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14 저자:테네시 윌리엄스.

독후감을 세 번 썼다가 지웠다. 아우 다 마음에 안 들어. 또 지우면 안 되니까 그냥 냅두자…읽었다고 다 써야 하는 건 아닌데 이것도 강박인 것 같다.
제목과 작품 안의 욕망, 이라는 말 때문에 욕망이라는 말에 집중하게 되지만, 잘 모르겠다. 욕망이 무얼까. 먹고 싶고 하고 싶고 잘 살고 싶고 원하는 걸 얻고 싶고 그런 건 거의 모든 인간의 일 아닌가. 나의, 너의 바람.

블랑시가 사치와 허영이 심하고, 교사이면서 미성년자와 관계 맺는 일을 저지르고, 미치와 결혼해 보려고 점잖은 척 하긴 했다. 그렇지만 미치가 블랑시를 강간하려고 시도하거나, 스탠리가 자기 부인이 아기 낳으러 간 사이 블랑시를 강간하는 건 그놈들의 잘못이다. 열여섯에 결혼한 남자가 알고보니 남자를 사랑했고, 그 남자가 권총으로 자살한 것도 그녀가 생각하지 못한 불운이다. 운없고 허영기 좀 있고 남자로 팔자 고쳐보려다가 수틀린 여자. 그 여자의 허약함을 놓치지 않는 포식자 같은 남자들이 블랑시를 괴롭히고 비난하고 던져버렸다.
의지가지 없고 돈도 없어 동생한테 기대러 왔는데 험한 꼴만 보고 어딜 가도 쫓겨나는 신세이다. 받아줄 곳이 정신병원 밖에 없다는 건 슬프다.

인생은 기니까 오늘날 같으면 블랑시가 재활을 해서 사회로 돌아오는 일이 있을까? 언젠가 그녀를 품어줄 사람을 만날까? 작품이 나온 1940년대에는 그럴 가능성은 지금보다 훨씬 희박했을 것이다. 그렇게 옛날 이야기 속 여자들은 미치거나 죽는다. 동생 스텔라나 2층집 유니스처럼 남편한테 맞으면서도, 그래도 이 삶을 떠날 생각 없어, 떠나도 방법이 없어, 하는 불운한 세계이다.

이렇게 한 여자가 지독하게 사회관계망으로부터 배척당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다고 하기도 그렇고 감동적이라기도 그렇고 그냥 찝찝하고 서글펐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런 걸 많은 이야기들이 되풀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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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다는 거, 돈이 많이 들어요, 스텔라 아가씨!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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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은 악마의 달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1
에드나 오브라이언 지음, 임슬애 옮김 / 민음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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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3 저자: 에드나 오브라이언.



아이들이 집 바깥에 있으면 불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대개는 아이들이 해를 입거나 사라지는 상황이다. 그러면 내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친다. 생각 꺼져. 근거 없고 확률 매우 낮은 불안일 뿐이다.

아직 8월이다. 날짜를 잃어버리지도 않는데, 25년 전 이 날, 만16살 꼬맹이였을 때, 겁도 없이 모르는 사람을 만나겠다고 버스와 지하철을 거쳐 아주 먼 신도시에 갔다 왔다. 결국 아무 일 없었지만,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모욕감이 들었고 많이 울었고 두려웠다.

더위가 한풀 꺾였다고 대다수가 안도하는 표현을 하지만, 아직 8월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휴가는 끝났다. 나도 그 끄트머리이다. 여행도 모험도 없었고, 방과후학교에 가는 아이를 바래다 주고 데려오고, 3주 간 치과 치료를 받고(아직 한 번 남았다), 극소수의 친구들을 만나고, 책 11권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듀오링고로 아랍어를 따라했다. 알 하야 사으바 아다. اَلْحَياة صَعْبة عادةً 그렇지만 평온한 나날이었다.

