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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밤 되세요 ㅣ 폴앤니나 소설 시리즈 1
노정 지음, 드로잉메리 그림 / 폴앤니나 / 2019년 10월
평점 :
이런 얘기는 굳이 필요 없지만,
자꾸만 어떤 장면을 상상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런 장면.
호텔도 아닌 것이 호텔인 척 이름을 달고 떡 한 서 있는 OO 호텔 앞 어느 골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척 조금은 부끄러운 척 서성이고 있는 아직 어린 여자 어른과, 그보다 두세 살 밖에 더 안 먹었으면서
괜히 더 어른인 척하던 남자 어른의 모습.
들어갈까, 말까 서성이다가 결국 지하철을 놓치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해 굳게 닫힌 호텔도 아닌 것이 호텔인 척하는 OO 호텔 문을 열고
들어서는 두 남녀의 모습.
그러니까 정말이지 이런 얘기는 굳이 필요 없는데도 왜 자꾸 그런 장면이 떠오르는 거지.
'드림초콜릿호텔'
이게 다 이름마저 달콤한 이 호텔 때문이다.
그런데 이 호텔 어쩐지 수상하다.
호텔이란 모름지기 화려하고, 단정하고, 깔끔하고, 어딘지 모르게 럭셔리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들어서는 손님들이 대접받는 느낌이 들어야 하기 마련인데 이 달콤한 호텔은 아무도 모르게(아니 호텔 직원들만 알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다.
은유가 아니다. 실제로, 물리적으로 무너지고 있다(p11)
불면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던 나명은 정신병원에서 도박중독으로 입원해 있던 '드림초콜릿호텔' 나 사장의 꼬드김에 넘어가 호텔 캐셔로 호텔에 입성했다.
돈 받고 키만 내주면 된다는 사장의 말과 달리 호텔은 그리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술 취한 사람, 혼숙을 몰래 시도하는 사람, 데이트 폭력에 신고에 경찰이 오고, 매일매일 사건의 연속이다.
그랬다. 호텔은 은밀한 곳이다.
어쩌면 말이다.
애인과의 색다른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서, 가족들과 호캉스를 즐기기 위해서도 호텔이 존재하지만
숨겨야 하는 게 있는 사람, 누군가의 눈을 피해야 하는 사람, 몰래 무언가를 도모하는 이들을 위해서도 역시 호텔은 존재했다(필요했다).
그런데 어째 이 '드림초콜릿호텔'엔 전자보다는 후자가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캐셔로 취직한 나명은 남한사회주의노동자당의 나 과장으로 불렸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남자친구 리재의 죽음을 마주하고 어쩌면 나명 역시 피할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것도 스스로 삶을 포기한 이를 두고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이,
그게 나의 탓이 아닐 거라 여기는 일이 쉽지 않을 테니까.
「타자의 죽음을 해석하는 일정한 회로가 있습니다. 누구나 갖고 있어요. 죽음의 영역이지만 죽음에 대한 주석만 달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샴쌍둥이처럼 등을 붙인 한 몸이라서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타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곰삭여서, 무심하게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삶의 태세를 놓치지 않아요. N분의 일의 죽음을 인정하고 N분의 일의 삶을 또 살아가는 것이지요. 무심하게, 이 갈리게.
그 회로가 고장 났거나 혹은 닫혀 있음을 알게 되고 나서, 나는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어요. 누군가의 부음이 들려올 때마다 애써 귀를 닫았습니다.
거리를 두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요. 막장 같은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지 않기 위해서 무심해지는 쪽을 택했습니다. 또다시 그 천재지변 같은 진동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결계처럼 쳐놓은 안정장치였어요.
그런데 리재의 죽음은 그 결계를 무너뜨렸습니다. 리재는 죽어서도 내 곁은 떠나지 않고 서성거립니다.
나는 죽음에 대해 더 이상 거리를 두지 못합니다. 무심해지지 않아요.
그 와중에 이 빌어먹을 호텔은 시시각각 지진 경보를 울리며 나를 위협하고 있어요. 연탄을 피우고 수면제를 삼키고 죽은 시체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는 날, 나는 그 강진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나는 자신이 없습니다.
박사장은 틈만 나면 사무실로 나를 부릅니다.
요즘은 괜찮아? 니가 혹시 또 안 좋아질까 봐 내가 사실 걱정이 말이 아니다아.
나는 괜찮지 않다고, 니가 최저임금을 안 줘서 굉장히 괜찮지 않다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벚꽃축제 기간의 토요일에 차 키를 세 개나 놓친 저성과 노동자가 할 말이 아니어서 또다시 삼켰습니다.
자살하지들 말아요. 잘 살아요. 호텔은 걸어서들 가고.
