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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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6 황정은.

종일 비가 내렸다. 밤이 되어도 내린다. 보름이지만 둥그런 달은 볼 수 없다. 보이지 않아도 달이 뜨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빗물 위에, 구름 위에 열심히 빛을 반사하고 있다. 1997년 추석에는 개기월식이 있었다. 외할머니댁 마당에 자리 잡고 앉아 기다렸다. 언제 가려져? 하다가 잠시 졸다 깨보니 벌써 이만큼 그림자가 달을 가렸다. 지구 그림자에 가리나, 구름에 가리나, 달은 그대로인데 우리는 어떤 때는 가리기를 기대하고, 어떨 때는 가리는 걸 아쉬워 한다.

우리 엄마도 나를 가졌을 때 달꿈을 꾸었다 하는데, 소설 속 나나는 태몽을 아주 많이 꾸고 커다란 달이 창에 가득차는 꿈도 꾼다. 추석날 이 소설을 읽으니 소설이 대신 달도 보고, 성묘도 가고, 제사도 지낸다. 아직은 가까운 누군가 죽음으로 떠나간 경험이 없고,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듣길 바랄 만큼 못 만나 그리운 이도 없다. 황정은 소설은 5년 전에 연년세세를 마지막으로 읽었는데, 이 소설에도 순자씨가 나오고, 외진 곳에 있는 외할아버지의 묘를 찾는 어머니가 나오고(그것도 순자씨), 진짜 혈연은 아니지만 너무도 다정한 오누이 같은 세 사람, 나비바, 소라, 나나, 나기가 나온다. 소라랑 나나는 진짜 자매이긴 하다. 나는 내 동생과 사이가 좋지 않고, 서로 애틋하지도 않고, 명절이라고 서로 만나지도 않고, 뭐 그래서 자매끼리 왕래하고 친한 남들을 보면 신기하다. 우리가 별난 거겠지. 우연히 이웃이 되었다가 나이를 먹도록 서로 챙겨주고 친한 셋이 역시나 신기하고 부럽다. 나나의 사랑도, 나기의 사랑도 그렇게 좋은 것은 못 된다. 밀어내야 하거나, 계속 불러도 답이 없는 사랑은 그것도 사랑이겠지만 고통이 크고 행복하고는 멀어지니까.

꽂혀 있는 걸 보고 오래 내버려둔 게 눈에 걸려서 읽었는데 왜 읽었는지 모르겠다. 달 보는 대신이었던 같다. 그리고 나는 계속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누구에게든 말해주고 싶다.

+밑줄 긋기
-뭘 하며 걸었어?
라고 내가 물은 적이 있었다.
애자는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야기했지, 라고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느 것 하나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끝없이, 끝없이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고도 기억나는 것이 없느냐고 재차 묻자 그건 말이지, 라고 애자는 말했다.
너무 소중하게 너무 열심히 들어서 기억에 남지 않고 몸이 되어 버린 거야.
몸?
들었다기보다는 먹은 거야.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남김없이 먹고 마셔서, 일체가 되어버린 거야. (9, 몸이 된 이야기들.)

-있지 인간이 조그만 덩어리도 되지 못하고 부서지고 흩어진 채로 형체도 없이 다만 한줌 무더기가 되고 말 때 그럴 때 인간은 어디에 있다고 해야 좋으니? 무엇으로 있다고 해야 좋으니? 어디가 어디라는 구별이 완전히 사라지고 내가 만졌던 목, 내가 매달렸던 어깨, 내가 만졌던 팔꿈치, 내가 들여다봤던 눈, 둥근 턱, 내가 쓰다듬었던, 따뜻한 머리, 내 이름을 부르고 너희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내던 몸, 생각하고 기억하고 감각하던, 내 사랑, 그 사랑의 몸, 그 몸이 도저히 몸일 수는 없는 형태로 흘러내렸을 때, 그럴 때 그는 어디에 있니?
영혼은 어디에 있니?
어디에 있다고 믿어야 좋으니? (26, 쇳물, 반죽, 무더기, 어쩌면 덩어리가 된 몸. 죽음을 너무 홀가분하게 생각하지 말아야겠어.)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187)

-공룡이 사라졌잖아.
어.
멸종했잖아.
멸종했지.
멸종이라서 한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지만 실은 천만년이 걸렸대.
그랬대?
천만년에 걸쳐 서서히 사라진 거야.
꽤 기네.
길지.
…...
그렇게 금방 망하지 않아.
세계는, 하고 덧붙이자 나나가 말했다.
그렇게 길게 망해가면 고통스럽지 않을까.
단번에 망하는 게 좋아?
아니.
그럼 길게 망해가자.
망해야 돼?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겠다는 얘기야. (221-222)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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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열심히 대충 쓰는 사람 - 브로콜리너마저 덕원의 가사, 노래, 글을 짓는 마음가짐
윤덕원 지음 / 세미콜론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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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5 윤덕원.

윤덕원의 노랫말을 좋아했다. 좋아한다, 라고 하지 않는 건 김미월 선생님의 소설에서 고백은 과거형으로 하라고 하셔서 그냥 한 번 해 봤다.
머리를 긁적이며 학생회관의 밀크셰이크를 들고 멀어지는 뒷모습, 민중가요 노래책 한 페이지에 아침 면도로 벤 자리에 붙였던 걸 옮겨 붙인 지저분한 반창고(하필이면 아침이슬에다), 빡빡이 머리를 하고 잔뜩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밥도 안 먹고 시무룩하게 앉아있던 구석 자리…
적어두지 않아도 휘발되지 않던 주변 이들에 대한 어떤 기억들이 너무 많았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내 지인들은 자기 동생 이름이나 생일까지 외우고 있는 나를 파묻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흑역사 녹음기 같은 넌 죽어라, 하고.

그런 반짝이는 기억력은 유효기간이 있었다. 흐릿하고 희미해진 걸 깨닫고 나서야 아 내가 뭘 잃었구나, 잊었구나 싶었다. 그나마 적어둔 흔적들을 찾았을 때, 내게 이런 일과 기분이 있었구나, 그러고는 또 잊는다.

