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 발언 - 너와 나를 격분시키는 말 그리고 수행성의 정치학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유민석 옮김 / 알렙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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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0 저자: 주디스 버틀러.

청소년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면서 느끼는 큰 고통 중 하나는 언어 폭력에 직, 간접적으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욕설 자체를 금지한다면 내 일은 욕한 아이들을 하루 백여 명씩 벌주다가 끝날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를 욕설로 호명하고, 혼잣말이라 주장하며 남들 앞에서 욕설이 들리게 크게 말한다. 내 앞에서 크게 욕설을 하더라도 “얘 한테 그런 건데요?” 하면서 옆의 아이를 가리킨다. 어른한테 직접 건넨 욕설이 아니라면 누가 듣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냐 하는 것이다.

욕설과 패드립, 그러니까 상대방의 부모를 들먹이거나 욕보이는 짓이 놀이처럼 행해진다. 그러면서 교사를 도구처럼 이용한다. 저 녀석이 패드립을 했으니 자기 대신 혼내달라고 끝없이 이르면서 수업을 방해한다. 이르는 녀석도 평소에는 서로 같은 짓을 주고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아이들은 자신에게 ‘일러바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으로 선생이 보지 못한 잘못을 저지른 다른 아이를 혼내는 행위를 하게 만들려고 시도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움직였다는 효능감을 얻으려고 하는 것 같다. 선생이 직접 못 봐서 지도할 수 없다하거나, 직접 지도하려해도 당사자가 끝까지 부인하거나, 사소한 장난이라고 이른 것을 무시하면 이른 아이는 선생에 대해 거의 원한에 가까운 감정과 적대감을 보인다. 사실 상대방이 자신과 자신의 부모에게 뭐라고 했든 쟤는 원래 저러고 나도 걔한테 가끔 그러니까 별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기에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교사가 그걸 별일 아닌 듯 대하면, 욕한 아이보다 교사가 더 나쁜 사람이 된다.

나는 이런 상황이 너무 어렵고 괴롭다. 마치 욕설과 비하와 혐오라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누비는 기분이다. 나에게 한 말이 아니지만 내 예민한 교감신경은 늘 과활성화된다. 예전 어떤 연수에서 생활지도 전문가라는 경력 교사가 노하우라고 전해준 게 내내 기억에 남는다. 욕설을 들었다면? 무시하라. 못 들은 척 하라. 이렇게 강조했었다. 그러기에는 총알이 너무 많고 너무 크다. 이게 일상이다, 하고 무뎌져야 하는데 그걸 아직도 못해서 나는 부적응자이다.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려 들고 바로잡으려 드는 내 정신은 적당히, 무사히 정도로 타협하는 능력을 길렀으면 좋겠다. 하필이면 내 과목은 인권과 자유와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추상적으로 부르짖고 있다. 그 공중에 흩어지는 말들과 현실의 괴리를 버텨내는 것은 쉽지 않다.

삶은 단순해야 덜 불행하지만, 법과 철학과 학문은 일상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세세하게 따지고 들어간다. 언어가 전달하는 내용에 어떤 행동이 담겨 있는지, 언어를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어떤 행동이 되는지, 권력이 언어를 해석하는 방식이 그 언어에 어떤 힘을 부여하는지 묻는다. 이 책에서 주디스버틀러는 ‘혐오 발언’(격분시키는 말, 상처를 주는 말)이 어떻게 생산되고 호명되는 대상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다. 다른 학자의 비유와 판례의 법적 해석이 어떤 부분이 문제의 여지가 있는지 따져본다. 그 과정을 눈으로 적당히(책 읽기에서는 타협이 된다. 내 그릇을 이제 대충 아니까) 따라간다.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오스틴의 ‘발언내행위’와 ‘발언효과행위’, 푸코의 ‘주권’, ‘권력’, 마리 마츠다, 매키넌의 포르노 담론, 프로이트의 ‘터부’등을 끌어온다. 배경 지식이 없으니 주해와 저자의 인용을 보고 그런가보다 한다.

