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자의 세계 - 인체의 지식을 향한 위대한 5000년 여정
콜린 솔터 지음, 조은영 옮김 / 해나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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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5 저자: 콜린 솔터.

이십 대에 초심자를 위한 해부학이라는 외국 영상물 시리즈를 다 본 적이 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텔레비전 방영분인지 방청객이 해부대를 둘러싸고 앉아 있고, 선생님이 가공 처리 된 시신 일부를 소화계, 근골격계, 순환계, 생식계 이런 식으로 한 편씩 파헤쳤다. 그냥 그런 영상을 봤다는 기억만 남고 그때의 기분이나 정보들은 다 잊어버렸다. 직접 해부를 해보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몸 속 세계에 대한 궁금함은 여전한건지 해부 들어간 책을 소설이나 만화책과 운동책, 논픽션을 포함해 여러 권 사 놓았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작은어린이는 몸 속을 보여주는 그림을 아주 싫어해서, 인체에 대한 어린이 책과 모형을 전부 안 보이는 곳에 치워두었다. 언젠가는 막연한 두려움이 사라지면 좋겠다.

원제는 해부학자의 도서관, 해부학자의 서재 쯤 된다. 이 제목이 책 내용과 관련해서 조금 더 솔직하다. 저자는 다양한 시대의 해부학자들이 저술한 백여 권의 책들을 소개한다. 학자들에 대해 알려진 내용이나, 의학에 기여한 발견, 한계까지 간략하게 짚어준다. 해부학 내용 그 자체를 다뤘다기 보다 해부학의 역사책이다.

사람이 아픈 이유를 알고 낫게 하려면, 몸의 구조와 기능을 아는 것도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그러려면 해체해서 부분을 자세히 관찰하고 부분 간의 연결을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해부학의 역사는 기원전 3천년 파피루스에 관련 기록이 남을 만큼 길고 오래 되었다고 한다. 어느 시절에는 해부가 허용되어 죽은 또는 산 채로 사람 몸을 갈라 학자가 궁금한 바를 발견할 수 있었고, 덕분에 후대 학자들은 더 나은 발견을 하거나 사람들을 치료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제법 긴 기간 동안 해부는 금지되어 학자들은 오래 전 책과 낡은 지식을 참고하고, 일부는 몰래 해부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영상으로 봤던 방청객이 있는 해부학 실습은 꽤 오래 전부터(적어도 500년 전) 있던 일이었다. 해부 극장이라는 게 있어서 학자들이 해부 시범과 인체 부분들을 보이면 빙 둘러앉은 사람들이 보는 식이었다. 이 책에는 그렇게 수많은 사람에 둘러 싸인 해부 실습 장면을 그린 그림이 여러 가지 나왔다. 물론 상세하게 인체 세부를 시각화한 그림이 더 많이 수록되어 있다.

르네상스 하면 인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고대 그리스의 학문을 재발굴하고 예술 분야가 발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왔는데, 인간을 탐구하는 분야 중에 해부학이 빠질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유명한 예술가인 레오나르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정교한 작품들이 해부학을 기반으로 했다는 것이 이 책에도 소개되었다. 특히 이 책 중반부에서는 이탈리아 지역의 해부학책을 지은 학자들을 많이 소개했다. 너무 많아서 이름들을 다 못 따라갈 지경이었다.
전에 달갑지 않게 읽은 소설 ‘해부학자’의 주인물인 콜롬보(음핵 발견자)가 여기서도 등장했다. 콜롬보와 그의 제자 발베르데와 대립하는 베살리우스가 낸 책은 엄청 성공해서 그의 책의 해부도를 대놓고 베끼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표절한 책이 넘칠 만큼 사람들의 인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해부학책이 돈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게 베살리우스에게는 열받는 일이지만 덕분에 그의 책 오류도 수정되고 조금 더 새로운 발견이 덧붙여지기도 했으니 미래 사람에겐 도움이 되지만 이렇게 말하면 나중에 지옥에서 베살리우스가 나를 해부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이후로도 수많은 훌륭한 해부학 서적이 등장하고, 삽화 표절이나 번역서를 자기가 지은 척 하는 일이 계속 이어진다.