꽂힌 책 중 가장 얇으니까 펼쳤다. 재미있게 읽었다. 단지 아이를 죽여버린 작가가 미웠다. 굳이 이런 감정을 끌어내려고 갑자기? 개연성 문제가 아닌 기분 문제였다. 22일 간 내내 머물던 나 대신 20일 넘게 떠난 엘런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일곱 살 아이는 전남편과 함께 웨일즈로 여행을 떠났다. 아일랜드의 엘런은 당일 갑자기 휴 라는 남자와 즐거운 밤을 보낸다. 각성한 것처럼 비행기표를 끊어 프랑스(아마도 남부) 해변으로 간다. 마주치는 남자들마다 어떤 가능성으로 보인다. 멋진 배우 바비를 우연히 만나 그와 가까워지길 원하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그를 찾는다. 그전과 그 사이에 원하지 않는 접촉을 시도하는 남자 셋을 떨어낸다. 문득 생각난 전남편에게 연락했고, 아이가 여행 중 우유를 가지러 가다가 차에 치여 죽었고, 부서졌고, 이미 묻었다는 걸 알게 된다. 파티 피플들이 위로하고 호들갑을 떨고, 그렇게나 바라던 바비는 엘런을 위로하기 위해 이곳저곳에 데려다니고, 뭔가를 사 주고, 엘런은 행복감을 느낀다, 바비에게 성병이 옮고 바비가 도망가기 전까지 아주 잠깐. 병과 무자비한 숙박비에 짓눌려 엘런은 집으로 돌아온다. 허무를 느낀다. 다시 휴란 남자가 접근해 오지만 밀어낸다. 다행히 병은 심각하지 않아 마음이 가볍다.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홀로 멀리 갔는데, 아이는 죽고 자신은 병에 걸렸다. 휴가 여행 한 번 간 대가 치고는 가혹하다.

휴가지에서 이런저런 일이 벌어지는 소설은 주로 프랑스 작가, 특히 뒤라스 걸 두 권 읽었다. 정말 재미없었고 괜한 계층 차이를 느꼈다. 이번 소설은 그보다는 청량했고, 너무 코미디로 가지도 않았고, 이상한 구석 없는 한 사람이 겪는 시련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아이가 죽은 설정 말고는 뭐 다 괜찮았다.

농구 수업을 마치고, 아이가 나온다. 물을 가져왔나요? 해서 바닥에 몇 모금 남은 탄산수병 가져온 것을 건넨다. 병을 돌려받고는 휴대용 선풍기를 들려준다. 양산을 펼치고 아이와 내 그림자가 양산 그림자에 가려지도록 신경 쓰면서 뙤약볕을 걷는다. 평온한 오전이다. 그러고나서 이 책을 마저 읽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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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리에 서서 엘런은 남자를 갈망하며, 그가 저지른 가장 사악한 짓이란 엘런이 죽은 듯 살자고 체념했을 때 그런 식으로 다가와서 거짓된 희망을 건네고 하룻밤 동안 새 삶을 준 것이라고 생각했다. (37, 줬다 뺏는게 제일 나빠…)

-노란색 꽃은 무거운 꽃가루 때문에 지친 듯 축 처진 채로 흔들리고 있었다. 땡볕 속에서 힘없이 늘어진 모습이었다. 바비가 부드럽게 꽃송이를 따더니 다른 꽃송이에 정면으로 가져다 대고 살포시 포갰다.
“깨끗한 짝짓기.” 바비가 말했다.
“정말 꼴사나운데.” 그 광경을 완전히 몰입해서 지켜보던 데니스가 말했다. “쟤네 느낄 줄 알아?” (155, 눈앞에 그려보면 진짜 웃긴 장면이다.)

-바비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난은 향수와 마찬가지로 엘런이 폐기한 감각이었다. 이런 낱말들은 삶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문제에 비하면 미미할 뿐이었다. 해변에서 보낸 날들은 빛바랜 꿈이었고, 오직 질병만이, 엘런 주변의 대기와 도로의 돌, 지나가는 자동차만이 실재했다. (227, 아프면 다 소용없어.)

