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독서법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9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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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1 저자:김선영.

한국문학은 특이하게 출판사에서 학년이나 적정 연령을 제시하기도 하는 아동문학, 동화 시절을 거쳐, 성인(?) 문학으로 넘어가기 전 청소년문학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가끔 읽어보면 그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라 때론 오, 때론 아아… 한다. 어느 때건 아이들도 단순히 도파민 터지는 소재말고도 완성도 있는 문장과 서사를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았으면 싶었다.

큰어린이 읽으라고, 비교적 얇아서 갖춰 놨는데 읽긴 했는지 모르겠다. 제목을 보며 얇으니까, 하고 꺼내서 금세 읽었다.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좋았다. 글쓴이의 내공이 느껴진달까… 그렇다고 책날개에 적힌 다른 책들을 찾아보기엔 그러다가 실망한 적이 많아서 망설여진다.

내가 읽어봤으니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권할만한 서사와 문장이었다. 청소년 화자로 진행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떤 책을 읽을 때는 젊은이가 노인 흉내를 내거나, 어른이 아이 흉내를 내는 글을 읽다가 그게 너무 티가 난다 싶어 재미가 식을 때가 있는데, 소설집 속 소설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물론 그건 책을 읽게 될 청소년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성장의 서사가 어설피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내게도 소용이 있으면 좋겠다.

-바깥은 준비됐어
나는 쥐. 엄마는 박쥐. 인서와 달리 나는 말 없이 학교를 안 간 적이 없다. 학생 때도 선생 때도 그렇다.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여럿 보았다. 학교가 문제인 적도 있고, 집이 문제인 적도 있다. 나는 내가 문제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알약을 삼키고 꾸역꾸역 학교에 간다. 어떤 연결들 때문일 것이다. 내가 빠져나간 자리에 생길 혼란에 대한 두려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바깥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바람의 독서법
전생에 입시에 대한 큰 중압감 없이 나 자신이랑 집안 꼬라지와 싸우기만 하면 됐으니 돌이켜 보면 편하게 그 시기를 넘겼다. 그래서 진화한 입시 지옥을 직접 체험해 보려고 두 번 더 수능을 봤었나 보다… 화자에게 생긴 난독증과 반대인 이독증(?) 같은 능력, 난 정말 부럽기도 했다.

-흔들리는 난타
근육질에 애들 장악력 있는 선생이 어디선가 뿅 나타나 문제아들을 다 잡고 좀 나은 길로 인도하는 이야기가 자주 있는 건 모두의 바람이 대충 비슷하다는 뜻이겠다. 심지어 그 문제아들조차 누군가 나를 잡아주기를 바라는 걸지도. 이런 판타지를 읽으면 내 역할은 대체 뭘까 무거워진다.

-나는 잘 지내
대부분 청소년 화자이지만, 이 글에서는 모녀의 이탈리아 여행 중 엄마가 중심이 된다. 보호와 집착 사이, 그 균형은 쉽지가 않다.

-중독
공예품 수집가 엄마, 남의 손 사진 몰래 찍는 아들, 멈출 수 없는 무언가. 게임, 약물, 알코올, 스마트폰 중독 이런 건 흔하고 사랑중독마저 있는데 사실 사람은 푹 빠져 있을 만한 뭔가가 하나라도 있어야 살 기운이 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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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가? 나는 넓어지고 있는 건가? 나도 넓어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자라고 있는 게 맞긴 한가? (18, ‘바깥은 준비 됐어’ 중. 나도 내 성장보다는 닳아짐을 더 많이 의식했던 것 같다.)

-물빤드기:물맴이 따위의 물에 사는 곤충을 가리키는 말의 사투리로, 반들거리는 사람을 이름.(74, ‘흔들리는 난타’ 중.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는 않고 윤흥길의 소설 ‘기억 속의 들꽃’에 나오는 단어라고 함.)