해부학이 발달하고 공식화되어 실습이 많이 실시될수록 시신 수요가 늘어나서 별일이 다 있었다. 영국 정부가 살인범은 공개 해부한다, 했더니 살인 범죄가 줄어들어 시신 공급이 모자랐고, ‘빈민, 정신질환자, 죄수의 시체까지’ 해부용으로 허락하는 유럽 국가들이 생겼다. 시신은 시장 거래 대상이 되어 묘지 도굴, 시신을 만들려는 살해까지 일어났다.

주로 이탈리아, 영국, 독일, 네덜란드, 프랑스 등 유럽의 해부학 서적을 소개하지만, 일본은 18세기에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비교적 이르게 유럽의 해부학을 도입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의 해부학 고서적 또한 많이 남아 있었고 이 책에 소개되었다. 수술 전 마취를 하는 시도가 일본에서 유럽보다 40년 가까이 먼저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다 .

빌 헤이스의 ‘해부학자’에서 알게 된 두 헨리-그레이와 카터-가 ‘그레이 해부학’의 공저자라는 것, 그걸 그레이가 다 숨기고 이익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도 언급했다.

어려서 본 적 있는 ‘인체의 신비전’을 가능하게 한 플라스티네이션 기술을 개발한 군터 폰 하겐스도 빠지지 않았다. 그가 2002년 극장에서 공개 해부를 실시하는 것을 영국 채널4에서 방영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내가 본 영상의 모자 쓴 해부학자가 이 선생님이 맞는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은 책에서 소개하는 오래된 책의 삽화 일부를 전부는 아니지만 꽤 많이 실어 놓은 것이었다. 그래서 칼라 페이지가 많고, 주석 포함 400여쪽의 페이지에 겁먹었던 것에 비해 잘 읽혔다. 걸렸던 점도 있다. 독자의 주의를 끌려는 건지 해부학자와 관련된 일화나 해부 대상이 된 시신 중 신분이 밝혀진 극소수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렇게 흥밋거리처럼 넣어도 되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내내 진지했으면 내가 읽는데 버거웠겠지, 하고 말았다.

해부학의 역사나 해부학 도감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 해부학이 뭔지 왜 해부를 하는지 잘 모르겠는 사람, 본격적으로 해부학이나 미술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경우엔 머리 식히기용)은 재미있게 볼 만한 책이었다. 나는 어쩌다보니 샀으니까 집에 있어서 읽었다...라고 하기엔 인체에 관한 책을 열심히 보고 있구만…나는 인간이 정말 궁금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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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조각가, 건축가, 금세공인, 자수업자, 목수를 비롯해 회화 및 조각 예술을 사랑하는 모든 이에게 유용하고 필요한 책’이다. 요약하면 예술가를 위한 예술가의 책이라는 뜻이다. (201, 주앙 쿠쟁이 쓴 학습서 ‘초상화 기법’(1595)의 타겟 독자. 의학 외의 분야에도 해부학은 많은 영향을 주었다.)

-파리에서 해부학을 배우면서 그(윌리엄 헌터, 해부학자)는 젊은 외과의들이 죽은 자로 먼저 실습하면 산 자를 덜 죽일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270-271, 외과의 해부학 실습이 의무화 된 게 18세기에 와서야라니…)

-‘삶과 죽음에 관한 생리학적 연구’에서 그(그자비에 비샤)는 생명을 해부학적 측면에서 정의했다. 그는 생명이란 “죽음에 반항하는 기능의 완전체”라고 했다. 이어서 “사방에서 자기를 파괴하려 달려드는 상황에서 살아 있는 몸이 존재하는 방식이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비위생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프랑스 혁명을 겪으며 얻은 통찰일 것이다. (316-317, 생명에 대한 관점이 독특했다.)

-(영국) 해부학법의 예기치 않은 결과는 망자의 주검에 대한 굴욕스럽고 경멸적인 공개 해부를 가난한 사람들의 몫으로 만든 데 있었다. 해부는 더 이상 범죄에 대한 형벌이 아닌 가난한 죄에 대한 형벌이 되었다. (326, 시신 거래의 합법화는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 빈곤한 사람의 시신을 거래되게 만들었다.)

-(…)시신은 임신 막달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엾은 젊은 여성이었다. 브라우네(냉동 사체 단면 전문가)는 1870년에 이 시신을 받아서 얼린 후 엄마와 아기를 위에서부터 아래로 절반으로 자른 다음, 태아의 두 반쪽을 다시 합쳤다. (358, 있던 일을 서술한 건데도 왜일까 시시콜콜 늘어 놓는게 좀 거부감이 드는 지점들이 종종 있었다.)