-과거에 자신이 광증에 사로잡혀 인생을 망쳐 버릴까 봐 걱정했다는 것, 외딴 호수에 몸을 던진 두 여자처럼 미쳐버릴까 봐 걱정했다는 것을 생각하자 우스웠다. 하지만 이 병은 광기보다 동정받기 힘들었다. 전염되는 병이었고, 용서받을 수 없었다. (229, 남자들도 이따금 자기가 미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을 할까. 내가 다니는 의원의 대기실에는 압도적으로 여성들이 많다. 그래서 아마도 바깥 세상에 치료 없이, 자기가 미친 줄도 모르고 돌아다니는 미친놈이 미친년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들은 성병에 걸리는 걸 더 염려할 것이다.)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싶어. 깊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필요하다면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을 정도로.’(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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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원의 인류학 - 몸-마음-자연을 연결하는 사유와 치유
김태우 지음 / 돌베개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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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2


20여년 전, 최고 단계의 스테로이드 연고를 그런 줄도 모르고 남용하다가 아토피성 피부염이 심해졌다. 연고는 듣지 않게 되었고, 염증이 온몸으로 퍼지고, 감염된 부위도 있었다. 가려움, 긁으면 안 되는데 잠든 채 벅벅 긁다 놀라 깨면 엉망이 되어 버린 상처, 삶을 놓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부모는 어려서부터 그전까지도 나를 낫게 하겠다고 피부과, 나병 환자 의원, 1년 안에 치료하겠다고 정체 불명의 조제약을 지어주는 약사, 온갖 민간요법까지 안 해본 것,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이제 막 만20살이 된 나는 상처와 진물에 달라붙는 바지통을 떼어가며 겨우 걸어다녔다. 한여름에도 긴팔 긴바지로 염증을 가리고, 축제 무대에서 노래할 때는 챙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마지막 시도로 아토피성 피부염과 건선을 전문으로 한다는 한의원에 갔다. 침대에 누워 침을 맞았던 거 같은데 별로 안 아팠는지 기억이 잘 안 난다. 탕약값이 매우 비싸서 난감해하자, 저렴한 환약을 선택지로 줬고, 병변에 소독솜으로 찍어바르라는 약도 줬다. 알갱이들을 먹고 한약냄새 나는 묽은 액체를 염증 여기저기에 발랐다. 수돗물이 나쁘다 해서 내가 사는 원룸에 부모가 연수기까지 달아주었다.

여전히 가려웠고 방법이 없다, 싶어서 몇 달 다니다가 결국 비싼 치료비가 부담스러워 그만두었다. 다행히 피부염으로 죽지는 않고 아주아주 오랜 시간 거쳐 모든 염증이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일부만 작게 고질로 남은 채 대부분의 손상된 염증 부위에 새살이 돋았다.

10년 단위로 돌아오는지, 10년 전에는 몸과 얼굴까지 염증으로 뒤집어졌다. 어린이집에서 만난 할머니가 EM용액이 좋다고 써보라고 해서 비료나 할 것을 발랐다가 감염만 되었다.
아주 오랜만에 피부과를 찾았다. 스테로이드제를 두려워하는 나에게 의사는 본인과 자신의 자녀도 비염이 있다며 심해지고 필요하면 약을 쓴다고, 일단 급한 불은 끄고, 먹는 약도 연고도 가장 순한 종류로 처방할 것이고, 그러고나면 스테로이드의 대안으로 프로토픽 같은 연고도 나중에 처방해주겠다고 달랬다. 00대병원에 가면 달맞이꽃 종자유를 처방하는 선생님도 계시다고 나중에 필요하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번에도 더디긴 했지만 낫긴 나았다. 스테로이드의 올바른 사용에 대해 배웠고 특정 성분에 대한 공포도 사그러들었다. 그러고나서 10년이 또 흘렀는데, 지금은 허우대 멀쩡하지만 방심할 순 없다…

그렇게 마지막 한의원 치료를 20여년 전 경험한 이후, 나는 한의원에 가지 않는다. 발목을 다쳤을 때도 한의원에 가보라는 이웃이 많았는데 안 갔다. 나중에 여러 병원을 전전해 겨우 인대 파열과 심부정맥혈전증, 폐색전증으로 진단받은 이 병을 한의원에만 맡기고 병원에 안 갔다면 어떻게 됐을까. 알고 싶지 않다.