‘그거 혐오 발언이야’ 하는 권력이 등장하는 순간 권력은 혐오 발언이라는 것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혐오 발언 자체가 다른 이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이 논리를 교실에 대 보면, 내가 욕설을 금지할수록 욕설에 힘이 있다고 인정하는 셈인가? 뭐 이렇게 내 방식대로 읽고 있다. 미국은 수정헌법 1조 때문인지 표현의 자유에 극도로 민감하다. 우리나라는 명예훼손이나 모욕에 관한 형법이 있지만, 그 모든 나쁜 말들이 모두 처벌받지는 않는다. 공정하게 법이라는 게 집행된다면 모두들 감옥에 들어가 있을 것이다. 교육은 바른 언어 생활, 타인에 대한 존중 같은 걸 계속 말하지만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하위문화가 생기고 계속 유지되고 전승된다. 뭐라도 해야 되니까 하긴 하는데 아무도 듣지 않고 별다른 효과도 없다는 무력감. 이 좌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말로만 내려놓은 인간에 대한 기대를 언제 정말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 일은 그렇게 시지프스의 바위 굴리기 같다. 그리고 이 책 읽기도 그렇게 바위 굴리기만큼 어렵다. 뭘 알고 읽는 건 아닌 듯한 기분으로 책장 넘겼다.
책 말미에 옮긴이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해제를 달아 주요 내용에 밑줄을 긋고 관련 인용문도 같이 제시해주셨다. 그걸 다 본다고 이 책을 다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하여간에 누가 뭐래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뒤로 넘어가는 건 앞으로 쏘아올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 하면서 용감해지라고,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피해자가 되지 말고 뒤집어서 되돌려주라고 하는 응원으로 읽고 질질 짜지 말아야겠다.


+밑줄 긋기
-사람은 자신이 불리게 된 그 이름으로 단지 고정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상처가 되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폄하되고 비하된다. 그러나 그 이름은 또한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인다. 다시 말해 하나의 이름으로 불림으로써 그에게는 역설적으로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 주어지게 되고, 또한 그는 그 부름을 발생시킨 과거의 목적을 넘어서는 언어의 새로운 시간적 삶을 시작하게 된다. 따라서 상처를 주는 말의 전달은 그것이 호명한 사람을 고정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예상 밖의 가능성을 여는 응답을 낳을 수 있다. (13, queer란 말이 멸칭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전복된 의미로 스스로 프라이드를 가지고 사용하게 된 것처럼)

-‘퀴어queer‘와 같은 용어들에 대한 가치 전도는 말이 그 말의 발언자에게 다른 형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자신의 원래의 목적과 반대로 인용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효과의 반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36, 위에서 덧붙일 필요도 없이 결국 제시된 사례)

-발언내행위는 무언가를 말하는 동시에 무언가를 행하려는 것이다. (…)그의 말하기는 그 자체로 일종의 행하기이다. (…) 한편 발언효과행위는 일련의 결과를 개시하는 발언이다.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것과 생산된 결과는 시간적으로 구분된다. 결과는 언어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말함으로써 야기하거나 성취하는 것”이다. (41, 오스틴의 발언행위 유형 분류)

-어떤 의미에서 관습은 상속된 일련의 목소리들, 즉 ‘나’로서 말하는 타자들의 메아리다.(58)

-혐오 발언을 발언하는 자는 그런 발언이 반복되는 방식에, 그런 발언을 재활성화시킨 것에, 혐오와 상처의 맥락을 재확립시킨 것에 책임이 있다. (61-62)

-인종차별적인 비유는 성별과의 잘못된 비유를 위해 착취되며, 둘 사이의 교차점은 비판적으로 심문되지 않은 채 남게 된다. (84, 이전에 읽은 ‘혐오에서 인류애로’에서 인종차별 문제-성소수자 차별 문제 두 사이의 유비가 많이 나왔다. 성별은 아니고 성적지향에 관한 것이지만, 버틀러는 너스바움의 그런 비유를 비판하겠구나 싶다.)