-해부학의 역사에서 자주 간과되는 것은 해부학자의 실험실이 되었던 몸과 그 영혼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해부학의 발전은 한없이 더뎠을 것이다. 이들은 살아 숨 쉬던 진짜 사람이었다.(…)

당신이 이름 모를 시신 위에 허리를 숙이고 딱딱한 메스의 칼날을 들이댈 때, 그 몸은 두 영혼의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기억하라. 그는 그를 가슴으로부터 아끼고 보호한 사람의 믿음과 희망으로 키워졌다. 어린이였을 때, 젊은이였을 때, 그는 당신과 같은 꿈을 꾸며 미소 지었다. 그는 사랑했고 사랑받았으며, 행복한 내일을 희망하고 소중히 여겼고, 먼저 떠난 이들을 그리워했다. 이제 그는 이 차가운 슬레이트 위에 그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이 하나 없고, 기도해줄 이 하나 없이 누워 있다. 그의 이름은 신만이 아실 것이다. 그러나 거침없는 운명이 그에게 인류에게 봉사할 힘과 위대함을 주었음을 기억하라. (’병리해부학 편람‘ 저자 카를 폰 로키탄스키가 1876년에 쓴 글 인용)
(361, 직전의 내 기분을 의식한 건 아니겠지만 곧이어 해부학의 윤리적 측면을 다룬다. )

-그의 네 권짜리 걸작에 실린 훌륭한 이미지는 나치 체제에서 사형당한 사람들의 몸이었다. 당시 나치는 동성애자, 집시, 반체제 인사, 유대인을 학살하여 인종 순수성을 추구했다.
(371, 나치 지지자 에두아르트 페른코프의 ’인체의 국소 해부학‘은 1937년 출간, 가장 훌륭한 삽화가 수록되었지만 윤리적 문제로 사용이 꺼려지고 있다고 한다.)

+표지는 친근감(?)들라고 꽃도 끼워 놓고 애썼다.

+’잔혹함의 보상’(윌리엄 호가스, 1751년)의 마지막 도판은 ‘의학집성’(케탐, 1491년)의 구체적인 묘사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변의 뼈솥이나 내장 노리는 개 무서워...

+‘인체 구성의 역사(발베르데, 1556년)‘의 근육남. 인체의 신비전에서도 이 모습을 비슷하게 재현해 놨었다.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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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4 저자:테네시 윌리엄스.

독후감을 세 번 썼다가 지웠다. 아우 다 마음에 안 들어. 또 지우면 안 되니까 그냥 냅두자…읽었다고 다 써야 하는 건 아닌데 이것도 강박인 것 같다.
제목과 작품 안의 욕망, 이라는 말 때문에 욕망이라는 말에 집중하게 되지만, 잘 모르겠다. 욕망이 무얼까. 먹고 싶고 하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원하는 걸 얻고 싶고 그런 건 거의 모든 인간의 일 아닌가. 나의, 너의 바람.

블랑시가 사치와 허영이 심하고, 교사이면서 미성년자와 관계 맺는 일을 저지르고, 미치와 결혼해 보려고 점잖은 척 하긴 했다. 그렇지만 미치가 블랑시를 강간하려고 시도하거나, 스탠리가 자기 부인이 아기 낳으러 간 사이 블랑시를 강간하는 건 그놈들의 잘못이다. 열여섯에 결혼한 남자가 알고보니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가 권총으로 자살한 것도 그녀가 생각하지 못한 불운이다. 운없고 허영기 좀 있고 남자로 팔자 고쳐보려다가 수틀린 여자. 그 여자의 허약함을 놓치지 않는 포식자 같은 남자들이 블랑시를 괴롭히고 비난하고 던져버렸다.
의지가지 없고 돈도 없어 동생한테 기대러 왔는데 험한 꼴만 보고 어딜 가도 쫓겨나는 신세이다. 받아줄 곳이 정신병원 밖에 없다는 건 슬프다.

인생은 기니까 오늘날 같으면 블랑시가 재활을 해서 사회로 돌아오는 일이 있을까? 언젠가 그녀를 품어줄 사람을 만날까? 작품이 나온 1940년대에는 그럴 가능성은 지금보다 훨씬 희박했을 것이다. 그렇게 옛날 이야기 속 여자들은 미치거나 죽는다. 동생 스텔라나 2층집 유니스처럼 남편한테 맞으면서도, 그래도 이 삶을 떠날 생각 없어, 떠나도 방법이 없어, 하는 불운한 세계이다.