아마도 잊을 건 다 잊고, 나머지를 잊지 않으려고 적어둔 일기 같은 글들이어서 생각보다 잘 읽혔다. 노래를 쓰고 글을 쓰고 그걸 입에 올리는 사람의 글과 생각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제목의 대충은 어떤 다짐 같이 느껴졌다. 완벽할 필요 없다고 스스로를, 읽는 이들을 다독이는 말로 대충을 써 먹을 수도 있구나. 계속 쓰고 부르는 사람으로 삶을 이어가는 게 존경스럽고, 앞으로도 오래 그런 사람으로 잘 해내가길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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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세심하게 글을 다듬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되 읽을 만한 글도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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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때로 기억은 엄청나게 힘이 강하기도 하잖아? 그때를 증명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도 누군가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떠오르는 일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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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이라도 어색할 수 있는 표현을 곱씹어보고, 다른 입장에서 어떻게 들릴지 예상해서 뺄 수 있는 표현을 최대한 삭제한다. 함량 미달의 단어를 더 채워 넣느니 차라리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사의 밀도를 높인다. 노래가 일종의 기원이나 주문(呪文)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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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이 저의 마지막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끝은 차라리 아름답다. 그러기 쉽지 않은 것이 문제다. 더 해보기 위해서가 아닌 마무리하기 위해 남은 역량을 투입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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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울림을 지닌 단어는 많지만 노래에 담고자 하는 의미는 필연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움츠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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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그러지 못하게 되었다. 변명만 늘어놓고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은 영영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었던 다른 가능성을 파괴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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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더 좋은 결과물을 얻고 싶다는 순수한 욕심에서 새로운 장비와 악기를 사기 시작했더라도 어느 시점 이후에는 더 비싸고 좋은지와는 별개로 나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해지는 것 같다. 언제나처럼 반복되는 작업과 연습 과정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쳐갈 때, 새롭게 만난 매력적인 기기들과 친해지는 과정은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꼭 필요하지 않은 악기를 살 때도 많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어떤 기타를 구매해야 하나요?” 하는 질문에 “모양이 마음에 드는 것을 사세요.”라고 답하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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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둥글게 말아서 비닐 포장을 뜯어낼 때 나는 새 책 냄새를 맡으면 아무리 울적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최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일상에 이런 확정적인 행복이 주기적으로 있으면 빡빡한 날들을 버티는 데 큰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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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코딩을 하면서 마이크를 자주 다뤄본 경험은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이 되었다.(가창력과는 상관없다…….) 마이크의 작동 방식이나 원리를 안다면 같은 환경에서도 더 좋은 소리를 입력할 수 있다. 녹음할 때 얼굴을 어느 위치로 이동하면 목소리 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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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하지 않은 채로 발표된 노래가 계속해서 불러주는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것처럼, 조금 느슨한 마음으로 오래 곁을 지켜 서서히 완성하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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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
주디스 버틀러 지음, 윤조원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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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004 주디스 버틀러.

이 책을 읽는 동안 가끔은 서럽고 속이 터졌지만, 자주 시원하고 또 기뻤다. 5년 전 ‘권력의 정신적 삶’을 읽어 보려고 두 번쯤 도전했지만 서문에서 아...한국 글자인데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하고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차성, 퀴어, 돌봄, 온갖 책에서 버틀러 선생님의 이름이 출몰하고, 난 늘 여기서 얻어갈 게 많아 보이지만 다가가지 못하던 것이다. 그냥 저자의 책이 보이면 모아가다가, 버틀러 선생님과 보름스 선생님의 얇지만 가볍지 않은 대담집을 각잡고 읽었다. 오, ‘젠더 트러블‘을 언젠가는 읽겠지만 두꺼우니까 가장 나중에 만나죠...하다가 신간으로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가 번역되어 나온 걸 보고 일단 사 놓자, 하던게 일단 이걸 읽자, 가 되었다. 다행히도 이 책에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특별히 못 알아 먹을 건 없었다. 그래서 기뻤던 것이다.

제목의 어미를 왜 굳이~랴, 로 했을지 궁금했다.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겠는가?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는가?
누가 젠더를 두려워할까?
아무래도 첫번째에 가까운 어감인데, 그럼 아무도 젠더를 두려워하지 않아! 이런 느낌이라 또 Who‘s afraid of gender? 하는 말이 정말 그런 의미인가, 싶다. 누가 젠더에 겁먹었나? 누가 젠더란 말에 쫄았냐? 이거랑은 또 다른 것 같은데, 그럼 왜 젠더에 겁먹고 그래? 이러면 후가 와이가 된다고 누가 뭐라할 수도 있겠고...일단 제목만 봤기 때문에 더 읽어 보고 찾아가기로 한다.
...하고는, 성질 급하게 챗놈에게 질문해 보니 이렇게 말하대.
Q.주디스버틀러의 who‘s afraid of gender를 한국어판은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로 번역해 놨어. 한국어 뜻대로라면 ‘아무도 젠더를 두려워할리가 없다.’ 이런 느낌이 강한데 저 영어 표현을 그렇게 번역하는게 맞나 싶네

A.좋은 지적이야. 영어 원제 *Who’s Afraid of Gender?*는 사실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특정한 뉘앙스를 품고 있어.
1. 원문 표현의 배경
○ 이건 에드워드 올비의 희곡 *Who’s Afraid of Virginia Woolf?*를 패러디한 구조야. 원래 제목 자체가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냐?“가 아니라 사실상 “겁나지 않냐?” “무섭지 않냐?“라는 도발적 수사야. 즉, ‘두려워하는 자들이 많다’는 걸 전제하고 묻는 표현이야.
○ 영어에서 *Who’s afraid of X?*는 그냥 “X가 무섭냐?” 정도의 뉘앙스가 아니라, 대체로 “X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풍자하거나 폭로하는 질문”으로 쓰여.
2. 한국어 번역의 문제
○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라고 번역하면 고전 한문투 수사처럼 들리고, 말 그대로 해석하면 “아무도 젠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뉘앙스가 강해져.
○ 그런데 버틀러의 문제의식은 정반대야. 실제로 많은 집단과 권력이 ‘젠더’를 두려워한다는 걸 지적하는 거니까.
3. 더 자연스러운 번역 후보
○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는가?” (중립적이면서도 질문 그대로 살아있음)
○ “젠더가 뭐가 두렵다고?” (조금 더 도발적이고 구어체, 원문의 풍자성 반영)
○ “젠더가 두렵니?” 혹은 “누가 젠더를 무서워하나?” (비꼬는 뉘앙스 유지)
즉, *‘누가 젠더를 두려워하랴’*는 국문학적 전통의 수사로 멋은 있어도, 원래 영어의 아이러니·풍자를 제대로 살리진 못한 셈이야.