서양 의학과 한의원을 대비시켜 설명하려는 시도는 처음에는 흥미로웠다. 그런데 의학은 진료 과목이 무엇인지에 따라 선생님들의 시선이든 환자와의 접촉이든 다 달라진다. 주로 내과 진료실 풍경이 예시가 되는데, 그걸 의학의 전반적인 특징으로 일반화하며 한의학을 설명하는 건, 뭔가 한의학과 짝이 맞도록 짜맞추는 느낌이 들었다.

사상의학이나 동양철학, 거기에 푸코와 현상학, 언어학, 존재론 같은게 튀어나와서 동양의학의 존재 가치를 열심히 풀어놓고 있었다. 그런데 잘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일까 정말 그렇겠구나, 하는 부분이 없었다.

이 책을 갖추고 읽은 건 내가 한의학을 너무 몰라서, 알면 이해하고 마음이 열릴 수도 있지 않나, 그런 시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새끼 생각보다 철벽이었다. 한의원에서 치료를 받고 나아진 사람들은 진심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그 선택을 존중한다. 아프면 뭐라도 하고 싶은 사람 마음이라 가장 나아질 수 있는 방향이 그곳이라면 가는 게 맞겠다. 그냥 나만 안 가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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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산다. 우리가 세계를 아는 방식은 곧잘 말 속에 체화되어 있다. 말 속에 이미 어떤 관점의 틀이 자리 잡고 있을 때, 그 말을 사용하면서 다른 틀로 사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의 변화는 사고의 변화를 수반한다. (73-74, 예전에 말/글을 바꾸면 내가 달라질까? 하고 ‘언어의 밝은 집’이란 사고실험 같은 걸 잠깐 했는데 금세 집어치웠다.)

-고흐는 그가 바라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구도, 색감, 붓터치 등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구성해 그림 속에서 실현한다. 마찬가지로, 맥에 대한 동아시아의서의 표현은 기혈의 흐름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한 노력이며, 묘사적 서술 역시 흐름이 있는 생명의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주의와 후기인상주의의 차이를 서양의학과 동아시아의학의 차이로도 읽을 수 있다. (93, 여기서 어떻게 ‘마찬가지로’가 나올 수 있는지 전후를 살펴도 납득을 못했다. 시점은 참신하지만 거참…한의학은 후기인상주의 미술과 특성을 공유한다는 말.)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의학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비판은 맥락을 다 잘라버린 선언일 뿐이다. 대상의 특정과 지시를 강조하지 않는 동아시아의학의 방향성을 고려하지 않는 단정적인 언사다. 여기에는 또한 모든 의학이 대상을 강조하여 객체화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심하게 말하면, 그런 선언들은 폭력적이다. 후기인상주의 그림을 보고 사실적이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다.(105-106, 발췌를 삼가야겠다 싶은게, 특정 부분에 대한 의구심을 표하면 책 전체의 흐름과 맥락을 보라고 혼날 거 같은 느낌이다. 누가 그랬어 객관적이지 않다는 비판 누가 언제 어디서 했어, 혼 좀 나자, 하는 기분)

-세계에 대한 앎의 방식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객관 아닌 앎을 이해해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106, ‘설명하려 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어.’ 브로콜리너마저의 ‘커뮤니케이션의 이해’가 듣고 싶어져서 들었다.)

-아날로지즘은 존재들의 기저를 흐르는 이치에 주목한다. 그 이치가 근간을 이루면서, 또한 변주하면서 세계를 구성한다. 이때 아날로지는 그 근간의 이치를 이르는 말이다. 음양, 사시, 오행, 주역 괘가 동아시아 아날로지의 예시들이다. (127, 동양철학과 한의학의 연결성을 강조하는데 이 분야에 문외한이라 연결하기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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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독서법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99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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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1 저자:김선영.

한국문학은 특이하게 출판사에서 학년이나 적정 연령을 제시하기도 하는 아동문학, 동화 시절을 거쳐, 성인(?) 문학으로 넘어가기 전 청소년문학이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가끔 읽어보면 그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라 때론 오, 때론 아아… 한다. 어느 때건 아이들도 단순히 도파민 터지는 소재말고도 완성도 있는 문장과 서사를 읽을 수 있는 책이 많았으면 싶었다.

