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교사 안은영 오늘의 젊은 작가 9
정세랑 지음 / 민음사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260509(저자:정세랑)


5~6년 전 직장에서 책을 사 준대서 이걸 골랐다. 앞 몇 페이지를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아 이런 걸 어떻게 읽어...하고 덮었던 게 또 수 년 전이다.
장르나 난이도 상관 없이 어떤 책들은 최소한의 마음가짐이 있어야 받아들여진다. 아니 적어도 읽다가 중단하는 (나한테는 굴욕적인) 일이 벌어질 확률이 줄어든다.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둘 중 하나는 써 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책은 둘다 섞어서 한 권으로 냈다. 늘 유행과는 반대 흐름을 타는 삐딱이라서 다들 신나게 읽을 땐 흠, 하다가 거의 잊혀지면 뒤늦게 펴든다.

처음 시도했던 때와 달리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능력의 설정, 확장, 한계, 조력자, 빌런, 이야기거리를 물고 오는 조연, 약간 병풍 같지만 그래도 분위기를 살려주는 엑스트라까지, 이야기를 짜는 사람들이 어떤 걸 어떻게 배치해서 이야기의 끝까지 치고 나가는지 비교적 뚜렷이 읽히는 책이었다. 읽히려면 클리셰는 필요하다. 물론 가장 마지막 장의 모래 바람 혼돈의 카오스와 브랜드 로고 달린 용의 등장은 이게 최선이었니, 무슨 장면을 읽고 있는 건가, 싶긴 했지만 결말은 늘 어려운 거니까. 대부분 끝에선 누군가를 죽여버리는데, 여기선 다짜고짜 해피엔딩이다.

‘가로등 아래 김강선’은 나 대놓고 울라고 쳐패는 신파 싫어하는데, 크레인이 무너져 깔려 죽어버린 김강선 이야기에서부터 눈물을 억지로 꾹꾹 참았다. 옛 친구가 안은영에게 찾아와 이승의 미련을 풀듯 이런저런 말을 하다 사라지는 이야기인데, 내가 우는 걸 참은 대신 안은영이 마지막 줄에서 울어줬다. 가만보면 슬픔의 정서를 제대로 써 본 경험이 없었다. 맨날 지나치게 덤덤하거나 냉소하는 것만 쓴 것 같다.

언제 펑펑 울어봤나, 떠올려보면 죄다 짝사랑이든 사랑이든 곁에 두고 싶은 걸 잃고 몇날 며칠 통곡했던 기억은 난다. 사랑의 부재 말고는 크게 울일이 없었으니 운이 좋은 인생 아니겠니. 우울증 때문에 운 건 잘 기억도 안 난다.

정세랑 책을 적게 읽지는 않았다. (와 찾아보니 옴니버스 빼고 단일 작가로는 이책까지 7권이다) 딱히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서도 계속 나도 모르게 찾아보긴 했다. 항상 사랑 이야기가 나와서 좋았던 것 같다. 세계가 멸망하고 현실이 파괴되는 순간에도 그래도 사랑, 하는 작가가 또 흔하진 않은 것 같다. 갑자기 시공이 오그라들기 때문이다. 그런 유치해짐을 무릅쓰고 계속 쓰는 사람이 있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 나는 좋아하게 될까? 모든 이야기의 끝은 죽음과 파멸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니 오히려 산뜻했다. 드라마나 천만영화 같은 걸 잘 안 보는 인간이라 뻔한 게 새롭다.

+밑줄 긋기
-죽은 것들은 의외로 잘 뭉치지 않는다. 산 것들이 문제다. 2차 성징의 발현이란 짓궂고 지겨웠다. (14)

-“딱밤에 적당한 기운을 실어 관자놀이를 때리면 기절하더라고요.” (83, 귀신 보는 눈, 플라스틱칼, 비비탄총에 이은 소소한 능력)

-만약 능력을 가진 사람이 친절해지기를 거부한다면, 그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치관의 차이니까. (117, 이건 좀 인정하기에는 위험한 상황이다. 능력으로 남을 괴롭히거나 세계 정복을 시도할 수도 있잖아…)

-사람을 쏴 본 적은 없었다. 산 사람을 쐈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몰랐다. (122, 아...내가 설정한 세계관이랑 겹쳐서 벌써 빡쳤다. 늦게 쓰는 자의 슬픔…)

-아무도 교사가 매력을 활용하는 직업이라고 얘기해주지 않았으므로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 애초에 매력 있는 학생이 자라 매력 있는 선생님이 된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학생 때도 학교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교사가 된 스스로가 한심했다. 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분명히 간절하게 교사가 되고 싶었는데 막상 되고 나니 2년 만에 그 간절함의 이유를 까먹고 말았다. 3년 전으로 돌아가 세살 어린 자신의 멱살을 잡고 왜냐고 묻고 싶은 기분이었다. (131, 토씨 하나 안 빼고 내 마음이었어…)

-대흥이 생각하기에 20세기는 오점 없이 살기 쉬운 세기가 아니었다. (227, 너그럽다 너그러워)

-저는 이 이야기를 오로지 쾌감을 위해 썼습니다.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러니 여기까지 읽으며 쾌감을 느끼지 못하셨다면 그것은 저의 실패일 것입니다. (275, 작가의 말 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