챗놈도 나랑 동조하듯이 말을 했지만, 짜식이 제법 뉘앙스도 따지네, 싶지만 영어 잘 모르는 나놈이라 나 역시 뉘앙스 따지면서도 사실 잘 몰라서 그냥 좀 이상한 느낌적 느낌이야...하고 일단 더 읽어 보기로 했다.

젠더를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 취급하며 이것이 많은 전통과 가치를 파괴하고 평범한 삶을 위협할 것처럼 설파하는 종교권력, 정치권력(특히 권위주의, 파시즘 정권), 같이 연대해도 화력 딸릴 판에 젠더에 관한한 우익들의 관점에 동조하여 트랜스를 배제하는 페미니스트 일부 등, 버틀러 선생님은 젠더에 대한 부당한 비판을 하는 세력들에 대해 반박을 하고 사정없이 깐다. 읽다보면 반복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하여간에 방패로 얍얍 막고, 잘못된 부분, 엉뚱한 공격들을 낱낱이 팬다.
이렇게 열심이시면 나쁜 애들이 막 괴롭히면 어떡해요...걱정한대로 버틀러 선생님이 강연을 가는 곳마다 위협하고 해를 가하려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던 상황을 서술해 놨고, 옮긴이도 한국에서 반대 세력들이 아예 강연을 무산시키려는 시도를 하는 것을 어렵게 피해가며 내한 강연을 성사시킨 일화를 소개한다. 저야 방구석 키보드 까돌이로 종알거려도 작은 목소리라 공사다망한 바쁘신 분들이 별로 찾지 않지만(그래서 다행이지만, 그래도 몇 년에 한 번은 쳐맞기도 해요), 계속 저술과 대담과 강연을 통해 잘못된 공격들에 대항하는 선생님이 존경스럽고 생각을 정리해주는 인용과 논리도 많이 풀어주셔서 감사하게 느꼈다.

무엇이 옳다, 무엇이 바뀌어야 한다, 외부 세계를 변화시키기 이전에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에 대해 당연시 하던 가정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게 먼저가 아닐까, 생각했다. 젠더를 통해 내가 나로 사는 꿈을 꾸는 사람들을 위협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스스로 많이 해보지 못한 게 아닐까 싶었다.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을 의심하고 정말 그런가 질문해 보는 건, 어쩌면 삶을 지탱하고 일관되게 하던 무언가를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해 돌아보고, 또 내가 누군가를 괴롭히고 있던 걸 깨닫고 멈출 수 있다면, 나 자신도, 세상도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나는 너무 나는 개새끼야...하면서 쟤들도 개만도 못한 새끼야...를 자주하는데, 나에 대해서도, 남들에 대해서도 쟤들이 제대로 누리지 못한 권리는 뭘까, 저나름대로 고통을 겪는 이유는 뭘까, 어떻게 하면 덜 괴로울까, 생각하고 좀 덜 까고 좀 더 가여워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데 또 싸울 땐 싸워야 해서, 선생님도 열심히 싸우고 계시지만 어쩌죠 저는…못난 저는 일단은 제가 누군지 왜 괴로운지 조금만 더 고민할게요…

그래서 제목 번역에 대한 의문은 읽고 나니 조금은 해소가 된 느낌이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처럼 ’젠더를 증오한 세력들-사실 두려워서 자꾸 엉뚱하게 까는 놈들‘ 쯤이 핵심이 되겠다. 이렇게 보면 한국어 제목에 대한 불만은 조금 더 커지는데… 덕분에 한국어 독자가 될 수 있었던 은덕이 있으니 쪼그만 저의 불만이야 어쩔 수 없습죠...

+밑줄 긋기
-사실 우리는 그러한 명명의 관행이 요구하는 바에 부응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고, 그 ‘실패’가 결국 해방이 될 수도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비판 능력은 필연적으로 나쁜 주체 혹은 망가진 주체의 입장에 뿌리를 둔다. 즉 망가진 주체로서의 우리는 개체화를 통치하는 규범들에 근접하지 못한 사람으로서 우리 자신이 양육되고 형성된 방식에서 벗어나는 난감한 입장에 놓여 나름의 방식으로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새롭게 사유하면서, 출생시 지정된 성별이 흔히 의미하는 기대에 온전히 부합하지 않는 사람이 된다. (26)

-어떤 쪽이든 관련자들이 논쟁에 부쳐진 자료를 읽지 않는다면 정보에 입각한 공적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읽는 행위는 단지 취미나 사치가 아니라 민주적 삶의 필수 조건으로서 논쟁과 의견 차이를 근거 있는 것, 주제에 집중된 것, 생산적인 것이 되게 하는 실천이다. (32, 그니까 별점 1점 테러를 할 거면 끝까지 읽고 하란 말이야… 나도 욕하기 전에 일단 꾸역꾸역 참고 다 읽는다고… 그 정도 성의는 보이자고...안 읽고 달려들면 그냥 갑작스러운 침입자, 난동꾼이지 뭐.)

