천천히, 아주 적은 글을 썼다. 삶은 외롭고 용기는 드물고 선의는 귀하여, 삶에서 이야기를 건져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내 보기에 가장 외로운 것, 가장 진심인 것, 가장 귀한 것을 모아 소설로 만들었다.

소설이라는 이 배가 당신과 나 사이의 긴 항해를 버틸 만큼 튼튼하기를, 시공간을 넘어 언젠가 결국은 당신에게 도달하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중에서,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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