큰어린이 읽으라고, 비교적 얇아서 갖춰 놨는데 읽긴 했는지 모르겠다. 제목을 보며 얇으니까, 하고 꺼내서 금세 읽었다.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좋았다. 글쓴이의 내공이 느껴진달까… 그렇다고 책날개에 적힌 다른 책들을 찾아보기엔 그러다가 실망한 적이 많아서 망설여진다.

내가 읽어봤으니 아이들에게 괜찮다고 권할만한 서사와 문장이었다. 청소년 화자로 진행하는 것도 어색하지 않았다. 어떤 책을 읽을 때는 젊은이가 노인 흉내를 내거나, 어른이 아이 흉내를 내는 글을 읽다가 그게 너무 티가 난다 싶어 재미가 식을 때가 있는데, 소설집 속 소설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 건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느낌이었다. 물론 그건 책을 읽게 될 청소년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성장의 서사가 어설피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내게도 소용이 있으면 좋겠다.

-바깥은 준비됐어
나는 쥐. 엄마는 박쥐. 인서와 달리 나는 말 없이 학교를 안 간 적이 없다. 학생 때도 선생 때도 그렇다. 학교를 나오지 못하는 아이들은 여럿 보았다. 학교가 문제인 적도 있고, 집이 문제인 적도 있다. 나는 내가 문제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알약을 삼키고 꾸역꾸역 학교에 간다. 어떤 연결들 때문일 것이다. 내가 빠져나간 자리에 생길 혼란에 대한 두려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싶다. 내 바깥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바람의 독서법
전생에 입시에 대한 큰 중압감 없이 나 자신이랑 집안 꼬라지와 싸우기만 하면 됐으니 돌이켜 보면 편하게 그 시기를 넘겼다. 그래서 진화한 입시 지옥을 직접 체험해 보려고 두 번 더 수능을 봤었나 보다… 화자에게 생긴 난독증과 반대인 이독증(?) 같은 능력, 난 정말 부럽기도 했다.

-흔들리는 난타
근육질에 애들 장악력 있는 선생이 어디선가 뿅 나타나 문제아들을 다 잡고 좀 나은 길로 인도하는 이야기가 자주 있는 건 모두의 바람이 대충 비슷하다는 뜻이겠다. 심지어 그 문제아들조차 누군가 나를 잡아주기를 바라는 걸지도. 이런 판타지를 읽으면 내 역할은 대체 뭘까 무거워진다.

-나는 잘 지내
대부분 청소년 화자이지만, 이 글에서는 모녀의 이탈리아 여행 중 엄마가 중심이 된다. 보호와 집착 사이, 그 균형은 쉽지가 않다.

-중독
공예품 수집가 엄마, 남의 손 사진 몰래 찍는 아들, 멈출 수 없는 무언가. 게임, 약물, 알코올, 스마트폰 중독 이런 건 흔하고 사랑중독마저 있는데 사실 사람은 푹 빠져 있을 만한 뭔가가 하나라도 있어야 살 기운이 나는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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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건가? 나는 넓어지고 있는 건가? 나도 넓어질 수 있는 건가? 내가 자라고 있는 게 맞긴 한가? (18, ‘바깥은 준비 됐어’ 중. 나도 내 성장보다는 닳아짐을 더 많이 의식했던 것 같다.)

-물빤드기:물맴이 따위의 물에 사는 곤충을 가리키는 말의 사투리로, 반들거리는 사람을 이름.(74, ‘흔들리는 난타’ 중.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는 않고 윤흥길의 소설 ‘기억 속의 들꽃’에 나오는 단어라고 함.)

-직수굿하다:저항하거나 거역하지 아니하고 하라는 대로 복종하는 데가 있다.(83)

-가붓하다:조금 가벼운 듯하다.(84, 125, 이 소설은 유독 평소 잘 안 쓰는 어휘들이 많이 나왔다. 새로운 단어들을 알게 되는 건 좋은데 문제아 여고생 화자랑은 조금 어긋나는 말들이었다.)