-주체는 어떤 선별 과정을 통해 언어로 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주체성에 대한 판독 가능하고 인식 가능한 용어가 규제된다. 그 주체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주체가 ‘누구’인가는 그 혹은 그녀가 전혀 불린 적이 없는 이름에 달려 있다. 언어적 삶을 위한 가능성들은 이름을 통해 개시되고 동시에 배제된다. (86, 나를 부르지 마…)

-즉, 국가는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 (150)

-국가는 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발언의 영역을 적극적으로 생산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 경계선을 표시함으로써, 그리고 그 결과 경계선을 구성하며 존속시키는 권력을 보유함으로써 말이다.위에서 논의된 정치화된 일부 맥락들 속에서 혐오 발언에 귀속된 과장되고 효과적인 발언은 주권적인 언어 행위, 즉 자신이 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권력을 갖는 언어 행위로 인식됨으로써, 스스로 주권 국가의 발언을 본뜬다. 이런 주권 권력은 혐오 발언이 우리에게서 권리와 자유를 ‘박탈한다’고 할 때 혐오 발언에 귀속된다. 혐오 발언에 귀속된 권력은 절대적이며 효과적인 행위 능력, 즉 수행성이자 동시에 이행성이 된다(그것은 자신이 말하는 것을 행하며 자신이 그 발언에 의해 수신된 자에게 행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행한다). (151)

-애니타 힐이 토머스 판사와 상원 청중들에게 그녀의 주장을 행하려면 그녀는 또다시 증언을 해야 할 것이고, 그 증언은 그 상처를 반복하고, 기록하고, 또다시 말해야 할 것이며, 따라서 부당전유에 스스로를 내놓게 될 것이다. 증언과 증언이 기록하는 그 사건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증언이 수행하는 상처의 반복과 증언이 지칭하는 상처의 수행을 구별해야만 한다. 그런데 만일 증언이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 그 상처를 반복해야만 한다면, 그리고 그 반복이 행위능력의 어떤 증표로 여겨진다면, 증언을 공모의 고백으로 곡해하는 것은 어떤 구별로도 보호할 수 없는 위험인 것 같다. (182)

-혐오 발언의 결정은 따라서 국가의 문제, 더 구체적으로는 국가 사법부의 문제이다. 어떤 국가에 의해 행해진 결정인 혐오 발언은 이제 또 다른 ‘언어 행위’-법의 언어-에 의해 행해진 결정이 된다. 이런 혐오적인 발언의 존재가 법원의 목소리에 기이하게 의존한다는 것은 혐오적인 발언이 궁극적으로 그것이 결정되는 국가의 발언과 구별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184-185, 꽤 극단의 구성주의라고 해야 하나?)

-혐오 발언을 결정하는 작업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은 그런 오용 작업을 국가에 양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종차별적인 욕설과 성차별적인 욕설에 관한 법적 담론이 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욕설들을 재반복하고 재수행하며, 이번에는 국가가 승인한 표현으로 재생산한다. 국가가 어떤 형태의 상처가 되는 표현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내고 유지시키는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본다면, 법적 언어의 정치적인 중립성은 상당히 의심스러운 것이다. (192-193)

-말하기가 그 자체로 행하기인 것은 아니며, 그것은 저항되어야만 하는 피해의 행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말함과 행함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는 것은, 비록 어렵다 하더라도 발언이 어떻게 그리고 어째서 피해를 행하는지 말할 수 있는 어떤 이야기가 항상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93)

-동성애자는 그의 정의가 타인에게 맡겨져야 하는 자, 그 또는 그녀의 섹슈얼리티에 관한 자기 정의의 행위가 부정당하는 자, 그의 자기 부정이 군복무를 위한 전제 조건인 자이다. (202, 내가 나라고 말하면 안 되는데, 권력은 내가 나 자신이 말하려던 그 존재라는 것을 말하면 안 된다고 하는 와중에 그 존재라는 말을 반복하게 된다. 이게 뭐야.)

-욕망에 대한 금지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욕망이며, 이러한 기만 자체가 이후 ‘양심’이라고 불리는 것의 시작이 된다. 따라서 ‘양심’의 명사적 형태가 정신적인 실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떤 길들여진 반성적 활동, 즉 자아에 대한 기만, 욕망을 외면하는 욕망의 경로, 그 금지가 욕망 충족의 장소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그런 반복된 내면화의 실천이 정신적인 능력으로서의 ‘양심’에 대한 잘못된 명칭에 해당하는 것이다. (211)

-검열은 자신이 검열하고자 하는 것과 절대로 완전히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검열은 역설적인 결과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자기 스스로 부인했던 소재와 연루된다. (243)