-직수굿하다:저항하거나 거역하지 아니하고 하라는 대로 복종하는 데가 있다.(83)

-가붓하다:조금 가벼운 듯하다.(84, 125, 이 소설은 유독 평소 잘 안 쓰는 어휘들이 많이 나왔다. 새로운 단어들을 알게 되는 건 좋은데 문제아 여고생 화자랑은 조금 어긋나는 말들이었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물마저 빠져 버린 바닷가가 된 기분이었다. 차디찬 갯바람만 휘휘 대고, 물이 들어오지 않아 팍팍하게 갈라지는 갯벌 같았다. (102, ‘나는 잘 지내’ 중. 물 없는 바다를 본 적이 있다.)

-“사치?”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낭만 같은 거. 사는 데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게 없으면 건조해서 견딜 수 없는데,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151, ‘중독’중. 내게 그게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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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
박상영 지음 / 래빗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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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0 저자:박상영.


표지 날개 안쪽에 작가의 책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 하나도 읽지 않은 것이 없어서 새삼 놀랐다. 결국 이 책까지 샀으니 꼬박꼬박 따라가며 읽고 있구나 산문집 두 권마저 봤구나. 이번 책도 재미있으면 좋겠다.

술술 읽혔다. 걸리는 페이지가 없었다. 다만 장면을 눈에 보이듯 그리는 문장들, 서사의 구성 방식은 내가 알았고 좋아하던 그게 아니었다. 나는 드라마를 읽는 중이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쓴 건지 아닌지 몰라도 나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보지 않는다. 책에 드라마가 묻었어...영화일 수도 있고…

좋은 글이 뭔지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쉽고 재미있게 금세 읽을 수 있는 글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보편적인 서사와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거니까. 클리셰라고도 하는 그것을 내가 진저리치게 싫어하자, 한 친구는 ’그건 클리셰를 싫어하는 클리셰’라고 했다.

띠지는 왜 저 문장을 뽑았나 모르겠다. ‘망해도 너무 망했다’ 사람들은 남이 망한 걸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대다수는 컨텐츠에서라도 승승장구하는 주인공을 더 좋아한다. 웹소설과 웹툰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

이 책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제 박상영을 ‘졸업’한다. 내가 좋아하던 누군가들이 나 아니어도 더 많은 사랑을 받을 형태로 변해간다면, 그래, 행복하길, 많은 사람에게 읽히길, 하고 ‘좋아하는’에서 ‘는’을 ‘던’으로 바꾸는 짓을 많이 했다. 그걸 졸업이라 부르기로 했다.

재벌가를 둘러싼 출생과 죽음의 비밀, 권력 싸움의 이야기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걸 어떻게 그리는지가 글의 갈 길을 가른다. 샤갈이 이제부터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가기로 했어, 하면서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입이 벌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길을 잘못 들었네, 길이 잘 못 들었네, 하면서 뒤돌아서 무수한 갈래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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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모르는 세상을 쓴다는 건 결국,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세상을 끝내 이해하고 말겠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352-353, 작가의 말 중. 나도 노력은 했어.)

-“당신을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백골이 바스러져도, 온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당신의 만행을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당신을, 당신을 파멸시킬 거야.” (131, 이 독후감은 이 문장까지 읽고 작성되었다. 그렇다고 읽기 중단한 건 아냐… 부디 내가 성급했다 생각하며 독후감을 처음부터 다시 쓰길 바라…)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입을 다물어야 했던 사람들, 말하지 못한 사연들은 결국 어디에 쌓이는 걸까. 기억에서 잊힌 이름들과 이야기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166, 그곳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가지 못할 거야. 망각의 축복)

-나는 그런 그녀에게 요코하마의 ‘졸업생’이라고 불러주었다. 그 말에는 축하와 함께,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작별 인사가 섞여 있었다. (267, 이 부분 읽기 전에 박상영 졸업 선언해버렸는데...소오름 ㅋㅋㅋㅋ까지는 아니고 사람 생각이 뭐 다 거기서 거기여...)