이렇게 한 여자가 지독하게 사회관계망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다고 하기도 그렇고 감동적이라기도 그렇고 그냥 찝찝하고 서글펐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 걸 많은 이야기들이 되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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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거, 돈이 많이 들어요, 스텔라 아가씨!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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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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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3 저자: 에드나 오브라이언.



아이들이 집 바깥에 있으면 불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개는 아이들이 해를 입거나 사라지는 상황이다. 그러면 내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친다. 생각 꺼져. 근거 없고 확률 매우 낮은 불안일 뿐이다.

아직 8월이다. 날짜를 잃어버리지도 않는데, 25년 전 이 날, 만16살 꼬맹이였을 때, 겁도 없이 모르는 사람을 만나겠다고 버스와 지하철을 거쳐 아주 먼 신도시에 갔다 왔다. 결국 아무 일 없었지만,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모욕감이 들었고 많이 울었고 두려웠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 대다수가 안도하는 표현을 하지만, 아직 8월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휴가는 끝났다. 나도 그 끄트머리이다. 여행도 모험도 없었고, 방과후학교에 가는 아이를 바래다 주고 데려오고, 3주 간 치과 치료를 받고(아직 한 번 남았다), 극소수의 친구들을 만나고, 책 11권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듀오링고로 아랍어를 따라했다. 알 하야 사으바 아다. اَلْحَياة صَعْبة عادةً 그렇지만 평온한 나날이었다.

꽂힌 책 중 가장 얇으니까 펼쳤다. 재미있게 읽었다. 단지 아이를 죽여버린 작가가 미웠다. 굳이 이런 감정을 끌어내려고 갑자기? 개연성 문제가 아닌 기분 문제였다. 22일 간 내내 머물던 나 대신 20일 넘게 떠난 엘런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일곱 살 아이는 전남편과 함께 웨일즈로 여행을 떠났다. 아일랜드의 엘런은 당일 갑자기 휴 라는 남자와 즐거운 밤을 보낸다. 각성한 것처럼 비행기표를 끊어 프랑스(아마도 남부) 해변으로 간다. 마주치는 남자들마다 어떤 가능성으로 보인다. 멋진 배우 바비를 우연히 만나 그와 가까워지길 원하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그를 찾는다. 그전과 그 사이에 원하지 않는 접촉을 시도하는 남자 셋을 떨어낸다. 문득 생각난 전남편에게 연락했고, 아이가 여행 중 우유를 가지러 가다가 차에 치여 죽었고, 부서졌고, 이미 묻었다는 걸 알게 된다. 파티 피플들이 위로하고 호들갑을 떨고, 그렇게나 바라던 바비는 엘런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데려다니고, 뭔가를 사 주고, 엘런은 행복감을 느낀다, 바비에게 성병이 옮고 바비가 도망가기 전까지 아주 잠깐. 병과 무자비한 숙박비에 짓눌려 엘런은 집으로 돌아온다. 허무를 느낀다. 다시 휴란 남자가 접근해 오지만 밀어낸다. 다행히 병은 심각하지 않아 마음이 가볍다.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홀로 멀리 갔는데, 아이는 죽고 자신은 병에 걸렸다. 휴가 여행 한 번 간 대가 치고는 가혹하다.

휴가지에서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는 소설은 주로 프랑스 작가, 특히 뒤라스 걸 두 권 읽었다. 정말 재미없었고 괜한 계층 차이를 느꼈다. 이번 소설은 그보다는 청량했고, 너무 코미디로 가지도 않았고, 이상한 구석 없는 한 사람이 겪는 시련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아이가 죽은 설정 말고는 뭐 다 괜찮았다.

농구 수업을 마치고, 아이가 나온다. 물을 가져왔나요? 해서 바닥에 몇 모금 남은 탄산수병 가져온 것을 건넨다. 병을 돌려받고는 휴대용 선풍기를 들려준다. 양산을 펼치고 아이와 내 그림자가 양산 그림자에 가려지도록 신경 쓰면서 뙤약볕을 걷는다. 평온한 오전이다. 그러고나서 이 책을 마저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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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리에 서서 엘런은 남자를 갈망하며, 그가 저지른 가장 사악한 짓이란 엘런이 죽은 듯 살자고 체념했을 때 그런 식으로 다가와서 거짓된 희망을 건네고 하룻밤 동안 새 삶을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37, 줬다 뺏는게 제일 나빠…)

-노란색 꽃은 무거운 꽃가루 때문에 지친 듯 축 처진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땡볕 속에서 힘없이 늘어진 모습이었다. 바비가 부드럽게 꽃송이를 따더니 다른 꽃송이에 정면으로 가져다 대고 살포시 포갰다.
“깨끗한 짝짓기.” 바비가 말했다.
“정말 꼴사나운데.” 그 광경을 완전히 몰입해서 지켜보던 데니스가 말했다. “쟤네 느낄 줄 알아?” (155, 눈앞에 그려보면 진짜 웃긴 장면이다.)