-즉 인식 가능성의 조건은 그 자체로 권력 내에서 그리고 권력에 의해 형성되며, 권력의 이러한 규범적인 행사는 권력 작용으로 거의 인식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은폐된 형태의 권력 가운데 하나로, 즉 자신의 인식 가능성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자신이 야기하는 판독 가능성의 조건들을 벗어난다. (252, 즉이 세 번 연달아 나왔지만 하여간에 실존을 권력이 (존재를 금지하는 방식으로도) 구성한다는 말로 대강 알아들음)

-비록 배제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사용이 대단히 복잡하기는 하지만, 검열이 ‘생산적’인 권력의 형태로 행위하는 방식을 재사유하는 작업을 위해, 나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다른 목적을 위해서 그 용어를 부당 전유할 것을, 그것의 적합한 의미를 부적합한 의미로 전치시킬 것을 주장한다. 나는 그런 전치가 흥미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배제의 행위가 단지 한 번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발생하며, 계속된 배제 행위에 의해 재환기되는 것이 주체의 형성이 발언 가능한 것의 영역이 차지하는 한정된 생산에 엮이게 되는 주된 현장이기 때문에 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발언의 가능성이 배제될 때 위험에 처해지는 주체의 상황을 설명한다. (260-261)

-우리가 불리는 이름은 우리를 종속시키기도 하지만 행위능력의 장면을 양가성으로부터 생산함으로써 그 부름이 발생한 의도를 넘어서는 일련의 효과들 또한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불리는 이름을 떠맡는 것은 과거의 권위에 대한 단순한 종속이 아니다. 그 이름은 이미 과거의 맥락에서 이탈해 자기 정의의노력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상처를 주는 말은 그것이 작동했던 과거의 영토를 파괴하는 재배치 속에서 저항의 도구가 된다.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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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시대의 연애 ㅣ 창비세계문학 64
왕샤오보 지음, 김순진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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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9 저자: 왕샤오보.

문화라는 말이 붙었지만 야만보다 못할 인권 유린이 일어난 시기를 거친 큰 나라가 있었다. 그 시기를 운 좋게 넘어온 사람들 중 심각하고 진지하게 증언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들도 있다. 그 모든 우스꽝스럽고 말도 안 되는 날들을 그저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유머 감각이 있어서 살아남은 것인지, 살았으니 농지거리라도 던져서 과거의 재앙에 침을 뱉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작가의 여러 소설에 왕얼이 등장한다고 한다. ‘황금 시대’는 워밍업처럼, 거칠긴 해도 재미있게 읽었다. 천칭양과 왕얼은 서로 사랑한다 소리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 깊은 우정 어쩌고 하면서 섹스도 하고 같이 도망도 가고 규탄대회에서 잡도리도 당했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최악의 시절을 두 사람이어서 버티고 지나온 게 아닐까 싶었다. 저자는 같은 장면을 찍은 여러 사진을 보여주듯 같은 때 같은 상황이지만 거듭 다시 불러다가 다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걸 다 쳐내면 소설책이 1/3로 줄어서 금방 읽었을 것 같긴 하다. 내가 저렇게 한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하면 글 그따위로 쓰는 거 아니라고 욕을 먹겠지만, 그걸 아예 자기 개성으로 삼는 작가도 있구나 싶었다.