-당신이 피로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289, 적어도 네 번 마른세수하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안경을 써서 못하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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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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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9 저자: 미시마 유키오.


국외 여행은 귀찮아졌다. 마지막으로 비행기를 타 본 게 2018년 초 베트남에 다녀올 때였다. 전에 걸린 혈전증은 이코노믹 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장거리 비행 승객이 노출되는 위험이라고 알게 되어서 더 비행기가 꺼려진다.
큰어린이와 곁의 사람은 듀오링고로 일본어를 열심히 배운다. 둘다 일본 음악을 아주 좋아한다. 2016년 작은어린이 없던 시절 우리 셋은 오키나와에 다녀왔다. 그랬으니 일본 체험은 끝 아닌가, 싶은데 두 사람은 일본에 한 번 더 다녀왔으면 했다. 작은어린이는 비행기를 한 번도 못 타 봐서 다른 나라를 가보고 싶어한다. 귀찮다, 귀찮다, 하면서도 한 주 전에 내년 2월 말에 맞춰 비행기표를 구입하고 숙소를 예약한 것도 결국 나였다.

오사카에 머물며 교토와 나라를 방문하고, 유니버셜 스튜디오에도 가는 게 대략 짜인 여정이다. 귀찮다던 내가 리얼 교토, 리얼 오사카, 이런 여행 가이드북을 전자책으로 빌려 제법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여행은 시작하기 전부터 사람을 움직이고 이것저것 하게 만든다.

교토에 킨카쿠지와 긴카쿠지가 있다고 했다. 그게 그거 아냐? 했는데 금각사, 은각사, 서로 다르고 위치도 각기 떨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금각사에 가게 되겠지? 그러다가 펼친 소설이 금각사였다.

취재와 상상을 바탕으로 했겠지, 했는데 바탕이 되는 사건을 상세히 적어둔 책이 이미 있었다고 해서 조금 배신감이 들었다. 영리하게 머리 굴려 쓴 책이로구나… 예전에 엄마를 살해한 9수생 이야기도 다 읽고 나서 마지막 소개말에 실화라고 해서 뭐야, 했던 기억이 난다. 씨앗 없는 이야기가 어디있겠어. 현실은 현실이고 이야기는 이야기이다.

소설은 때로는 대체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마음과 행동과 동기를 상상해 보고 결국 어떤 결과 내지 결말을 향해 가는 과정을 읽는 이가 좇게 만든다. 스님 연습생(?)이던 미조구치가 금각에 사로잡혔다가 금각에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작가는 화자의 마음 속에도 들어갔다가, 여기저기 헤매고 다니는 것도 쫓아갔다가, 주변 사람들의 영향과 그에 대한 화자의 반응도 살피다가, 미리 밑밥을 깔고 어떤 일의 우연성에 대해, 그렇지만 실제 저질러지는 큰일들은 우발적이지는 않다는 것(그니까 사전 준비도 치밀하고 이미 굳은 마음을 먹은 경우가 많다)을 주의깊게 그려놓았다.

덕분에 일본에 불교 문화의 흔적(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걸 알았고, 교토에 가서 오래된 느낌의 건축물을 볼 때 저게 무슨 의미야 오래됐을 뿐… 하는 마음은 덜게 되었다.

미조구치 나이 언저리에 읽었다면 그때마다 (십대든 이십대든) 다른 감상이 있었을 것이다. 그 나이의 나는 채팅방에서 수다 떨고 온라인 대항해시대 하는 걸 책 대신 선택했기 때문에 그 감상은 다른 세계에만 남아 있다. 이제 왠만한 등장인물을 보면 다 나보다 어려… 그래서 더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는 건 좋은 점일 수도 있고, 어린 마음의 불안을 많이 잊어버려서 몰입과 공감을 하기엔 너무 무미한 인간이 된 건 좀 안타깝기도 하다.