-그 순간, 마지막 남은 물마저 빠져 버린 바닷가가 된 기분이었다. 차디찬 갯바람만 휘휘 대고, 물이 들어오지 않아 팍팍하게 갈라지는 갯벌 같았다. (102, ‘나는 잘 지내’ 중. 물 없는 바다를 본 적이 있다.)

-“사치?”
“먹고사는 문제가 아닌 낭만 같은 거. 사는 데 꼭 필요한 건 아니지만 그게 없으면 건조해서 견딜 수 없는데, 견딜 수 있게 해주는 것.”(151, ‘중독’중. 내게 그게 책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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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푸라기 왕관을 쓴 여자
박상영 지음 / 래빗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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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810 저자:박상영.


표지 날개 안쪽에 작가의 책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 중 하나도 읽지 않은 것이 없어서 새삼 놀랐다. 결국 이 책까지 샀으니 꼬박꼬박 따라가며 읽고 있구나 산문집 두 권마저 봤구나. 이번 책도 재미있으면 좋겠다.

술술 읽혔다. 걸리는 페이지가 없었다. 다만 장면을 눈에 보이듯 그리는 문장들, 서사의 구성 방식은 내가 알았고 좋아하던 그게 아니었다. 나는 드라마를 읽는 중이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쓴 건지 아닌지 몰라도 나는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보지 않는다. 책에 드라마가 묻었어...영화일 수도 있고…

좋은 글이 뭔지 생각한다. 많은 사람이 쉽고 재미있게 금세 읽을 수 있는 글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보편적인 서사와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거니까. 클리셰라고도 하는 그것을 내가 진저리치게 싫어하자, 한 친구는 ’그건 클리셰를 싫어하는 클리셰’라고 했다.

띠지는 왜 저 문장을 뽑았나 모르겠다. ‘망해도 너무 망했다’ 사람들은 남이 망한 걸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대다수는 컨텐츠에서라도 승승장구하는 주인공을 더 좋아한다. 웹소설과 웹툰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

이 책은 망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제 박상영을 ‘졸업’한다. 내가 좋아하던 누군가들이 나 아니어도 더 많은 사랑을 받을 형태로 변해간다면, 그래, 행복하길, 많은 사람에게 읽히길, 하고 ‘좋아하는’에서 ‘는’을 ‘던’으로 바꾸는 짓을 많이 했다. 그걸 졸업이라 부르기로 했다.

재벌가를 둘러싼 출생과 죽음의 비밀, 권력 싸움의 이야기는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걸 어떻게 그리는지가 글의 갈 길을 가른다. 샤갈이 이제부터 하이퍼리얼리즘으로 가기로 했어, 하면서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 입이 벌어진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길을 잘못 들었네, 길이 잘 못 들었네, 하면서 뒤돌아서 무수한 갈래길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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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모르는 세상을 쓴다는 건 결국, 절대 이해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세상을 끝내 이해하고 말겠다는 욕망과 다르지 않다. (352-353, 작가의 말 중. 나도 노력은 했어.)

-“당신을 죽어서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백골이 바스러져도, 온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당신의 만행을 결코 잊지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필코 당신을, 당신을 파멸시킬 거야.” (131, 이 독후감은 이 문장까지 읽고 작성되었다. 그렇다고 읽기 중단한 건 아냐… 부디 내가 성급했다 생각하며 독후감을 처음부터 다시 쓰길 바라…)

-살아 있는 동안 끝내 입을 다물어야 했던 사람들, 말하지 못한 사연들은 결국 어디에 쌓이는 걸까. 기억에서 잊힌 이름들과 이야기들이 모이는 장소가 있다면 그곳은 과연 어디일까. (166, 그곳이 없다면 사람은 살아가지 못할 거야. 망각의 축복)

-나는 그런 그녀에게 요코하마의 ‘졸업생’이라고 불러주었다. 그 말에는 축하와 함께,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작별 인사가 섞여 있었다. (267, 이 부분 읽기 전에 박상영 졸업 선언해버렸는데...소오름 ㅋㅋㅋㅋ까지는 아니고 사람 생각이 뭐 다 거기서 거기여...)

-당신이 피로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289, 적어도 네 번 마른세수하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안경을 써서 못하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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