-나의 질문이 바로 다음과 같다는 점은 명확하기를 바란다. (이 앞문장 번역이 조금 이상하다.) 젠더는 어떤 종류의 판타즘이 되었으며, 어떤 불안과 두려움과 혐오를 규합하고 동원하는가? (57)

-사실 젠더는 우리 자신이 누구며 어떻게 욕망하고 사랑하는지를 우리가 각자 선택한다고 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젠더가[내제된 선천적 속성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명제 역시 젠더에 대한 한가지 이론이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에 대한 오랜 논쟁은 젠더 이론 안에서도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여기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선택의 문제인지,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따라 살아갈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지의 문제는 별개의 사안이다. (67)

-이러한 연상 작용의 사슬은 그냥 흐지부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응축되어 식별 가능한 위험 영역이 되고, 이러한 도식들에 따르면 그런 위험은 트랜스인 사람, 퀴어한 사람, 페미니스트, 게이, 레즈비언인 사람, 이주민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려야만 막아낼 수 있다. 그러한 담론은 해악을 막는다고 우기는 가운데서 엄청난 해악을 끼치는데, 스스로가 초래하는 해악을 해악에 대한 방어라고 우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동어반복은 강렬하고 효과적이며, 이성적 사고인 양 작동한다. 현재 이러한 논리에 따라 유해한 집단으로 몰려 표적이 된 여러 취약한 공동체는 배제, 범죄화, 병리화, 재생산 자유와 젠더 자기정체화를 포함한 여러 기본적 자유의 상실 같은 위협에 직면해 있다. 권리를 박탈하는 그러한 전략들은 파시즘의 역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전략은 세계를 위태롭게 만들었다고 누명을 쓴 공동체들의 취약성을 더욱 심화한다. 그런 전략은 취약한 공동체들을 파멸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파괴가 더욱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파괴함으로써 파멸을 막겠다고 허울좋게 약속한다. 그런 전략은 취약한 공동체들과 그들의 정치적 요구가 파괴적 세력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이야말로 파괴적 힘을 타자의 형태로 외부화해서 파괴적 힘을 동원한다. 사실상 그들으느 파괴의 대상을 파괴의 원인이라고 바꿔 부르면서 파시즘을 이 시대의 브랜드로 다시 만들어낸다. (86, 살려줘 이놈들아… 무해한 존재들을 유해, 유독하다고 뒤집어 씌워서 팡팡 두들겨패서 절멸시키려는 무서운 손길이 사실은 겁에 질린 평범한 이웃들…)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 윤석열이 말했듯이, 여성들은 예속 상태에서 결코 불만이 없었고, 그가 보기에 폭력. 괴롭힘, 임금 불평등에 대한 오늘날 여성들의 불만은 ‘외부’와 ‘다른 어딘가’에서 유래한 발상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이로써 급성장하는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은 무효가 된다. 예측대로 그는 당선 후에 정부산하 여성가족부의 해체를 추진했다. (100, 야… 왜 내가 창피하냐… 나 불만 많은데)

-이미 두려움을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두려워할 것이 더 많고 그 두려움의 근원을 찾아 이름을 붙일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이름은 지금 진행중인 궁극적 파괴의 ‘원인’, 즉 뿌리 뽑아 추방해야 할 대상의 역할을 하면서 수많은 모순을 억누르고 무력화한다. (106)

-스스로 아동을 학대한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는 아동 학대의 원인을 외부로 돌리고, 대체로 동의라는 문제를 신중하게 받아들여 상호동의에 따른 성인 간의 행위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옹호하며 거리에서 사회적 자유를 위해 싸워온 성소수자 및 젠더소수자들을 탓한다. 그렇게 교회는 자신이 이러한 반대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지위를 상실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교회는 자신의 범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기 위해 자신이 저지른 학대의 역사라는 망령을 외부화하여 성소수자 및 젠더소수자에게 투사함으로써 막심한 규모의 도덕적 오류를 범한다. (128-129, 선생님 살살. 바티칸 개뚜드려팸)

-사랑하는 방식과 해를 끼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 해를 끼치지 않는데도 다른 사람의 사랑하는 방식을 제한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해롭다. “해를 끼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틀림없이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텐데, 그렇다면 그 의미를 미리 정해 지시하기보다는 공개적으로 그에 대해 토론하자. 하지만 토론은 없다. 도그마가 토론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도그마라고는 하지만 어쩌면 이데올로기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도덕적 의로움을 자처하며 공포심 조장을 위해 합리적인 도덕적 논쟁을 거부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판타즘과 그것의 재생산 메커니즘을 폭로해야 하고, 페미니즘 및 LGBTQIA+의 인권과 자유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어떤 처벌도 없이 계속 해를 끼치기 위해 자신들이 저지르는 해악을 외부화하는 방식을 드러내야 한다. (132)

-퀴어한 삶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이미 퀴어한 삶을 생각해본 것이기에, 그것을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려는 그들의 노력은 늘 고단하고 반복적이다. (136)

-법은 학대에 반대하는 것을 학대라고 지목함으로써 학대를 행할 수 있다. 법은 공격당하는 삶이 가족제도를 공격한다고 상상함으로써 그 삶을 공격할 수 있다. 어떤 삶이 다른 삶을 좀먹고 파괴한다고 여겨 그 삶이 치명적인 폭력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것을 법이 정당화한다면, 그 법은 살인을 저지르거나 죽음을 묵인할 수도 있다. (139, 매우...보호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들에 대한 폭로가 두려움을 조장하기도 한다.)

-아이들이 무언가에 대해 읽으면 그런 존재가 된다고 가정하는 것인가? 독서와 책에 도대체 어떤 기이한 힘이 있다고 보는 것인가? 검열은 이렇게 검열이 두려워하는 단어의 과도한 이행력에 대한 믿음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낸다. 즉 그런 단어는 분명 굉장한 흥분과 변화를 유발하므로 어린아이 근처에도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어 자체가 암묵적으로 모집책이자 성추행범으로 간주된다. 바로 그래서 그 단어의 거대하고 파괴적인 효과를 저지하기 위해 교실에서 이를 제거해야 한다. 이러한 두려움을 부추긴 결과, 사람들을 직위에서 해고하는 일,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고 듣고 가르칠 수 있는지를 제한하는 일, 위험한 주제 같은 사안을 감히 입 밖에 내는 교사, 행정가, 예술가에게 오명을 씌우는 일이 용인된다. 이러한 행동들은 본격적인 파시즘은 아닐지라도 파시즘의 명백한 요소이며, 그런 일들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계속된다면 미래가 암울해진다. (145-146, 내가 사드를 읽었다고 막 죽이고 강간하고 똥 먹고 그러진 않아...)