영화를 봐도 책을 봐도 자꾸 분석하려고만 든다. 그냥 하하호호 웃기다 훅을 날릴 땐 엉엉 슬프다 클리셰를 보면 익숙함에 편안하고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정도의 감식안이라면 조금 더 행복했을까? 그렇다고 이 소설을 막 따지고 분석하고 본 건 아니었다. 그냥 읽는 도중 나오는 인물에 대해 어떤 감정이나 평가 같은 게 조금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 다음이 어떻게 되나 보자, 할 뿐.

호오의 마음이 없는 문학 읽기에 대해 생각했다. 이런 덤덤함에 대해 여러 원인-수험 공부로 과부하가 왔다, 노화가 왔다, 향정신성 약물 탓일지도 모른다, 그냥 원래 이런 놈이다-을 떠올려 본다. 원래 그런 건 없을 것이고, 지금의 난 하여간에 그렇구나, 학교에 불 질러 버려! 하고 장난삼아 어디선가 말하거나 생각했던 것 같은데, 판사님 방금 앞 구절은 제 토끼 인형이 쓴 것입니다, 확실히 돌아버린, 잃을 게 없는 사람의 마음을 난 아직까지는 다행하게도 겪지 못했구나, 불행히도 누군가는 그런 걸 겪었구나, 한다. 아니, 이 책을 읽고 독후감을 이렇게 쓰는게 맞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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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신도 모르는 곳에 이미 미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불만과 초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미가 명백히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미로부터 소외된 것이 된다. (25, 아름다움은 자기 머리 속에 있는 걸 화자는 몰랐다.)

-나는 이리저리 각도를 바꾸어, 혹은 고개를 기울여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동도 일지 않았다. 그것은 낡고 거무튀튀하며 초라한 3층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꼭대기의 봉황도, 까마귀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아름답기는커녕 불안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라는 것은 이토록 아름답지 않은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29, 사람은 상상력이 있어서 실망하는 거지.)

-교토 시 전체가 불에 휩싸이는 것이, 나의 은근한 꿈이 되었다. 이 도시는 너무도 낡은 것들을 원래의 모습대로 지키고 있었고, 수많은 신사나 불당들은 그 속에서 생겨났던 작렬하는 재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51, 오래된 것들 보러 가 봐야지)

-나는 다만 재화를, 큰 파국을, 인간적인 규모를 초월한 비극을, 인간도 물질도, 추한 것도 아름다운 것도, 깡그리 동일한 조건하에서 말살시켜 버릴 거대한 하늘의 압착기와도 같은 것을 꿈꾸고 있었다. 때로는 초봄 하늘의 심상치 않은 광채가, 지상을 덮어 버릴 정도로 커다란 도끼날의 시퍼런 빛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단지 그 낙하를 기다렸다. 생각할 틈도 주지 않을 정도로 신속한 낙하를. (52, 히로시마 다음으로 고려된 폭격 지역이 교토였다는 걸 안다면 이런 소리 못하지...에반게리온의 나라)

-미라는 것만을 골똘히 생각하면, 인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암흑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직면하게 된다. 인간은 아마도 그렇게 만들어진 모양이다. (52, 인간 말고 예술가로 한정하죠. 대부분이 남들이 아름답다는 대로 따라하며 살다 죽어요.)

-흙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신발을, 무한한 관용에 의하여 머리 위에 올려놓음으로 해서 보살도를 실천한 것이다. (71, 칠조어론에서 칠조도 같은 모습으로 열반했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는다. 반면에 금각처럼 불멸의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어째서 사람들은 그러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일까? 내 독창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메이지 30년대에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내가 불태운다면, 그것은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이며,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일이 된다. (205, 비대한 자아는 이리저리 튄다. 숭례문 불태운 사람이 저렇게 난 천재야, 미의 감축, 이랬을까? 술김에 불지르는 것보다, 명료한 정신이 저런 방향이면 참 곤란하다. 사랑이 없어서 그래.)