‘혁명시대의 연애’는 서두부터 섹스에 관한 소설! 이렇게 미끼 던져놓고 100쪽 넘게 읽는 동안 아직 그 비슷한 것조차 나오지 않았다. 슬쩍 후반부를 후루룩 넘겨보니 섹스라는 글자가 제법 보인다. 그러니까 지루한 심문 시간을 왕얼처럼 독자도 견디고 나서 옛다 봐라 하는 걸지도. 이 소설은 한 말 또 다시 바꿔하고 또 하고 옛날과 더 옛날을 오락가락 하는 건 앞의 소설과 비슷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3인칭으로 왕얼은- 했다가 1인칭으로 나는- 하고서 그게 자기 실수 아니라 의도한 거라고 그렇게 해야 하는 장면들이 있다고 설명도 해 놨다. 앞의 소설 ‘황금 시대’에서는 왕얼이 반성문으로 야설을 써서 조사관들이 더 구체적으로, 하면서 끝없이 글을 쓰게 했다면 뒤의 소설 ‘혁명시대의 연애’에서는 X하이잉이 보조교육이라는 길고 끝없는 1대1 면담을 하면서 왕얼이 한 잘못을 털어 놓으라고 하는데 왕얼은 자꾸 옛날 이야기를 한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문화대혁명 시기를 골고루 겪은 자신의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기는 너무 근질거렸나보다.
후반부에 성애 장면이 꽤 나오기는 하지만, 그다지 야하진 않고, 왕얼이 거친 ‘혁명시대’에는 뭘하든 그게 밥 먹는 일이든 섹스든 다 이상했다. 제대로 사랑에 빠지는 것조차 어렵게 만드는 흑마법 같은 혁명이라는 결계가 있었다. 더 나이 들어서 옛 사랑 색깔 성씨 대학생과 옛 정부 X하이잉(직장 동료였던 잔빠와 혼인함)과 다시 마주치고 같은 동네에 아무렇지 않게 살게 되는 건 이삼십년 지나면 뭐 그럴 법도 하다. 아내와 유학 생활을 하고 해외 여행을 다니던 추억을 종종 떠올리는 걸 보면 왕얼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것도 같다. 혁명이 왕얼 같은 사람을 만든 건지 혁명시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얼은 자기다움을 지킨 건지 분명하지 않았다.

책표지 홍보 문구를 보면 중국의 카프카는 왜 이렇게 많냐 하다가도 인구 규모로 따지면 뭐 카프카 몇 명 있어도 확률상 이상하지는 않겠다. 중국의 제임스 조이스는 참신하지만 그렇게 갖다 붙이는 건 그다지 납득이 안 되고, 오히려 예전에 얘랑 사랑했는데, 얘랑 잤는데, 지금은 얘랑 사는데, 하는게 허세 빠진 하루키 아닌가 싶었다. 율리시스보다는 이 책이 훨씬 재미있었다.

+밑줄 긋기
-난 사랑을 하고 싶었고, 음식을 먹고 싶었으며, 한순간에 반은 밝고 반은 어둡게 변하는 하늘 위의 구름이 되고 싶었다. 나중에서야 난 삶이란 천천히 망치질을 받는 과정임을 알았다. 사람은 하루하루 늙어가고 욕망도 하루하루 사라져 마지막에는 망치질을 당한 소와 같이 되어버린다. (17, ‘황금 시대’ 중)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난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이 연구소에 있는 사람의 절반은 중국문학이나 철학 등 문과에서 전공을 바꾼 사람들이다. 그리고 절반은 수학이나 물리 등 이과를 전공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줄여서 ‘AI’로 쓴다는 것밖에는 없고, 서로 일치하는 점이 조금도 없다. 그들은 만나기만 하면 논쟁을 벌였는데, 나는 한쪽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나의 의견을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것이 다 맞아요. 듣고 배워야지요. (137,‘혁명시대의 연애‘중. 작가가 1973년 무렵 겪은 생산직 경험으로 1994년에 낸 소설집에 실린 소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2026년에 읽는다. 대체 언제부터 언제까지 문송해야 하는 것이냐…)

-그때는 혁명시대였다. 혁명의 의미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희생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154)

-나에게 혁명시대는 불행복권 시대였다. 다른 사람들이 나보다 더 큰 복권에 당첨되는 것을 볼 때에만 비로소 마음이 기쁠 수 있었다. (192, 차 전복 사고 및 화재로 완전히 바삭 타버린 세 명의 사람을 본 때를 회상하며)

-나꾸러기(241): 겉으로 보기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나이배기)을 낮게 이르는 말.

-난 지금 random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즉 우리는 왜 이 세상 이 장소에 왔는지 알 수 없고, 왜 현재의 일들을 만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으며, 이 모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라는 것이다. (302)

-우리는 원래 전사가 아니라 아이들의 손 안에 있는 진흙 인형이었다. 책상 위에서 진을 치며 전쟁 장면을 구성하다가 갑자기 작은 손에 의해 팔이 떨어지고 다리가 사라지면서 장난감 상자 속에 처박히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의 손 안에 있는 진흙 인형이 된 것은 우리 자신의 책임이 아니다. 난 출생하지도 않았는데 이미 진흙 인형이 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내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주었다. (314)

*제목은 황인찬의 ‘무화과 숲’ 마지막 구절을 뒤집어 빌려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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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ladin.kr/ei/dFrVR

알라딘 한글말 운세 점치기에서 나한테는 야죽야죽을 골라주었다. 뭔가 까인 기분이다. 앞으로는 좀 덜 야죽야죽거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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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6-10-09 19: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꽤 센 거 한방 까였네요.ㅎㅎ

반유행열반인 2026-10-09 20:03   좋아요 0 | URL
이 정도면 간지럽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야죽야죽
 
2024 제1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멜라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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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4
저자: 김멜라 공현진 김기태 김남숙 김지연 성해나 전지영.