- <영업정지보다 무서운> 중에서, p112」
어쩌면 이 호텔은,
이별하기 위해 찾아오는, 잘 이별하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위안의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인사도 없이 떠날 준비를 하는 이들도,
인사도 없이 떠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이들도,
숨어들기 좋은 공간. 비록 조금씩 무너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버티고 서 있으니까.
조금만 버티다 보면,
그렇게 버티다 보면,
내일은 또 오니까.
하룻밤 묵고 나면, 아침이면 다시 키를 반납하고 호텔 문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야 하니까.
마냥 그곳에서 머물 수는 없으니까.
소설은 재밌다.
잘 읽힌다. 술술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웃기다.
슬핏슬핏 웃음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 이상하지.
자꾸 마음 한편이 아리다.
찌릿거린다.
잘 자고 있을, 이미 오래전 헤어진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게 하고
잘 지내고 있을 오래전 친구에게 안부를 묻고 싶게 한다.
헤어짐에 익숙해질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괜찮다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라고, 괜찮다고 또 다른 날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아 시큰해진다.
「그런데 아이가 죽는다는 건요. 그래요. 그렇지요. 죽음과 모성은 실로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리재가 죽고 나서도 나는 살아야겠다고 결심했으니까요. 결심, 이라. 그게 결심 때문인지 문득 의심스럽군요. 내가 살겠다고 다짐을 하고 결정을 한 걸까요? 따져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리재는 나 때문에 죽은 게 맞아요.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을 때 돌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언덕, 그게 나였기 때문에 리재는 죽은 것이지요.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 하나밖에 남지 않았을 때 사람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그 아이를 벼랑 끝으로 내 몬 것은 나예요. 그리고 내가 리재를 죽이고, 내 배로 낳은 아이가 죽었는데, 내가 죽어버리는 건요. 너무 쉬워요. 너무 쉽고, 가볍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게 리재를 위하는 길이 맞아요. 당신들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 리재를 잊을 거예요. 그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죄스러워하지 말아요.
하지만 나는 그 아이를 기억해야지요. 기억하고 슬퍼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리재가 덜 가엾지 않겠어요. 그래서 난 그냥 살기로 했어요.
명이 씨는 명이 씨의 몫을 살아요. 리재의 몫 따윈 신경 쓰지 말아요. 자기 몫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다하다 저엉 안 되면, 그냥 대충 살아요. 그러면 또 어떤가요. 나는 이제야 그걸 깨달았어요.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끝까지 받아들 일 수 없겠지만) 하는 부모, 사랑하는 애인의 죽음을 견뎌야 하는 남은 애인, 그리고 그 주변의 여러 사람들.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남은 이들이 버티고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결국, 그래도 살아내야 함을 들려주는 것 같아서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눈물 조금 흘리고야 말았다.
'명이야, 아직 애도의 시간이 끝나지 않았다면 잠시 너의 상실에만 집중하렴. 충분히 애도하고, 슬퍼하는 거야. 그리고 다시 살아. 우리 모두 그래도 돼 p166'
나는 여전히 그 장면을 떠올리고 있다.
어색하게 OO 호텔로 들어선 아직 어린 여자 어른과, 조금 더 나이 먹은 어린 남자 어른.
캐셔에게 키를 받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 구멍을 잘 맞추지 못해(어쩌면 이미 고장 나 버린) 키를 여러 번 돌려 방 문을 열고 드디어 방 안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그들에게 슬쩍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이 호텔,
무너지고 있어요.
진짜예요.
그래도 버텨야 해요.
꼭 살아남아야 해요.
덧붙임
1. 지극히 개인적으로 소설을 읽다 보면,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남기지 못한 것 같아 괜히 아쉬운 마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어쩐지 내게 이 소설이 그렇다.
소설 곳곳에 담겨 있는 사회문제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어쩐지 이 글에서 쏙 빼버리고 만 것 같아 아쉽다(어쩌면 내 능력이 그것뿐인지라).
이 소설을 읽은 많은 독자들이 꼭 그 부분까지 챙겨 읽기를.
2. 나는 이 책을 텀블벅 후원을 통해 구입했다.
덕분에 예쁜 노트와 거울까지 챙겼다. 노트는 너무 아까워서 오래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기만 할 것 같다.
거울은 이미 초등 1학년 큰 딸에게 뺏기고 말았다.
3. 그림을 그린 드로잉메리 님의 그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겠다.
한 장면 한 장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다(는 건 정말이지 대단한 일 아닌가).
그림은 꼭 책을 통해 확인해 주시길.
4. 아쉬운 마음에 진짜 마지막으로 딱 한 문장만 더 옮긴다.
우리가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떠나보냈다. 때로는 죽었다. 누군가 죽고, 떠나도 남은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하물며 혁명의 이상 따위야 말할 것도 없다. 부풀었던 꿈이 바람 빠지듯 허망하게 사라진 자리에도 여전히 삶이 이어진다. 지질하고 궁상맞은 폐허를 견디며 다들 그렇게 산다. p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