-금각이 언젠가는 불타리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 없었던 일들도 견디기 쉽게 되었다. 죽음을 예감한 사람처럼, 절간 사람들에 대한 내 감정은 좋아지고, 대응하는 태도도 밝아지고, 무슨 일이건 화해하려고 들었다. (211, 그렇다면...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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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스러운 강아지 - 몰티즈 앤 리트리버의 행복한 일상 ㅣ 사랑스러운 강아지 1
몰티즈 지음, 서미영 옮김 / 대원앤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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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8 저자:몰티즈.


알라딘 이달의 당선작으로 적립금이 생겼다. 장바구니에는 ‘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박상영)’와 ‘사랑스러운강아지’가 담겨 있었다. 몰티즈와 리트리버가 귀염떠는 짧은 영상을 인스타그램에서 가끔 보곤 했다. 최근 넋놓고 보는 아이돌은 광고에 잔뜩 등장하는 필릭스 용복이 있고, 뇌 빼고 귀엽다 하게 되는 캐릭터는 이 두 강아지들인 것 같다. 그래서 상 탄 김에 질렀다.
진짜 개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개를 키운다는 건 너무 사람 중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뭔가 기고만장해서 나를 보고 짖거나 물려들거나 앞발을 들어 아랫다리를 팡 찍는 것도 싫고, 반대로 눈치가 너무 빨라서 아 저 사람 개 싫어해...하면서 흘끔 보다 눈 피하고 다시 흘끔 보는 것도 싫다. 싫어해서 미안해 개야. 어려서 키운 개들이 늘 사람보다 먼저 사라져서 그게 슬퍼서 일부러 싫어하는 지도 모르겠어.
캐릭터로 아예 사람인 듯 아니면 개인 척 사람인 귀여운 것들은 그래서 그냥 가볍게 소비해도 크게 죄책감은 안 든다. (아니 귀여운 걸 보고 왜 죄책감 걱정까지) 이 책의 얘들은 대부분 둘이서 서로 도닥도닥해 주니까 사람이 개를, 이 아니고 개끼리 개를, 이라는 비현실적이지만 내 세계관 안에서는 허용되는 장면 같다. 이마의 언잖은 11자 주름도, 꼬질꼬질해지거나 비 맞아 푹 젖어도, 울어도 웃어도 귀여운 강아지들이다.
그냥 귀엽다! 헤헤 하면 될 걸 이렇게 굳이 T하고 분석하는 인간인 나마저 홀린 멍멍이들, 한 번에 쭉 보고 끝 아니고 그냥 기분 꿀꿀할 때 필릭스 찾아 피드를 훑듯 책 페이지 몇 장 넘기면 좀 잡생각이 줄어들 것 같다. 귀여운 이미지로 기분 나아짐을 만든다는 건 그거대로(지은이나 소비하는 이나) 대단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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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일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4
장 주네 지음, 박형섭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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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03 저자: 장 주네.


제목만 보고 기대를 너무 했나 보다.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에 도둑을 집어 넣은 이 남자는 무작위로 과거를 회상하며 두서없이 거쳐온 장소들과 남자들에 대한 썰을 풀었다. 그 모든 걸 아름다움으로 치장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딱히 재미있지도 않았고, 추한데 자꾸 보게 되는 그런 종류도 아니었고, 미감을 건드리지도 못했다. 이전에 읽은 ‘길 위에서’와 ‘폭력적인 삶’을 섞어 놓은 것 같았다. 넓은 지역을 떠돌았고 그 이야기를 글로 쓰는 남자는 앞의 책을, 사랑을 갈망하는 가난한 남자는 뒤의 책을 닮아 있었다. 세 가지 책의 공통점은 아저씨들이 썼고 민음사 세계명작 시리즈이며 두꺼운데다 매우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화자는 남자에 미친 새끼이다. (그가 생각하는) 강력한 남성성을 지닌 사람에게-그가 범죄자이든 경찰이든- 금세 사랑에 빠진다. 다만 그 넓은 사랑은 남성에 한정이라서, 그의 이야기에 여성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자기가 사랑한 남자가 착취하며 사는 성매매 여성 정도가 가끔 등장한다. 그래서 그의 사랑은 인류애 같으면서도 반쪽 짜리이다.