-교육과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 이런 종류의 결핍은 정신적 손상을 초래하고, 삶이 그 자체로 벗어나야 할 일종의 피해가 되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만약 퀴어한 아이나 트랜스인 아이가 살고자 한다면, 태어날 때 남자로 지정된 소녀가 자신에 대한 젠더 기대치를 바꾸고자 한다면, 태어날 때 여자로 지정된 소년이 자신의 삶을 긍정하려 한다면, 그런데 이러한 삶을 긍정하는 언어나 공동체가 없다면, 그들은 인간 공동체에서 폐기물로 내쳐지게 되고 그들의 섹슈얼리티와 젠더는 발화 불가능한 것이 된다. 법이나 교리로 뒷받침되는 이성애 규범성은 의무가 되어 사유 가능성의 지평, 상상 가능성의 한계, 그리고 살아갈 만한 삶의 경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과제는 바로 어떻게 하면 폭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숨쉬고 사랑하며 움직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방식으로 타인과 함께하는 삶을 살 것인가다. (162, 이 부분에서 너무 묵직하고 아프고 삶이 그 자체로 벗어나야 할 일종의 피해가 되던 어린 날이 생각나고, 비슷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아이들이 내곁에 너무나 많아서,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적어서 고통스러운 날들이다.)

-좋든 싫든, 광범위하게 다양한 입장들이 ‘페미니즘적’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검열과 권리 박탈을 목적으로 하는 어느 한 분파가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게 허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페미니즘과 젠더가 대립하듯 행동한다면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가 제안하는 조건들을 수용하는 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페미니즘 전체를 대변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럴 수 없어야 마땅하다. 그들의 입장은 트랜스인 사람들의 비실재화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페미니즘이 투쟁 목표로 삼아온 평등에 대한 헌신에 반하는 여러 형태의 차별에 동참하는 부류의 페미니즘이다. 그러므로 트랜스혐오 페미니즘은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는 편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사실인즉, 트랜스혐오 페미니즘이 페미니즘이어서는 안 된다.
이 논쟁이 대중적으로 펼쳐지면서 트랜스인 사람들 다수와 그 지지자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사실, 그리고 트랜스 배제적 입장이 차별의 한 형태라는 사실이 종종 간과된다. 트랜스 배제적 입장의 옹호자들은 자신이 그런 차별을 당한다면 강력하게 거부할 것이다. (211-212, 주디스 버틀러 선생님 노빠꾸로 확 질러 버리셔서 저는 시원- )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은 트랜스인 사람들의 삶이 실재임을 부정하면서 젠더 범주, 특히 여성이라는 범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하지만 젠더 범주는 소유물이 아니며 소유될 수도 없다. 젠더 범주는 우리 개인의 삶에 선행하고 또 개인의 삶을 초과하는 것이다. 범주는 살아 있는 생물체인 우리와 다른 사회적, 역사적 삶을 가지고 있다. 범주는 우리 개인들보다 먼저 존재해온 것으로서, 우리가 대부분 그랬듯이 이름을 부여받고 성별을 지정받을 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어떤 젠더로 호명되면 그렇게 호명되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게 되고, 만일 우리가 자신을 다르게 호명한다면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닌 역사를 가진 또다른 범주로 이동하게 된다. 젠더 범주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며, 페미니즘은 항상 젠더 범주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는 특성에 근거하여 여성과 남성을 정의하고 대우하는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젠더가 시대를 초월하는 범주라면 재정의될 수 없을 것이며, 이는 ‘여성’이라는 범주가 한때 무엇을의미했건 간에 영원히 그대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과 역사는 모두 쓰레기통에 던져질 것이다. 조앤 W.스콧이 1988년에 제시한 설명은 여전히 매우 유용하다. “‘남성’과 ‘여성’은 내용이 없는 동시에 과잉인 범주다. 내용이 없는 이유는 그것들이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의미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과잉인 이유는 그것들의 의미가 고정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여전히 대안적인 정의, 부정당한 정의 또는 억압된 정의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212-213, 선생님 전 자꾸만 무릎 치기엔 아파서 그저 베껴 쓰게 되고요…)

-사람들은 스스로 어떤 젠더를 자신의 젠더로 삼을 수 있지만, 그 젠더는 이미 본질적으로 그 사람의 소유나 통제를 초과한다. “나는 여성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들지 않은 범주를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소유의 논리를 초월해서 발생하는 일인데도, 우리는 그것을 우리 소유로 만들려 한다. (225)

-트랜스인 사람들에 관한 한 터프는 이들의 자기결정권, 자유와 자율성,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 공공장소와 의료 서비스에 차별 없이 접근할 권리에 대한 기본적인 주장에 반대한다. 터프가 반대하는 이 모든 것은 페미니스트로서 그들이 싸워 지켜야 할 권리이며,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그들 역시 이 권리에 의지한다. 이처럼 실존 자체를 무효화하는 시도에 직면한 사람들이 때때로 비명을 지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29, 억압과 혐오에 고통받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억압하고 혐오하며 부정하게 만드는 근원은 무얼까 늘 궁금하다. 타자화, 이방인화 말고는 모르겠네… 그건 인종, 계층, 계급, 거주지, 출신지역에 대한 구획 짓기랑도 비슷해 보인다.)