-바비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난은 향수와 마찬가지로 엘런이 폐기한 감각이었다. 이런 낱말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비하면 미미할 뿐이었다. 해변에서 보낸 날들은 빛바랜 꿈이었고, 오직 질병만이, 엘런 주변의 대기와 도로의 돌, 지나가는 자동차만이 실재했다. (227, 아프면 다 소용없어.)

-과거에 자신이 광증에 사로잡혀 인생을 망쳐 버릴까 봐 걱정했다는 것, 외딴 호수에 몸을 던진 두 여자처럼 미쳐버릴까 봐 걱정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우스웠다. 하지만 이 병은 광기보다 동정받기 힘들었다. 전염되는 병이었고, 용서받을 수 없었다. (229, 남자들도 이따금 자기가 미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할까. 내가 다니는 의원의 대기실에는 압도적으로 여성들이 많다. 그래서 아마도 바깥 세상에 치료 없이, 자기가 미친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미친놈이 미친년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성병에 걸리는 걸 더 염려할 것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 깊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필요하다면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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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원의 인류학 - 몸-마음-자연을 연결하는 사유와 치유
김태우 지음 / 돌베개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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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2


20여년 전, 최고 단계의 스테로이드 연고를 그런 줄도 모르고 남용하다가 아토피성 피부염이 심해졌다. 연고는 듣지 않게 되었고, 염증이 온몸으로 퍼지고, 감염된 부위도 있었다. 가려움, 긁으면 안 되는데 잠든 채 벅벅 긁다 놀라 깨면 엉망이 되어 버린 상처, 삶을 놓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그전까지도 나를 낫게 하겠다고 피부과, 나병 환자 의원, 1년 안에 치료하겠다고 정체 불명의 조제약을 지어주는 약사, 온갖 민간요법까지 안 해본 것,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이제 막 만20살이 된 나는 상처와 진물에 달라붙는 바지통을 떼어가며 겨우 걸어다녔다. 한여름에도 긴팔 긴바지로 염증을 가리고, 축제 무대에서 노래할 때는 챙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마지막 시도로 아토피성 피부염과 건선을 전문으로 한다는 한의원에 갔다. 침대에 누워 침을 맞았던 거 같은데 별로 안 아팠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탕약값이 매우 비싸서 난감해하자, 저렴한 환약을 선택지로 줬고, 병변에 소독솜으로 찍어바르라는 약도 줬다. 알갱이들을 먹고 한약냄새 나는 묽은 액체를 염증 여기저기에 발랐다. 수돗물이 나쁘다 해서 내가 사는 원룸에 부모가 연수기까지 달아주었다.

여전히 가려웠고 방법이 없다, 싶어서 몇 달 다니다가 결국 비싼 치료비가 부담스러워 그만두었다. 다행히 피부염으로 죽지는 않고 아주아주 오랜 시간 거쳐 모든 염증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일부만 작게 고질로 남은 채 대부분의 손상된 염증 부위에 새살이 돋았다.

10년 단위로 돌아오는지, 10년 전에는 몸과 얼굴까지 염증으로 뒤집어졌다. 어린이집에서 만난 할머니가 EM용액이 좋다고 써보라고 해서 비료나 할 것을 발랐다가 감염만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피부과를 찾았다. 스테로이드제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의사는 본인과 자신의 자녀도 비염이 있다며 심해지고 필요하면 약을 쓴다고,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먹는 약도 연고도 가장 순한 종류로 처방할 것이고, 그러고나면 스테로이드의 대안으로 프로토픽 같은 연고도 나중에 처방해주겠다고 달랬다. 00대병원에 가면 달맞이꽃 종자유를 처방하는 선생님도 계시다고 나중에 필요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더디긴 했지만 낫긴 나았다. 스테로이드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배웠고 특정 성분에 대한 공포도 사그러들었다. 그러고나서 10년이 또 흘렀는데, 지금은 허우대 멀쩡하지만 방심할 순 없다…

그렇게 마지막 한의원 치료를 20여년 전 경험한 이후, 나는 한의원에 가지 않는다. 발목을 다쳤을 때도 한의원에 가보라는 이웃이 많았는데 안 갔다. 나중에 여러 병원을 전전해 겨우 인대 파열과 심부정맥혈전증, 폐색전증으로 진단받은 이 병을 한의원에만 맡기고 병원에 안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알고 싶지 않다.

