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의 세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5
김미월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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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29 김미월.

날은 좋고, 대부분 시험 기간이니 이날 현장학습을 롯데월드로 온 아이들은 노났다. 주말에 3만 명 넘게 운집한 공연(muse내한) 틈에 지쳤던 나는 덕분에 인파에도 면역이 좀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인구밀도 낮은 날이면 나도 노났다. 다들 놀이기구 타는 줄 서기 바빠 새끼오리처럼 날 찾는 청소년은 없다. 카페를 찾는 동료들에게 난 좀 돌아다닐게요, 하고 매직아일랜드로 나와 한바퀴 휘돌며 백만번의 인사를 받고, 어쩐지 ‘여긴 대부분 찾지 않아 레이더’가 이끄는 대로 후미진 곳에 들어서니 오… 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오리인지 고니인지 세 마리 동동, 성남비행장을 향하는 비행기들이 내는 소음은 어제 구입한 mp3음악들(그렇다 스트리밍 서비스 구독 없이 여전히 다운로드로 음악 듣는 데이터 1.5기가 유저)로 가리고. 가끔 길을 잘못 들어 당황하다 지나치는 사람 몇몇 빼곤 테마파크에서, 아니 이 도시의 야외에서 이렇게 오래(여봤자 두시간 쯤) 한산하게 앉아있으니 가볍게 들고 온 중편소설 한 권은 후딱이다. 참새 한 마리만 발치를 종종 지나고, 바람도 가끔 불고, 덥지 말라고 천막도 쳐 있고 거기 뭔 워터스프링클러(?)도 자동으로 한 번 뿌려주고, 상쾌하다. 쾌적하다. 한적해 죽겠다. 그래서 뭘 읽어도 올려쳐줄 마음가짐인데 얇고 가벼워 한 손에 들린다고 골라온 김미월 소설이 생각보다 좋았다. 물론 왜 일주일의 세계인가, 다 읽고 나서 제목보며 다시 뒤에서 앞으로 훑다 일주일 맞네, 했다. 등단 이십 년 넘은 소설가의 사 년 전 소설이니 그 다음은 더더 잘쓰게 됐을 것 같은데 젊은작가상에서 한 번 읽어보고 다른 작품은 본 게 없었다. 좀 더 찾아 읽어볼게요.

그나저나 박상 선생님, 후배가 준 책 이렇게 막 팔아도 됩니까. 소설 끊은 윤이형 선생님이 잘 지내실까, 문득 궁금해지지만 쓰지 않는 내가 너무 잘 살고 잘 읽고 있으니 아마도 행복하실 거야, 행복하시길, 안 쓴다고 힘들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지극히 독자중심적이었구만, 지금 내가 반추하는 짓도 은소가 하는 변덕 같은 걸까, 나도 저런 뒤늦은 되돌아봄으로 괴롭던 날들이 있어, 그런데도 인간이란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해, 그래서 더 잘 읽혔던 것 같다. 잘 짜여져 있는 구조와 담백한 문장에다 -해요체로 서술한 게 어색하지 않아서 오전 짧은 휴식을 잘 채워주었다. 이제 뭐좀 주워먹고 신나게 놀이기구 줄 선 어린이들 무사한지 보러 가야지… 놀이공원에서 어트랙션 타는 거 마다하고 사람 없는 공간에 숨어서 책 읽는 즐거움이 이만큼 크다는 거 아십니까…전 압니다.

(이렇게 안온한 하루 보내다가 활동 종료 무렵 핸드폰 잃어버린 어린이 생겨서 분실물 센터 뛰어가고 신고하고 집에 연락해주고 집 돌아갈 줄 모른대서 지하철 태워 보내는 헐레벌떡 엔딩…)