도둑질, 강도짓, 성매수자 쫓아가 협박해서 돈 털기, 살인, 사회에서 말하는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도 그런 삶의 형태를 성스러운 것으로 표현하고, 심지어 신성모독으로 보일 만한 생각도 하는 인물들과 화자를 보며 어떤 감흥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덤덤했다. 이거 이미 이백 몇 년 전에 사드가 하던 짓이잖아. 걔는 귀족이었다만 감옥 가고, 성적 스캔들 일으키고, 나중에 사회운동(혁명)도 하고, 뭐 그런 비슷한 점들이 보였다. 나는 너무 매운 걸 많이 먹어서 이제 웬만한 건 암시롱 안 혀.

어려서 이십 년 가까이 살던 셋집에는 도둑이 여러 번 들었다. 부모가 금은방 하다보니 왠만한 건 가게 금고에 있었지만, 외국에서 노동하던 삼촌들이 사다 준 향수병들, 코니카 카메라, 수집한 외국 잔돈, 나와 동생이 모으던 저금통 같은 게 사라졌다. 뭔가 없어진 것도 안타깝지만 집이 그야말로 이것저것 빼내던져 난장판이 된 모습이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다. 신발을 신고 들어와서 밥상에 쭈그리고 앉아 발자국과 청바지의 엉덩이 자국을 고스란히 남긴 도둑, 현관 유리를 부수고 문을 따고 들어온 도둑, 지하실과 연결된 뒷문을 열고 들어온 도둑... 누군가의 침범은 내가 사는 곳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었다. 물론 집안에도 이미 위험요소(=아빠)가 있긴 했지만…
부모의 가게에도 여럿이 와서 손님인 척 정신을 빼놓고 그 사이 진열장을 열어 물건을 빼가거나, 앉아서 잠시 밥 먹는 중에 소리없이 들어와 귀걸이 진열대를 통째로 들고 달아난 도둑들이 있었다. 나와 내 동생의 동갑내기이던 옆집 자매도 자잘한 물건이나 돈을 우리집에서 꺼내가고, 자매 중 동생은 내 동생의 열쇠를 훔쳐 빈집을 열고 들어오다 다행히 엄마가 집안에 있었어서 잡았던 적도 있다. 도둑 이야기하면 다들 이렇게 뭔가 털려 본 경험이 있을까… 아니면 내가 열악한 동네 살아서, 아니면 운이 없어서 그렇게 도둑을 많이 겪은 건가 잘 모르겠다.

이 책 제목은 ‘도둑 일기’이지만 사실 ‘도둑의 사랑(들)’에 더 가까웠다. 물건 훔치고 교도소에서 지내는게 일상인 화자는 정작 좋아하는 상대로부터 마음은 제대로 못 훔쳤다. 오히려 홀따닥 사랑에 빠져 상대도 정말 날 좋아할까, 얘를 배신할까 말까, 애태우며 내내 주체성이나 주의력을 도둑맞은 모습이었다. 뭐 하고 싶은 대로 하다 그 이야기들을 도둑이 싸 놓은 똥처럼 글로 남겨놓고 갔으니, 그리고 변태 문인들이 칭송도 해 이름도 남겨줬으니 스스로는 살만한 삶이었을 것 같다. 다만 고통이나 절망의 정서는 의도적으로 숨긴 것인지, 정말 그런 감정을 강렬하게 느끼지 않은 것인지 글만 봐서는 잘 모르겠다. 이미 문인이 되고서 회고하듯 과거 이야기와 지나간 사람들에 대해 쓰다보니 그렇게 설탕가루 뿌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이성애 사랑들을 이렇게 나열해 놓았다면 정신 사납고 진부하고 안 물어봤고 안 궁금하다고 할 것 같아서 갑자기 소수자성에 샘이 나기도 하는 이상한 정신이 되는 독서였다.

