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사는 동안에 부에나도 지꺼져도
오설자 지음 / 푸른향기 / 2021년 12월
평점 :
제주도에 관한 여행 에세이는 많이 읽어봤지만, 제주어 에세이는 처음 읽어보게 되었다.
같은 나라인데도 이렇게 다른 언어와 글자를 쓰는게 놀랍기도 했고, 뭔가 더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설자 작가가 겪은 세월의 흔적들, 가족, 제주도, 일상의 이야기들이 너무나 섬세하게 표현이 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일러두기를 미리 살펴보면 제주어를 파악하기 쉽게 설명이 되어 있다.
책에 많이 나오는 제주어를 읽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다.
여름을 표현하는 단어들과 일상 이야기들이 따뜻하고 재밌었다.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풍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마치 아이들이 뛰어놀것만 같이 생생하게 표현 되어 있어서 좋았다.
24p. 이빨 자국 내며 수왁수왁 수박을 잘라먹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놀다 보면 입으로 들어온 바당물을 왈칵 삼키키도 했습니다 .
하루 종일 놀다가 집으로 올 때, 수박만큼 발갛게 익은 얼굴에 노을이 물들었습니다.
오설자 작가가 주로 많이 쓰는 단어들과 좋아하는 풍경들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나도 그 풍경에 함께 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여름을 만질 수 있다, 수박만큼 발갛게 익은 얼굴에 노을이 물들었다는 표현은 대체 어떻게 나왔을까,
촉각, 시각, 후각, 미각이 다 느껴지는 문장들이었다. 수박이 이렇게 예쁜 과일이었나 싶었다.
너무나 적절했고 눈치껏 여름이 빨리 다가와서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다.
나는 여름하면 무덥기만 하고 땀과 힘든 나날들만 연상이 되었는데,
유독 이 책에 표현되었던 여름에 관한 문장들은 새롭게 다가왔다.
여름이 이렇게 아름답고 순수하게 표현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며 글의 힘에 또 한번 놀랐다.
30p.종아리에 하얗게 드러났던 흉터도 희미해지고 새 살이 돋는 것처럼,
어떤 것들은 잊히고 그 자리에 새로운 이야기들이 돋아납니다.
이 여름 힘들지만 지나고 나면 또 그리운 추억이 될 것입니다.
늦가을 햇살이 따가울 때 구수한 냄새가 퍼지는 메주를 담는 과 정도 좋았다. 이제는 메주를 담는 모습을 찾아볼수가 없어서 더 정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정성스럽게 부엌에서 콩을 퍼서 으깨고 보리와 섞으며 메주까지 담는 과정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까?
그런 고된 과정들을 굳이 감내하고, 정성스럽게 재료들을 준비하는 그들을 보면서 깨달았다.
뭘 많이 넣지도 않고, 좋은 재료들을 툭 넣고 몇번 휘적휘적 하면 맛있는 음식이 쉽게 탄생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속에는 누구보다 정성스럽게 원재료를 준비한 그들의 고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리 조미료과 각종 좋은 재료들로 치장하려고 해도, 원재료의 알맹이가 좋지 않다면 음식은 제대로 완성이 될 수 없을 것이다.
55p. 냄새는 그리움을 불러옵니다.
감각의 책꽂이에 갈피갈피 꽂혀있다가
바깥의 자극으로 어느 순간 깨어나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
엄마가 하는 말씀은 어느집에나 왜 다 똑같을까?
따라다니면서 나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귀신 같이 알아채고 또 챙겨주시는 어머니의 시선이 느껴지는 글들, 또 오설자 작가가 어머니와 어머님께 느껴지는 따뜻한 정서가 참 좋았다.
혹여나 어른들에게 예의 없게 보일까봐 단단히 일러두는 엄마가 늘 하던 말씀의 문장들이 너무 와닿았다.
평소에 듣던 엄마의 잔소리가, 글에 애정이 듬뿍 묻어나 있어서 계속 보게 되었다.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은 걸까?
자식이 잘 되었으면 좋겠고, 어른들에게 예의바르고 사이좋게 사람들과 잘 지내고 결혼 잘하고 시간의 흐름대로 쓰여져 있는 글들이 마치 세월의 한 장면처럼 스윽 지나갔다.
38p.부모 마음은 딱 한 가지야. 자식들 잘 되는 거 그거 하나야.