-스톡은 어느 인터뷰에서 신경과학을 거론하면서 두 개의 성별에 대한 지각이야말로 그저 두뇌의 당연한 작용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몰랐는데 말이다. (아 ㅋㅋㅋㅋ) 그렇기 때문에 스톡의 주장에 따르면, 태어날 때 어떤 성별로 지정된 사람이 살면서 체험한 젠더를 근거로 다른 성별 지정을 선택할 수 있음을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면, 이는 사실 혹은 진정한 실재에 대한 어린이들의 지각을 잠재적으로 왜곡하는 일, 즉 어린이들을 해치는 일이다. (231, 나는 부모가 자신들의 불행을 끝없이 모르게 하려는 시도들, 은폐들 때문에 불안 수치 최고 각성 수치 최최고의 어른이로 자랐는데 말이다… 모르면 없는 게 되는 것처럼 눈가리는 어른들이 더 학대 아니냐…)

-당신이 유대인인데 누군가가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당신이 레즈비언인데 누군가가 당신의 면전에서 히죽거리며 당신이 헷갈려서 그렇지 실은 이성애자라고 말한다고 상상해보자. 당신이 흑인인데 누군가가 당신은 백인이라고, 혹은 표면적으로 인종 문제를 벗어난 이 세상에서 당신은 인종화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또는 당신이 팔레스타인 사람인데 누군가가 당신에게 팔레스타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고 상상해보자(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 당신이 누구이며 그 무엇인지 아닌지를 말할 권리가 있다는 사람들, 당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당신 자신의 정의를 무시하는 사람들, 자기결정권은 당신이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는 사람들, 당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이름과 성별, 당신이 결국 도달하게 된 이름과 성별로 당신을 기꺼이 인정하기 전에 당신에게 의료적, 정신의학적 검사 또는 강제적 외과 수술을 받게 하려는 이 사람들은 대체 누구인가? 그들이 당신에게 부여한 정의는 일종의 삭제이고, 당신을 정의하는 그들의 권리는 당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어떤 언어가 당신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지를 결정할 당신의 그 어떤 권리보다 분명 더 중요한 모양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존재 사실을 알리기 위해 분투하는 다른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에게서,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범주의 효용을 부정하는 그런 사람에게서 한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동맹하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이 공적 담론을 지휘하고 희생자의 위치를 독점하는 권력을 가진다면, 그리고 그들이 당신의 기본권을 부정하려 한다면, 아마도 어느 시점에서 당신은 분노를 느끼고 표출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행위의 타당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232-233, 젠더 감수성으론 개빻긴 했지만, 마르케스가 백년의 고독에 마콘도에서 바나나 농업 노동자들의 대학살은 없었다, 하고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가 겪은 것을 모두가 부정하는 장면을 그려둔 걸 생각하면 어떤 느낌인지 좀 와 닿는다)

-흔히 ‘젠더’는 ‘남성’과 ‘여성’의 의미를 고정된 것으로 여기는 어떤 도식적 혹은 방법론적 접근을 가리킨다. 이때의 요점은 상이한 역할에 대한 기술이지 그 역할들에 대한 심문이 아니다. 나는 젠더가 이러한 접근법을 넘어서서 성별화된 몸의 의미가 어떻게 상호관련성 속에서 생산되는지, 그러한 의미들이 어떻게 배치되고 변화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사유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계속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여성과 남성에게 지정된 역할이 아니라 성차의 구성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283, 조앤W.스콧의 설명을 다시 인용)

-젠더는 단순히 지정되는 것이 아니다. 젠더는 실현되거나 착수되거나 행해져야 하며, 단 하나의 행위로 완성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되고자 했던 젠더를 마침내 이룩했을까, 아니면 되기의 과정이 문제의 핵심으로서 젠더 젠더 자체의 시간성을 말해주는가? (306, 주디스 버틀러 선생님의 주장에 따르면 젠더는 명사 아닌 동사. 그럼 젠더링…해야 할까.)

-이분법적 젠더를 대체하는 지역 고유의 방식들이 확실히 존재해왔고 또 지금도 존재한다면, 그러한 사실은 서구의 담론이-혹은 다른 어떤 ‘외래적’덧씌우기가-그런 삶과 욕망의 방식을 생산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방식을 위한 어휘를 만들어냈을 뿐임을 의미한다. 그런 [서구적]어휘들의 보편성은 도전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그런 어휘들이 지닌 소멸의 힘은 밝혀져야 한다. 인종주의적 이민정책, 식민주의적 전쟁, 토착민과 침략당한 민족들에 대한 인권 박탈 행위 등의 문제를 회피하는 방편으로 게이, 레즈비언 인권 현황을 홍보하고자 하는 조직과 국가가 ‘젠더’라는 말을 선취할 때 제국주의적인 움직임이 발생한다. 우리에게 이런 동맹들은 필요하지 않다. (357)

-젠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젠더가 자유에 대한 약속을 제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팽창하는 국가권력이 허용하거나 강제하는 문제들, 즉 공포와 차별, 동성애혐오적 폭력과 살인, 여성 살해, 감금, 공적 생활의 제한, 결함이 있는 의료 서비스로부터의 자유다. 정책, 정당 강령, 검열 안에 들어앉은 이러한 유해한 판타즘을 물리치기 위한 연대와 힘 기르기의 비전을 창조하는 작업예 예술가들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며, 누구도 주도하지 않은 집결에서 나오는 상상이 그 비전이다. 이미 존재하는 그러한 집결은 폭력을 비롯한 국가권력을 사용해 반동적 정치를 강요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약속을 품고 있으리라. (371, 쟤네들 쫄아서 그래. 그러니까 삭제에 저항하는 존재들은 쫄지 말고 말하고 번역하고 비판하고 요구하자.)