서양 의학과 한의원을 대비시켜 설명하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의학은 진료 과목이 무엇인지에 따라 선생님들의 시선이든 환자와의 접촉이든 다 달라진다. 주로 내과 진료실 풍경이 예시가 되는데, 그걸 의학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일반화하며 한의학을 설명하는 건, 뭔가 한의학과 짝이 맞도록 짜맞추는 느낌이 들었다.

사상의학이나 동양철학, 거기에 푸코와 현상학, 언어학, 존재론 같은게 튀어나와서 동양의학의 존재 가치를 열심히 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잘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일까 정말 그렇겠구나, 하는 부분이 없었다.

이 책을 갖추고 읽은 건 내가 한의학을 너무 몰라서, 알면 이해하고 마음이 열릴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시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새끼 생각보다 철벽이었다.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아진 사람들은 진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 선택을 존중한다. 아프면 뭐라도 하고 싶은 사람 마음이라 가장 나아질 수 있는 방향이 그곳이라면 가는 게 맞겠다. 그냥 나만 안 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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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산다. 우리가 세계를 아는 방식은 곧잘 말 속에 체화되어 있다. 말 속에 이미 어떤 관점의 틀이 자리 잡고 있을 때, 그 말을 사용하면서 다른 틀로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의 변화는 사고의 변화를 수반한다. (73-74, 예전에 말/글을 바꾸면 내가 달라질까? 하고 ‘언어의 밝은 집’이란 사고실험 같은 걸 잠깐 했는데 금세 집어치웠다.)

-고흐는 그가 바라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구도, 색감, 붓터치 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구성해 그림 속에서 실현한다. 마찬가지로, 맥에 대한 동아시아의서의 표현은 기혈의 흐름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며, 묘사적 서술 역시 흐름이 있는 생명의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주의와 후기인상주의의 차이를 서양의학과 동아시아의학의 차이로도 읽을 수 있다. (93, 여기서 어떻게 ‘마찬가지로’가 나올 수 있는지 전후를 살펴도 납득을 못했다. 시점은 참신하지만 거참…한의학은 후기인상주의 미술과 특성을 공유한다는 말.)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학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비판은 맥락을 다 잘라버린 선언일 뿐이다. 대상의 특정과 지시를 강조하지 않는 동아시아의학의 방향성을 고려하지 않는 단정적인 언사다. 여기에는 또한 모든 의학이 대상을 강조하여 객체화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심하게 말하면, 그런 선언들은 폭력적이다. 후기인상주의 그림을 보고 사실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105-106, 발췌를 삼가야겠다 싶은게, 특정 부분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면 책 전체의 흐름과 맥락을 보라고 혼날 거 같은 느낌이다. 누가 그랬어 객관적이지 않다는 비판 누가 언제 어디서 했어, 혼 좀 나자, 하는 기분)

-세계에 대한 앎의 방식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객관 아닌 앎을 이해해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106,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브로콜리너마저의 ‘커뮤니케이션의 이해’가 듣고 싶어져서 들었다.)

-아날로지즘은 존재들의 기저를 흐르는 이치에 주목한다. 그 이치가 근간을 이루면서, 또한 변주하면서 세계를 구성한다. 이때 아날로지는 그 근간의 이치를 이르는 말이다. 음양, 사시, 오행, 주역 괘가 동아시아 아날로지의 예시들이다. (127, 동양철학과 한의학의 연결성을 강조하는데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 연결하기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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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독서법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9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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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1 저자:김선영.

한국문학은 특이하게 출판사에서 학년이나 적정 연령을 제시하기도 하는 아동문학, 동화 시절을 거쳐, 성인(?) 문학으로 넘어가기 전 청소년문학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가끔 읽어보면 그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라 때론 오, 때론 아아… 한다. 어느 때건 아이들도 단순히 도파민 터지는 소재말고도 완성도 있는 문장과 서사를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았으면 싶었다.