+밑줄 긋기
-나를 좋아했었다니, 좋아했었다면 지금은 안 좋아한다는 건가? 도대체 왜? 마음이 변한 이유가 뭔데? 하고요. 가진 줄도 몰랐던 것을 잃어버렸다는 이상한 상실감과 비애가 그를 잠 못 들게 했답니다. 불면의 밤마다 늘 같은 질문이 그를 괴롭혔고요.내가 왜 몰랐을까. 아니,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나한테 왜 실망했을까. 그 과거 반추형 문장들이 점차 미래 지향형으로 바뀌어 ‘어떻게 하면 나를 다시 좋아할 수 있을까?‘가 되면서 결국 연애가 시작되었지요.
그때부터 저는 주위에 짝사랑하느라 골머리를 앓는 친구가 있으면 넌지시 일러주게 되었습니다. 먼저 고백해봐. 단, 과거형으로.(21-22)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이 제 주위에 모여들었습니다. 저에게 질문하기 위해서요.
서울 어느 동네서 살았어? 우리 고모는 인천 살거든.
병신아, 서울하고 인천하고 같냐?
너는 혈액형이 뭐야?
롯데월드 가봤어? 난 가봤는데.
웃기네. 니가 롯데월드에 가봤다고? 언제?(50, 롯데월드에서 전입생에게 롯데월드 가 봤냐 묻는 아이들 나오는 구절 읽으니 아이참 책을 찰떡으로 골랐군, 사소한 걸 이어붙이기 좋아하는 나라서 별 것도 아닌 걸 베껴왔다.)

-수풀이 우거진 개천 옆 흙바닥에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 게 그럴 수 있었나 싶게 비현실적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뼈가 여기저기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누군가 발골한 후 무단으로 폐기했을, 형태로 짐작건대 말이나 소의 것일 커다란 머리뼈며 갈빗대가 그대로 드러난 몸통뼈가 사방에 흩어져 있었어요. 어린 눈에도 흉측하고 괴기스러워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우리는 그 옆에서 물에 발을 담그고 놀았습니다. (66)

-아무리 사이가 멀어졌다고 해도 저는 어쩌면 친구에게 그렇게 상처가 되는 말을 쉽게 할 수 있었을까요. 초등학생들 싸움이 원체 유치하다지만, 운동경기처럼 승부를 가리는 상황에서 일어나는 다툼은 특히나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라지만, 저는 제 말 속에들어 있던 즉흥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던 그 견고한 악의를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우연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애에게 상처를 주고자 했던 저의 깊고 단단했던 진심을요.(106, 뒤늦게 깨닫는 예전 나의 추잡한 면을 들여다볼 때의 그 느낌, 이제 어찌할 수도 없어 자괴감 드는 순간을 난 몰랐다면 좋았겠다.)

-오랫동안 저의 연인이었던 사람을 알고 보니 제가 그다지 사랑하지 않더라는 사실을, 사랑이라고 믿어왔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연민이었고 그 후에는 그저 관성이었음을 알아버린 기분이 참담했습니다.(108)

- 타인들의 삶과 현실 속으로 들어가보는 서사적 경험이 인간에게 주는 사랑의 선물은 우리가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착한 존재라는 윤리적 허상 속에서 자족할 때가 아니고 우리가 그다지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라는 존재론의 진실을 겸허하게 수용할 때 주어진다. 소설의 윤리적 가치는 한마디로 착해지는 데서가 아니라 아이러니해지는 데서 생겨난다. (133-134, 오양진의 해설 중. 초반부가 글쓴이의 소설론와 세계관으로 너무 거창해서, 거기에다 사랑의 형식과 타자의 윤리학 운운이 좀 튕긴다, 갖다붙인다 싶어 소설 뒤 비평이나 해설은 안 읽는다는 원칙을 깬 걸 잠시 후회했다. 그래도 말미에 몇줄은 그래그래, 싶어서 옮겨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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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9-29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님 글 보다보면 밑줄마저도 재밌단 말이에요 왤까..

반유행열반인 2025-09-29 20:11   좋아요 2 | URL
저를 향해 씌워진 콩깍지가 아직 덜 말라 안 벗겨졌기 때문에... 언제나 아껴주셔서 ㅅㄹㅎㄴㄷ 유수님 ㅋㅋㅋㅋㅋ

유수 2025-09-29 22:26   좋아요 1 | URL
저는 관성 그 자체인 인간이에요 ㅜㅜ

유수 2025-09-29 22:36   좋아요 1 | URL
ㅅㄹ 모가 중요해 ㅋㅋ

새파랑 2025-09-30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use 공연 갔다오셨군요. 완전 부럽습니다 ㅜㅜ 롯데월드가서 책을 읽으시다니 ㅋㅋ

반유행열반인 2025-09-30 18:48   좋아요 1 | URL
뮤즈는 이십여년전에 제일 좋아했던 밴드는 분명한데 이젠 저보다 더 젊고 더 좋아하는 듯한 젊은이들 틈에서 젊은 사람 중 가장 늙은 사람 하려니 힘들더라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