제주어로 쓰인 부분과 똑같이 해석하여 뒷장에 담겨져 있었다. 제주어를 먼저 읽으면서 나름 스스로 해석하고 어떤 단어인지 궁금해하다가, 뒷장에 해석된 글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어떻게 같은 한국 사람인데 이렇게 다른 언어를 써왔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제주어에 대한 어원에 대해 더 궁금해졌고, 제주어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잘 보존되어서 이 책처럼 더 많은 쓰임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이 결혼 하고자 하는 남자친구를 데려와 물었을때의 대답이 어떠한 대답보다 심플하지만 믿음이 느껴졌다.
지키지도 못한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갖다 붙여서 딸을 거창하게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다짐보다, '웃게 해주겠다'는 말 한마디가 정말 진실해보였다.
73p. 그가 그들로 하여금 웃게 했으니 말이다. 웃게 한다는 것은 잊게 한다는 것이다. 망각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이 지상에서 얼마나 고마운 사람인가.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제주도만의 풍경들
한국에서 특히 태풍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섬, 제주도에서는 태풍이 지나가도 남달랐다.
작가가 국민학교 다닐때, 태풍이 지나가고 학교 지붕이 날라갔다는 에피소드가 너무나 영화 같기도 하고 믿겨지지 않았다.
제주도 태풍의 위력은 대체 얼마나 세길래, 학교 지붕이 날라갈 정도인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교실에, 찢겨진 그림들을 보면서 어렸을 때지만 절절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수업은 받아야했기에 마을회관에 임시로 교실을 만들고 다녔던 이야기는 제주도에서만 느껴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비료의 냄새들, 죽은 사체들까지 정말 아수라장이었겠지만 그때가 아니면 절대 느껴보지 못했을 추억이었을 것이다.
할망네 국수에서 따뜻한 국수 한그릇, 나도 먹어보고 싶었다.
글을 읽는 내내 군침이 돌았다.
112p. 듬박듬박 썬 고기를 얹고 페마농과 꽤를 뿌리고 ,
젓가락에 국수 몇 가락을 돌돌 감아 입에 넣고 남삐김치를 한입 베어 물었더니,
음?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듬삭하고, 베지근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졌습니다.
할망네 국수 간판 이름부터 정겨웠다.
작가가 표현한 국수의 맛은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푸짐하고,
한번 오면 절대 발길을 끊을 수 없는 할머니의 정성과 정이 듬뿍 담겨져 있을 것 같았다.
제주도에 가면 수소문해서라도 찾아가고 싶었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안타까웠다.
할머니에게는 그저 국수 한 그릇이 아닌 인생이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평생을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마음이 할머니의 국수의 비법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본다.
책을 읽은 뒤 한 문장의 마음
행복이 무엇인지,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남이 결정해주는 행복이 아닌, 나다운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이 너무 공감이 갔다.
외로운 사람들에게 정말 사소한 한마디가 커다란 위로가 될 것이라는 말까지 내 안에 커다랗게 번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행복이 무엇일지 곰곰히 생각해보았을때, 온전한 행복보다는 항상 물욕적이고 현실적인 것들만 생각을 해왔다.
지금 이렇게 책을 읽고 글을 나누는 것도 행복이고, 가족들이 건강하고 내가 두 다리로 씩씩하게 잘 걸어다니는 일상적인 것들도 모두가 감사하고 행복한 일들일 것이다. 좀 더 궁극적으로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다.
145p. 우리에게도 그렇게 수많은 밤이 흘러갈 것입니다.
누군가 혼자 밤을 견뎌내야만 하는 날들이 오지 않기를.
단물 다 빨아머겅 쭈글쭈글헌 볼레쭈시 같아도
발로 밝아버린 냅작한 마른 쇠똥 같아도 곁에 있기를,
우리의 영혼이 혼자 떠도는 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밤이었습니다.
책에 많이 나오는 제주어들을 보면서 제주도에 제대로 다시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현지인들이 쓰는 제주어도 들어보고 싶었고, 그 지역의 현지인들의 사는 모습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고
사계절을 맛깔나게 표현했던 음식들과 오감만족하며 느꼈던 계절의 변화도 온전히 느껴보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따뜻한 글 솜씨가 가장 부러웠다.
세월이 만들어주는 것인지 훈련으로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일상적인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묘사하고 어느새 독자의 마음을 툭 건드리는 표현들을 너무 배우고 싶었다.
그리고 작가가 추구했던 제주어가 재미있게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목표는 이 책을 통해 이루어진 것 같다.
제주도를 좀 더 특별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제주어를 재미있게 배워보고 싶다면 제주어 에세이 이 책을 꼭 추천하고 싶다.
책 제목처럼,
우리 사는 동안에 화가 나도 기뻐도
우리의 행복을 찾아서 잘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