큰어린이 읽으라고, 비교적 얇아서 갖춰 놨는데 읽긴 했는지 모르겠다. 제목을 보며 얇으니까, 하고 꺼내서 금세 읽었다.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좋았다. 글쓴이의 내공이 느껴진달까… 그렇다고 책날개에 적힌 다른 책들을 찾아보기엔 그러다가 실망한 적이 많아서 망설여진다.

내가 읽어봤으니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권할만한 서사와 문장이었다. 청소년 화자로 진행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떤 책을 읽을 때는 젊은이가 노인 흉내를 내거나, 어른이 아이 흉내를 내는 글을 읽다가 그게 너무 티가 난다 싶어 재미가 식을 때가 있는데, 소설집 속 소설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물론 그건 책을 읽게 될 청소년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성장의 서사가 어설피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내게도 소용이 있으면 좋겠다.

-바깥은 준비됐어
나는 쥐. 엄마는 박쥐. 인서와 달리 나는 말 없이 학교를 안 간 적이 없다. 학생 때도 선생 때도 그렇다.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여럿 보았다. 학교가 문제인 적도 있고, 집이 문제인 적도 있다. 나는 내가 문제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알약을 삼키고 꾸역꾸역 학교에 간다. 어떤 연결들 때문일 것이다. 내가 빠져나간 자리에 생길 혼란에 대한 두려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바깥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바람의 독서법
전생에 입시에 대한 큰 중압감 없이 나 자신이랑 집안 꼬라지와 싸우기만 하면 됐으니 돌이켜 보면 편하게 그 시기를 넘겼다. 그래서 진화한 입시 지옥을 직접 체험해 보려고 두 번 더 수능을 봤었나 보다… 화자에게 생긴 난독증과 반대인 이독증(?) 같은 능력, 난 정말 부럽기도 했다.

-흔들리는 난타
근육질에 애들 장악력 있는 선생이 어디선가 뿅 나타나 문제아들을 다 잡고 좀 나은 길로 인도하는 이야기가 자주 있는 건 모두의 바람이 대충 비슷하다는 뜻이겠다. 심지어 그 문제아들조차 누군가 나를 잡아주기를 바라는 걸지도. 이런 판타지를 읽으면 내 역할은 대체 뭘까 무거워진다.

-나는 잘 지내
대부분 청소년 화자이지만, 이 글에서는 모녀의 이탈리아 여행 중 엄마가 중심이 된다. 보호와 집착 사이, 그 균형은 쉽지가 않다.

-중독
공예품 수집가 엄마, 남의 손 사진 몰래 찍는 아들, 멈출 수 없는 무언가. 게임, 약물, 알코올, 스마트폰 중독 이런 건 흔하고 사랑중독마저 있는데 사실 사람은 푹 빠져 있을 만한 뭔가가 하나라도 있어야 살 기운이 나는게 아닐까.

+밑줄 긋기
-그런 건가? 나는 넓어지고 있는 건가? 나도 넓어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자라고 있는 게 맞긴 한가? (18, ‘바깥은 준비 됐어’ 중. 나도 내 성장보다는 닳아짐을 더 많이 의식했던 것 같다.)

-물빤드기:물맴이 따위의 물에 사는 곤충을 가리키는 말의 사투리로, 반들거리는 사람을 이름.(74, ‘흔들리는 난타’ 중.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는 않고 윤흥길의 소설 ‘기억 속의 들꽃’에 나오는 단어라고 함.)

-직수굿하다:저항하거나 거역하지 아니하고 하라는 대로 복종하는 데가 있다.(83)

-가붓하다:조금 가벼운 듯하다.(84, 125, 이 소설은 유독 평소 잘 안 쓰는 어휘들이 많이 나왔다. 새로운 단어들을 알게 되는 건 좋은데 문제아 여고생 화자랑은 조금 어긋나는 말들이었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물마저 빠져 버린 바닷가가 된 기분이었다. 차디찬 갯바람만 휘휘 대고, 물이 들어오지 않아 팍팍하게 갈라지는 갯벌 같았다. (102, ‘나는 잘 지내’ 중. 물 없는 바다를 본 적이 있다.)

-“사치?”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낭만 같은 거. 사는 데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게 없으면 건조해서 견딜 수 없는데,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151, ‘중독’중. 내게 그게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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