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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ㅣ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평점 :
개인적으로 간서치라고 불리우는 이덕무 선생을 좋아 한다. 다른 책에서 이덕무 선생을 접했을 때에는 일부분의 일화만 소개되어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그가 주연이 되고 그의 친구들의 조연이 되어 있는 책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가웠다. 看書痴 – 볼간, 책서, 어리석을 치, 어쩌다 이렇게 좋은 별명을 얻게 되었을까? 이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돈을 주고 스승을 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독학으로 공부를 하면서 잘 모르는 내용이 있거든 밥도 먹지 않고 하루종에 방에 처막혀 있다가 마침내 그 뜻을 알아 냈을 때 좋아서 그 방에서 뛰고 소리 지르고 난리를 치는 모습을 보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간서치라는 별명을 지어 줬다고 한다. 어쩌면 오직 그에게만 어울리는 별명이 아닌가 싶다. 그의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이 서얼 출신들이다. 그 시대의 서얼출신들은 양반도 아니고 중인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이었다. 그래서 과거를 볼 수도 없었고 장사를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들의 생활은 궁핍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책보는 일 이외에는 할 것이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에서 소개되는 그의 친구들을 나이 순으로 나열해 보자
홍대용(1731~1783)은 이덕무보다 10살이 많고 정상적인 양반출인이며 성리학 보다는 실학을 중시 하였고 특히 천문학에 조예가 깊었고 과학기술분야에 관심이 많았으며 실력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천거하여 그 능력을 널리 펼치길 바란 사람이다. 겉으로 보이기엔 묵자의 사상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박지원(1737~1805)은 이덕무 보다 4살이 많다. 이덕무는 스스럼없이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들과 친구를 맺었는데 박지원에게는 깎듯하게 스승으로 모셨다. 호는 연암이고 위의 홍대용과 친하게 지내며 서양의 신학문에 접했으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독서에만 전념하다가 중후년에 미관말직이라고 할 수 있는 벼슬을 한적이 있다. 하나 그는 북학파의 영수로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양반계층의 타락상을 고발하는 양반전, 호질, 열하일기, 연암집을 비롯한 수많은 저서들을 남겼으며 정경대부로 추증이 되었다. 여기서 정경대부란 정치와 경제의 큰 스승이란 뜻으로 사후에 내려진 벼슬이다.
백동수(1743~1816)는 이덕무의 2살 아래로 친구이며 그의 손아래 처남이다. 이 또한 서얼 출신이며 숙종때 검선이라 불리우는 김체건의 아들 김광택에게 조선검법을 전수 받는등 무예가 출중하여 당당히 무과에 합격하였지만 관직이 모자란 탓에 벼슬을 얻지 못했으나, 중후반에 장용영 초관에 임명되는 행운을 얻어 이덕무, 박제가 등과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으며 그는 실기를 담당하게 된다.
유득공(1749~1807)은 이덕무 보다 8살 아래로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출신이라 신분이 역시 자유롭지 못했으나 정조때 규장각 검서관으로 출발하여 마침내 신분이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중국 사절단을 따라 심양에 가게 되었는데 거기서 발해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것이‘발해고’이다. 발해는 고구려 땅이며 발해가 고구려을 계승한 나라임으로 발해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하는게 타당하다고 역설하였다.
박제가(1750~1805)는 이덕무 보다 9살 아래이나 이 책에서 나오는 백탑아래서 위의 인물들과 실학에 대해 연구 하였으며 이 또한 규장각 검서관으로 편입되어 신분이 자유로워 졌다. 1778년에는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가서 새 문물을 접하고 나라가 부강하기 위해선 반드시 청나라의 문물을 도입해서 생산기술과 도구를 개선하고 상업을 장려하여 대외무역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의 저서로는‘북학의’로 청의 선진문물들을 소개하고 있다.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는데 내편은 수레와 배, 성벽, 궁실, 도로, 교량, 목축, 고시, 상업과 시장등 39항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한 개혁론을 제시하였고 외편은 논밭과 거름, 뽕나무, 농업과 잠업, 관리의 월급등 17항목으로 농업기술의 개량과 외국무역의 이점을 설파하였다.
마지막 인물로 이서구(1754~1824)는 이덕무보다 무려 13살 아래이며 이는 서얼출신이 아닌 명문가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연암 박지원 선생 슬하에서 수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유득공, 이덕무등과 어울리게 되었다. 아마도 나중에는 그리 친하게 지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조선시대의 사회가 신분제가 엄격하게 제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사간을 거쳐 이조판서. 대사헌. 우의정까지 지냈으며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과 함께 한시의 4대가로 알려져있으며 특히 오언고시에 능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면서 느낀 것인데 이덕무를 좋아하는 독자들이 이렇게 많은지 새삼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