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시선 429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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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

더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은평병원을 지

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

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보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

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

요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

출 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

펜 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매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 <모르는 사이> 전문,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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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소란, 소란 하고 소리내어 발음해 본다.

수런수런, 도란도란, 속닥속닥, 떠오르는 단어들을 같이 발음해 보다가 혼자 수줍게 웃는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라고 말하는 시인의 수줍은 인사를 떠올린다.

한번도 만난 적 없이 헤어지는 버스 안의 낯선 사람들을 떠올리고, 내리는 사람의 등 뒤를 가만히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한다.

쓸쓸할 것 같은 모습이지만, 어쩐지 온기가 돌 것만 같은 버스 안의 모습을.

 

'지난 연애란, 그러니까 이별이란 가장 뜨겁게 버려진 기억이 아닐까. 스스로의 의지(?)로 끝을 낸 경우든, 어쩔 수 없이 끝을 당한 경우든, 연애는 결국 지는싸움이 되고 만다. 그러니 그 싸움의 기억은 절대적이다. 시는 어떤 식으로든 피 흘리는 기억을 보듬어 안을 운명에 처해 있다. 지난 날의 나는 시가 사랑을 더욱 탐스럽게 치장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나는 시가, 사랑을 시로 쓰는 일이 그 살이 꿈틀대는 사랑을 죽이고 또 죽여서 곁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일임을 알 것 같다.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 중 박소란의 <전부를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중에서'

오래전(이라고 했지만 2017년) 읽었던 『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 라는 책에서 박소란 시인이 쓴 <전부를 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를 읽고 메모해 둔 문장을 다시 꺼내 읽었다.

그때 그 글을 읽으면서 저 문장이 좋아서 여러번 읽었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

몇 편의 시를 계간지를 통해 읽었는데 다시 시간이 지나 시인의 시집을 만났다.

가장 뜨겁게 버려진 기억, 피 흘리는 기억을 보듬어 안는, 그 말들이 좋아서 옮겨 적어두었는데 이번 시집 속의 시들을 읽으면서 나는, 시인이 보듬어 안은 세상을, 사람들을 더듬더듬 쫓아 다녔다.

모든 詩들은 '삶'을 향해 있음을 매번 느낀다.

어떤 글이든 안 그러겠냐만 유독 좋은 시들을 읽을때면 그게 더 뚜렷하게 각인된다.

짧은 언어로 담아내는 세상과 사람들을 쫓아 다니다보면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삶'이 조금더 생생하게 느껴진다.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쓸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 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감

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 <감상> 중에서,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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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다가 온 슬픔, 다시 되돌아 가지 않은 슬픔.

그 슬픔을 털고 일어나 닫힌 문을 두드리는 순간, 울음이 멈췄을까. 울음을 애써 참아야 했을지도 모를 어떤 외로움이, 그 외로움을 털어내고 싶어 문을 두르리는 주먹이, 그 쾅쾅거림이 느껴졌다.

시인의 시들 속에서 사람들은 어디로 갈 지 모르고, 종종 울고, 자주 가엽고, 멈칫거린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서 나도모르게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는데 그 가라앉음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나만 들릴듯한 목소리로, 내안의 나에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같은 시들이었다.

'나'에게 오롯이 집중하게 만드는 시들이어서 좋았다.

나는, 매번 흔들리지만

나는, 자주 외롭지만

나는, 때론 두렵기도 하지만

나는, 이따금 미치도록 누군가 그립기도 하지만

나는, 한번씩 미친듯이 소리지르고 싶기도 하지만

나는,

나는,

그럼에도 다시.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또 걸어가고 있다고 그러면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고요한 새벽, 토닥토닥 누군가의 등을 어루만져주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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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를 내는 것 굳게 팔짱을 끼고 성마른 등을 보이는 것

이제 막 하나의 심장을 받아 소용돌이치는 사람처럼 이

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미안, 눈물이 돈다 처음부터 미안을 기다려온 사람

처럼 단지 미안만을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내민 손을 붙드는 것

비 갠 오후 성당 돌담길은 더없이 평온해

세상 마지막 인사인 듯

물기 번진 잎사귀를 매달고 걷는 것

바람이 살랑이고 슬며시 웃음이 고이고 잠시 잠깐 기도

를 떠올리는 것

토라졌다 때마침 화를 푼 사람처럼

하늘의 표정은 맑고 사랑에 빠질 듯 찰랑거리고 모든 게

그만 괜찮아

괜찮아, 하면 눈물이 돈다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이토록 정다운 사람처럼

- <정다운 사람처럼> 전문,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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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작고 무른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르나 어떻게

사랑하나

저 알 수 없는 것을

자꾸만 꼬물꼬물 숨 쉬는 것을

부둥켜안고 어디로 달려가나

순백의 울음소리가 병원 복도를 번쩍이며 스칠 때

더운 가슴팍을 할퀼 때

사람들은 아프고

잇따라 울고

또 어떻게 웃을 수 있나

저 작고 무른 것을 두고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기도할 수 있나

불 꺼진 진료실 앞

멀거니 앉아 순서를 기다릴 때 어떤 삶은

까무룩 쓰러지듯 잠들 때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더욱더 선명하고

어떻게 웃을 수 있나

어떻게

나는 태어날 수 있나

- <아기> 전문,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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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잡이를 잡는다 그가 잡은 것을 그녀가

그녀가 잡은 것을 그가

잡는다

마치 사랑을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는다

잡았다 놓는다

그러다보면

문은 스르르 열리곤 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아귀힘을 풀곤 하는 것이다

문의 순순한 가슴팍을 두드리며 사람들은 쉴 새 없이 들

어오고 나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끊임없이 문을 열리고 닫히는 사이

손잡이가 돌고 도는 사이

손들은 너무 쉽게 뜨거워지고, 함께 가요 우리 문 저편

그럴듯한 삶을 시작해 봐요

그러다보면

남몰래 열이 든 손잡이도 그만

손이 되고 말 것 같지만

꼭 쥔 주먹을 풀고 엉거주춤 하나의 주머니 속을 파고들

고도 싶지만

손은, 아니 손잡이는

그러지 않을 작정이다

그렇게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

- <손잡이> 전문, 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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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쑥, 이라는 말이 좋아

불쑥 오는 버스에 불쑥 올라 불쑥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

그런 일이 좋아

나는 그에게 사랑을 고백할 텐데 불쑥 우리는 사랑할

텐데

고단을 가득 태운 버스가 우리를 창밖으로 내팽개친대

도 그리고 모른 체 달려간대도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이봐, 이걸 보라구, 여기 불쑥이란 게 있다구

아하, 그렇군!

걱정 없을 텐데

이제부터 나는 불쑥이 될게, 실없는 농담을 해도 그는

고개를 끄덕일 텐데

어이 불쑥, 반색하며 불러줄 텐데

그러면 대답할 텐데 응, 하고

불쑥이 대신

불쑥은 내가 될 텐데

나는 불쑥 뒤에 숨어 숨바꼭질처럼 살 텐데

우리는 깔깔 웃을 텐데 별일 아니라는 듯

불쑥 왔따 불쑥 갈 텐데 술래도 모르게 나는, 멀리 저 멀

리 갈 수 있을 텐데

- <불쑥> 전문, p142

 

한사람의닫힌문, 박소란, 리뷰, 모르는사이, 불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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