현대 소설을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도서관에 들어가서 찾아보니 2024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이 가장 최신호였다. 찾아보니 2025와 2026도 나왔는데 이 도서관에는 들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2024년에 상 탄 소설들을 읽기로 했다.

초반부 소설들은 한 점씩은 나랑 교차할 곳이 있었다. 교사인 사람, 교사였던 사람, 키우던 개를 잃은 사람, 할머니를 잃은 사람...
다만 글 속 인물들은 담담했다. 너무도 담담했다. 격한 감정도 없었다. 자신의 현재에 대체로 만족해 보였다.

후반부 소설들에 등장한 사람들은 에너지가 넘쳤다. 저렇게까지, 할 정도의 행동을 했다. 나는 아마 이런 류의 이런 결말들을 소설의 끝이라고 생각해 왔었다. 지금은 모르겠다.

오랜만에 짧은 소설들을 읽어서 재미있었다. 밑줄 그은 문장은 없었다. 밑줄 그으라고 형광펜 칠한 문장은 한두 개 이상 있어 보였는데 나는 에너지가 없는가 옮겨 적지 않았다. 김멜라와 김지연의 다른 소설들은 읽어 본 적이 있고 나머지 소설가들은 이름만 계속 듣다가 모처럼 읽어볼 기회가 되었다. 더 찾아 읽어 봐야지 하는 소설가는 이번에는 못 찾았다. 재미있었으면 됐다. 2025년과 2026년 작품집은 찾아보게 될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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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의 소실점을 향해 ㅣ 민음의 시 271
양안다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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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02 저자: 양안다.

이 시집 초판은 2020년에 나왔고, 내가 가진 건 5년 후 11쇄이다. 그 사이 56권의 시집이 민음의 시 시리즈에 덧붙었다. 그렇게나 시를 읽는 사람이 많은 게 신기하고, 오래도록 읽히는 시집도 신기하고, 그걸 이제야 보는 나도 신기하다. 이건 8월 읽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였다.

10월이 되었다. 아름답지는 않더라도 느낌이 있는 말들을 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가진 말은 다 천하고 가벼워서 무얼 써도 식상했다. 속상했다. 번뜩인 적이 있었던가 싶지만 이제는 햇빛을 오래 받은 책등처럼 빛깔이 바랬다. 책장은 누렇게 되었다. 손가락으로 쥐고 넘기면 파스라질지도 몰라. 책장이 그대로 먼지가 되거나 재가 된 걸 본 적은 없다. 책 위에 들끓는 먼지다듬이 벌레를 눌러 죽인 적은 많다. 그렇게 벌레만 눌러 죽였다.

두 달이 넘게 읽다 말다 했다. 시 한 편이 너무 길었다. 나는 당신의 말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한 점으로 모이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글자 쥐어지지 않았다. 읽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다. 글자를 눈에다 비볐다. 눈에 묻은 글자가 뇌까지 기어올라가지 못했다. 8권째 양안다의 책이었고 이제는 정말로 그만 읽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끝내 시를 읽을 줄 모른 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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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유년으로 돌아간다면
슬플 때마다 슬프다고 말해야지
싫으면 싫다고 말하고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되어야지(93, ‘우리는 프리즘 속에서 갈라지며(하)’중. 지금 그런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될까.)

-“사람 많은 곳을 걸으면 견디기 힘들어요. 내가 견디려는 건 무엇이죠? 나는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겨우 참아 내요. 상상 속에서 내가 폭발합니다. 파편으로 찢어져요. 다정한 사람이 괜찮냐고 묻더군요. 나는 괜찮아요. 대답하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무작위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166, ‘우울 삽화’ 중. 나는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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