+밑줄 긋기
-나는 너무나 무거운 슬픔을 몸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일생을 계속 그렇게 떠돌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방랑은 단순히 나의 생애를 장식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104, 책 내내 장은 스페인,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곳곳을 떠돈다.)

-독자들은 분명 이 책에 실망할 것이다. (145, 진작 알았으면 됐어.)

-그의 부드러움은 저절로 얽히고 수축되며, 또 여러 겹으로 포개져 하나의 무서운 용수철로 변할 것이다.
“형이 나를 버리면 난 미칠 거야.”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야말로 깡패 중에 가장 난폭한 깡패가 될 거야.” (209, 누구나 사랑을 잃으면 가장 난폭한 깡패가 되지.)

-그래서 나는 그가 나의 남창 경험을 알고, 그것을 인정해 주기를 요구했다. 그가 가장 비열한 나의 절도 행위들을 상세하게 알고, 그 때문에 그 자신이 심적 고통을 겪고, 또 그런 행위들을 수용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나의 출신, 나의 비역질, 나의 비겁한 행동, 허옇고 엉큼한 얼굴의 늙은 도둑년을 어머니로 갖기 원하는 나의 괴상한 상상력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구걸하러 다닐 때의 태도, 거지들이나 일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말하자면 거지들에게 일상적으로 통하는 , 거짓으로 변조한 탁한 음성, 남색가를 유혹하기 위해 꾸며 낸 교묘한 수단들, 히스테릭한 남창으로서의 거동, 미모의 젊은이들을 상대할 때의 부끄러움, 그들 중 한 젊은이가 대담하게 나의 사랑을 거역하던 장면, 어떤 깡패가 내게 은총을 베풀던 장면, 프랑스 영사관 직원이 내 모습을 보고 코를 막던 장면, 유럽 각지를 떠돌면서 누더기를 걸치고 허기와 모욕과 피로와 추악한 사랑 놀이로 계속 되던 끝없는 여행….... 이 모든 것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239-240, 뤼시엥이 알길 바라는 것이 동시에 독자가 알아주길 바라는 것 같다. 여태 읽은 이 책 내용은 이 문단 하나로 요약 가능하다. 누더기와 비참함에 미사여구를 더덕더덕 붙였다 정도)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가 이 책의 근본 주제이다. 이 세 가지는 서로 관련이 있다. 그 관련성이 언제나 명백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는 배반과 절도와 동성애에 대한 취향 사이에는 어떤 밀접하고 상호적인 교류가 있음을 인정한다. (245, 본인 한정 아닐까...혐오 멈춰)

-나 역시 모든 종류의 방탕한 삶을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절망한 자의 자유로움과 단순한 멋을 가지고 있다. 나의 용기는 모든 인습적인 삶의 존재 이유를 저버리고 새로운 삶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 있다. 그 발견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250-251, 따르고 싶진 않은 방향이지만 자기 삶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건 멋져…)

-그는 도덕에 관한 이야기를 건넸다. 모든 행위를 미적 관점으로만 보고 있던 나로서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덕주의자들은 나의 행동을 악의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들의 선의는 나의 악의와 충돌하면서 산산이 부서졌다.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어떤 행동들은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들이 증명해 보여 줘도, 나는 단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노래를 통해 그 행동들이 아름다운 것인지 혹은 우아한 것인지 판단할 것이다. 오직 나만이 그것을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나를 정해진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없다. (277-278, 삶을 극단의 예술로 살면 이렇게 될 수도…)

-나는 이 세계와 대립하고 있다. 이 세계는 나를 구속하고 재단하면서 상처를 주고 날카로운 각을 내세운다. 그것은 내가 오려 낸 형태보다 더 날카롭고 더 잔혹하다. 하지만 그럴수록 나는 더 아름답고 더 찬란한 존재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가 완성될 때까지 그것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 그것의 출발점이 무엇이었든 그 끝은 아름다워야 한다. 어떤 행동이 추잡하게 보이는 것은 그것이 아직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0-311, 완성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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