-그러나 트랜스인 사람들이 스스로 지정할 성별을 가질 권리를 부정하라는 요구는 판타즘적 시나리오 안에서 전도되어, 그러한 권리를 허용하면 도리어 [성별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는 결과를 수반한다는 생각을 만들어낸다. 여기서 우파는 트랜스 배제적 페미니스트들과 한 가지 가정을 공유한다. 즉 성별은 개인이 배타적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소유물이며, 성별을 소유 개념으로 보는 이러한 틀에 도전하는 모든 시도는 자신의 정당한 몫이 아닌 것을 훔치거나 전유하려는 사람들의 책략이라는 가정이다. (387-388, 책의 많은 부분에서 주디스 버틀러 선생님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나는 이런 부분을 읽을 때마다 비둘기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대자보 써 붙인 언니들이랑 자살한 트랜스인 사람들 여럿이 겹쳐 보이면서 마구 서러워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존재할 이유가 없는 금기들이 해제되면 절제되지 않은 섹슈얼리티가 거기서 물밀듯 쏟아져나오지 않을까 우려한다. 이처럼 하나의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미끄러지듯 넘어가는 방식은 판타즘적 장면의 환유에 속하는 것으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보다 연상작용을 우선시한다. 두려움은 하나의 금기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나와 다른 금기로 이동하면서 성적 상상력의 봇물을 터뜨려 무시무시한 망령을 만들어내고, 마침내 완전히 무법적인 섹슈얼리티 또는 고삐 풀린 권리 의식이 모든 사회적 유대를 파괴할 것이라고 상상하게 된다. (389, 불안, 과대망상, 투사, 종말론적 한탄, 많은 다른 존재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들은 그 나름대로 고통받으면서 그 다른 존재들도 고통으로 빠져들게 한다. 우리아빠가 가족들에게 하던 짓이랑 비슷하다. 휴)

-(…)버틀러의 방한과 강연 일정이 알려지면서 또다시 개신교 쪽 반대자들을 중심으로 주최측에 강연을 취소하라는 등의 민원이 폭주했다. 버틀러를 포함해 여러 사람의 안전을 고려하여 강연 시간과 장소를 급히 변경하는 ‘작전’이 펼쳐지는 사이, 그는 예정된 강연 날짜보다 하루 앞서 한국에 도착했다. 바로 그날 밤 10시30분경, 당시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의사당에 병력을 투입했다. 2024년 12월3일의 일이다. (…)
버틀러는 윤석열이 반페미니즘 인사였으며 실제로 정권을 잡는 데 반페미니즘을 전략적으로 적극 활용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반헌법적 계엄령 선포를 통해 윤석열이 시도한 친위쿠데타는, 이 책에서 버틀러가 역설하는 바 페미니즘과 젠더 논의에 반대하는 권력이 여성과 소수자를 탄압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평등의 이상을 배반하고 보편적 인권을 억압하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권위주의 독재라는 사실을 증명한 사건이다. (448-449, 옮긴 선생님 해제를 읽으면 이런 아퀴가 맞는 상황에 대해서도 알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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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10-05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가져와서 읽고 있는데!

반유행열반인 2025-10-05 17:02   좋아요 0 | URL
이야 가까운 시간 안에 유수님이랑 같은 책 읽는 거 너무 반갑구요!!!

유수 2025-10-05 0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어요. 하는가? 할까?로는 확보할 수 없는 무언가로 느낌 ㅋㅋ 반님이 치열하게 챗놈과 토론하신 내용도 냠냠 배워갑니다.

반유행열반인 2025-10-05 17:03   좋아요 0 | URL
근데 역시 -하랴 이거 너무 육이오 노래 생각나요.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전자책 오만원 이상 사면 만원 준다는 적립금 턱 받아버리니 팔지도 못할 거 사지 말자... 하던 다짐이 흔들리고, 글항아리 벽돌책을 고가격순으로 정렬해서 종이책 기준 천쪽 넘는 걸로 골랐다. 역사 이전의 역사, 거대문명 이전의 인류, 좋잖아? (비겁한 구매 변명)
덕원오빠 책은 읽다가 오글거릴까 봐 야 그냥 읽지 마... 하다가 리뷰랑 백자평 빵인 걸 보고 아...나라도 악성독후가머의 비악성리뷰라도...연휴의 미션으로다가 전자책으로 질렀다.
사은품 북슬리브가 책 들고 다닐 때 모서리 안 구겨지고 커엽고 좋을 것 같았지만 나에겐 스누피 북커버가 있으니 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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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의 세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5
김미월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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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9 김미월.

날은 좋고, 대부분 시험 기간이니 이날 현장학습을 롯데월드로 온 아이들은 노났다. 주말에 3만 명 넘게 운집한 공연(muse내한) 틈에 지쳤던 나는 덕분에 인파에도 면역이 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구밀도 낮은 날이면 나도 노났다. 다들 놀이기구 타는 줄 서기 바빠 새끼오리처럼 날 찾는 청소년은 없다. 카페를 찾는 동료들에게 난 좀 돌아다닐게요, 하고 매직아일랜드로 나와 한바퀴 휘돌며 백만번의 인사를 받고, 어쩐지 ‘여긴 대부분 찾지 않아 레이더’가 이끄는 대로 후미진 곳에 들어서니 오… 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오리인지 고니인지 세 마리 동동, 성남비행장을 향하는 비행기들이 내는 소음은 어제 구입한 mp3음악들(그렇다 스트리밍 서비스 구독 없이 여전히 다운로드로 음악 듣는 데이터 1.5기가 유저)로 가리고. 가끔 길을 잘못 들어 당황하다 지나치는 사람 몇몇 빼곤 테마파크에서, 아니 이 도시의 야외에서 이렇게 오래(여봤자 두시간 쯤) 한산하게 앉아있으니 가볍게 들고 온 중편소설 한 권은 후딱이다. 참새 한 마리만 발치를 종종 지나고, 바람도 가끔 불고, 덥지 말라고 천막도 쳐 있고 거기 뭔 워터스프링클러(?)도 자동으로 한 번 뿌려주고, 상쾌하다. 쾌적하다. 한적해 죽겠다. 그래서 뭘 읽어도 올려쳐줄 마음가짐인데 얇고 가벼워 한 손에 들린다고 골라온 김미월 소설이 생각보다 좋았다. 물론 왜 일주일의 세계인가, 다 읽고 나서 제목보며 다시 뒤에서 앞으로 훑다 일주일 맞네, 했다. 등단 이십 년 넘은 소설가의 사 년 전 소설이니 그 다음은 더더 잘쓰게 됐을 것 같은데 젊은작가상에서 한 번 읽어보고 다른 작품은 본 게 없었다. 좀 더 찾아 읽어볼게요.

