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례기 - 창비장편소설
방영웅 지음 / 창비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260627 저자: 방영웅.


어려서 텔레비전에서 ‘분례기’ 드라마를 봤던 것이 아직도 생각난다. 아이들 볼만한 수위는 아니었다. 그래도 배우들이 연기를 잘했고, 나무 하러 간 분례가 강간 당하고, 노름쟁이 남편에게 폭행 당하고, 미쳐버려 옥화처럼 보퉁이를 든 채 어딘가로 떠나는 장면이 머릿속에 남아 있는데, 책으로 다시 읽어보니 그때 드라마를 꼼꼼하게 다 봤던 모양이다. 찾아보니 드라마가 방영된 시기가 1992년, 국민학교 2학년때인데 그 어린애가 보기엔 좀 충격이었을 것 같다.
1997년에 창비에서 나온 초판을 중고로 샀는데 책이 때도 타고 세게 찍힌 자국도 있고 책장 사이에서 정체 불명의 터럭도 나왔다. 그런데 이야기 결이랑 책 모양새랑 어울렸다. 이야기 속 남자들은 죄 개보다 못한 새끼들이고 여자들은 다양하게 고생을 하다가 죽거나 미쳤다.
슬프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고 허구래도 이런 삶을 산 여자들이 있었대면 미치고 팔짝 뛰겠고 그런데 문장은 또 예쁘게 잘 깎아놔서 재미있었다. 똥 위에서 태어나 평생 똥례라 불리며 살아갈수록 점점 불행으로 흘러드는 삶인데, 그걸 보고 재미있으니 좀 미안하다. 책을 읽으면서 30년도 더 전에 본 드라마가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건 이야기의 힘이겠다.

+밑줄 긋기
-도대체 저것들은 무슨 새일까? 섬삼새, 콩새, 고지새, 방울새, 장박새, 되새, 멧새, 촉새, 무당새, 쑥새…...? (28, 나도 늘 새 이름이 궁금한데 생김새 분간을 잘 못하겠다.)

-찔레는 똥례에게 말한다.
얘, 뭘 죽니. 죽지 마.
찔레가 이렇게 속삭이자 그 주위에 있던 솜나무, 얼레지, 인동, 으름, 놋동이, 때죽나무, 오리나무, 청미래, 가막살나무, 세잎양지, 개서나무, 매자나무, 층층나무, 대사초, 고로쇠나무 등이 덩달아 똑같은 말을 하고 있다.
찔레 말이 옳어. 죽긴 왜 죽니, 이팔청춘에…(120, 나무 이름은 익어도 나무의 모습이 어떤지 떠올릴 줄 모른다. 새도 나무도 잘 모르고, 모른다고만 하고 게으르다.)

-“지난 겨울에 졌던 꽃이 지금 또다시 폈잖어. 그러니께…”
똥례는 그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린다. (122, 연쇄 강간범 용팔이가 똥례한테 건넨 말인데 그냥 확 용팔이놈은 가새바위에서 떠밀어버리고 싶다.)

-“돈 있다고 그런 디다 쓰면 어떡해유. 그러니께 우리가 이렇게 못산다 말유.”(170, 우동 사 먹고 밥집에서 옷 갈아입고 시집 가라는 걸 분례는 굳이 상엿집 안에서 갈아입고 가겠다고 한다. 남들 눈에 띌 새라 몰래 n번째 부인 되러 가는 길이 서러운 줄도 모른다.)

-봄이 되어 그런지 기운이 하나도 없다. 아니 답답하다. 방안은 똥이 가득 찬 똥독 같은 생각이 들고 누가 똥바가지로 똥독 속에 든 자신을 꾹 누르는 것 같다. (197, 평생 똥이라 불려온 여자가 기분마저 똥통 빠진 것 같다니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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