그나저나 박상 선생님, 후배가 준 책 이렇게 막 팔아도 됩니까. 소설 끊은 윤이형 선생님이 잘 지내실까, 문득 궁금해지지만 쓰지 않는 내가 너무 잘 살고 잘 읽고 있으니 아마도 행복하실 거야, 행복하시길, 안 쓴다고 힘들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지극히 독자중심적이었구만, 지금 내가 반추하는 짓도 은소가 하는 변덕 같은 걸까, 나도 저런 뒤늦은 되돌아봄으로 괴롭던 날들이 있어, 그런데도 인간이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해, 그래서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잘 짜여져 있는 구조와 담백한 문장에다 -해요체로 서술한 게 어색하지 않아서 오전 짧은 휴식을 잘 채워주었다. 이제 뭐좀 주워먹고 신나게 놀이기구 줄 선 어린이들 무사한지 보러 가야지… 놀이공원에서 어트랙션 타는 거 마다하고 사람 없는 공간에 숨어서 책 읽는 즐거움이 이만큼 크다는 거 아십니까…전 압니다.

(이렇게 안온한 하루 보내다가 활동 종료 무렵 핸드폰 잃어버린 어린이 생겨서 분실물 센터 뛰어가고 신고하고 집에 연락해주고 집 돌아갈 줄 모른대서 지하철 태워 보내는 헐레벌떡 엔딩…)

+밑줄 긋기
-나를 좋아했었다니, 좋아했었다면 지금은 안 좋아한다는 건가? 도대체 왜?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뭔데? 하고요. 가진 줄도 몰랐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이상한 상실감과 비애가 그를 잠 못 들게 했답니다. 불면의 밤마다 늘 같은 질문이 그를 괴롭혔고요.내가 왜 몰랐을까. 아니,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한테 왜 실망했을까. 그 과거 반추형 문장들이 점차 미래 지향형으로 바뀌어 ‘어떻게 하면 나를 다시 좋아할 수 있을까?‘가 되면서 결국 연애가 시작되었지요.
그때부터 저는 주위에 짝사랑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친구가 있으면 넌지시 일러주게 되었습니다. 먼저 고백해봐. 단, 과거형으로.(21-22)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제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저에게 질문하기 위해서요.
서울 어느 동네서 살았어? 우리 고모는 인천 살거든.
병신아, 서울하고 인천하고 같냐?
너는 혈액형이 뭐야?
롯데월드 가봤어? 난 가봤는데.
웃기네. 니가 롯데월드에 가봤다고? 언제?(50, 롯데월드에서 전입생에게 롯데월드 가 봤냐 묻는 아이들 나오는 구절 읽으니 아이참 책을 찰떡으로 골랐군, 사소한 걸 이어붙이기 좋아하는 나라서 별 것도 아닌 걸 베껴왔다.)

-수풀이 우거진 개천 옆 흙바닥에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 게 그럴 수 있었나 싶게 비현실적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뼈가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누군가 발골한 후 무단으로 폐기했을, 형태로 짐작건대 말이나 소의 것일 커다란 머리뼈며 갈빗대가 그대로 드러난 몸통뼈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어요. 어린 눈에도 흉측하고 괴기스러워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우리는 그 옆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습니다. (66)

-아무리 사이가 멀어졌다고 해도 저는 어쩌면 친구에게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요. 초등학생들 싸움이 원체 유치하다지만, 운동경기처럼 승부를 가리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특히나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지만, 저는 제 말 속에들어 있던 즉흥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던 그 견고한 악의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우연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애에게 상처를 주고자 했던 저의 깊고 단단했던 진심을요.(106, 뒤늦게 깨닫는 예전 나의 추잡한 면을 들여다볼 때의 그 느낌, 이제 어찌할 수도 없어 자괴감 드는 순간을 난 몰랐다면 좋았겠다.)

-오랫동안 저의 연인이었던 사람을 알고 보니 제가 그다지 사랑하지 않더라는 사실을, 사랑이라고 믿어왔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연민이었고 그 후에는 그저 관성이었음을 알아버린 기분이 참담했습니다.(108)

- 타인들의 삶과 현실 속으로 들어가보는 서사적 경험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의 선물은 우리가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착한 존재라는 윤리적 허상 속에서 자족할 때가 아니고 우리가 그다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존재론의 진실을 겸허하게 수용할 때 주어진다. 소설의 윤리적 가치는 한마디로 착해지는 데서가 아니라 아이러니해지는 데서 생겨난다. (133-134, 오양진의 해설 중. 초반부가 글쓴이의 소설론와 세계관으로 너무 거창해서, 거기에다 사랑의 형식과 타자의 윤리학 운운이 좀 튕긴다, 갖다붙인다 싶어 소설 뒤 비평이나 해설은 안 읽는다는 원칙을 깬 걸 잠시 후회했다. 그래도 말미에 몇줄은 그래그래, 싶어서 옮겨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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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9-29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님 글 보다보면 밑줄마저도 재밌단 말이에요 왤까..

반유행열반인 2025-09-29 20:11   좋아요 2 | URL
저를 향해 씌워진 콩깍지가 아직 덜 말라 안 벗겨졌기 때문에... 언제나 아껴주셔서 ㅅㄹㅎㄴㄷ 유수님 ㅋㅋㅋㅋㅋ

유수 2025-09-29 22:26   좋아요 1 | URL
저는 관성 그 자체인 인간이에요 ㅜㅜ

유수 2025-09-29 22:36   좋아요 1 | URL
ㅅㄹ 모가 중요해 ㅋㅋ

새파랑 2025-09-30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use 공연 갔다오셨군요. 완전 부럽습니다 ㅜㅜ 롯데월드가서 책을 읽으시다니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9-30 18:48   좋아요 1 | URL
뮤즈는 이십여년전에 제일 좋아했던 밴드는 분명한데 이젠 저보다 더 젊고 더 좋아하는 듯한 젊은이들 틈에서 젊은 사람 중 가장 늙은 사람 하려니 힘들더라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