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 태학산문선 103
이옥 지음, 심경호 옮김 / 태학사 / 2001년 6월
평점 :
품절


-20240503 이옥.

수능 국어공부는 공부라기보다 여가 생활에 가깝다. 문제 풀이하고 틀리면 물론 개빡치지만, 조금이라도 들어보거나 좋아하는 작가 작품, 관심 분야 지문이 나오면 흥미가 생긴다. 고전 시가나 산문은 영 꼴보기 싫고 지긋지긋했는데, 자꾸 보아야 재밌다, 이것도 그렇다. 발췌본으로 토막토막 보는 고전들도 이제는 재밌다. 아무렴, 들여다 봐도 도무지 늘 궁리 안 하는 수학, 과학에 비하면 이건 여가생활 맞다.

빈출 작가 중 이옥이란 이름이 눈에 띄었다. 글은 그냥 고만고만했는데, 자꾸 나오니까 궁금해서 산문집이랑 어린이책이랑 갖춰 놨다. 그중 하나를 펼쳤는데,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학자 선생님이 문장을 엄청 힘줘놔서 아니 왜 이렇게 멋을 부려...했다. 이옥의 수많은 수필, 소설, 전 등등 중에서 몇 작품을 선정하고 번역자가 글 끝마다 논평 같은 걸 덧붙여 놨다. 책 머리에 이옥에 대한 소개를 읽고 그제서야 어떻게 살다간 사람인가 알았다. 왕족 후손이긴 한데 뭔 고조부였나 위에 조상이 서얼이라 이옥 신분도 그닥 높지 않았다고 한다. 글깨나 써서 성균관 들어가고 벼슬을 할랑말랑, 그런데 당시에 정조가 문체반정하는 때라서 이옥의 독특한 글쓰기, 문체, 이런 걸 정조가 되게 싫어했나 보다. 얘 문장 고칠 때까지 아침마다 깜지 50줄씩 쓰라고 해, 이러다 못해 야 그냥 군대 보내, 와...죄 지은 벼슬아치나 양반은 군대로 유배처럼 보내버렸는데 이옥은 자꾸 그렇게 쫓겨났다. 군대 끌려갔다가 다시 초시 장원해서 까방권 생겼는데 까먹고 관청에 스스로 신원회복 같은 거 해야 되는데 안 해가지고 벼슬길은 막히고… 그래서 그냥 지방 가서 글쓰고 놀다가 오십대에 죽었다.
계속 공부하고 글쓰고 시험 보고 했던 거 보면, 그리고 좀 잘 써서 계속 시험 통과한 거 보면 나름 벼슬길에 뜻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뻔한 거 쓰기 싫다고 문체 안 바꿔서 쓸쓸하게 살다 간 인간… 결국엔 이런 반항아들의 글이 남는다. 그당시 관료는 뭐했나 별로 안 궁금하지만 이 사람이 남긴 글은 궁금하지 뭐니. 근데 읽어보면 독특한 깨알 디테일이 있긴 한데 또 막 엄청 명문 그런 건 잘 모르겠다. 어디에 어느 아무개 하고 시시콜콜한 걸 많이도 남기긴 했다. 막 왕가의 일 벼슬아치 나라의 일 이런 거 말고 일반 민중 이야기 떠도는 이야기 아녀자 이야기 이런 걸 적어 둬서 아,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거 비슷하다… 이렇게 알게 해줬다. 소설도 이것저것 남겼는데, 수능 국어 모의 문제 풀다 한 번 읽은 심생전을 책 말미에서 한 번 더 읽으니 또 새로웠다. 다른 신분 간 사랑 나누다 결국 일찍 죽어 버린 연인 이야기를 적어 두고, 이 이야기 출처가 어려서 선생님이 해주시면서 이렇게 연애질 하라는 게 아니라, 하물며 남녀 일도 이렇게 정성을 다하면 여자 마음이 열리는데 니들 공부 열심히 하면 뭔들 못 이루겠니...이러고 교훈적으로 전한 게 오래 기억에 남아 책 뒤져 보니 비슷한 야사가 많아서 여기 글로 남깁니다, 하고 뭔 액자에 액자 구성으로… 괜히 패관문학 같은 거 쓴다고 임금님한테 쳐 맞을까 봐 눈치보면서 교훈도 바르고 내가 지은거 아니고 어디서 주워들은건데...이렇게 틀까지 갖추며 눈치보면서도 그래도 적어두고 싶어 못 견디겠다!!! 이러는 천상 글쟁이…

이옥도 소소하게 재미나게 읽었지만, 정말 뭔 웹소설 같은 거 쓰고 싶은데 소재 없으면 고개를 들어 고전문학을 보라…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렘물의 정석 구운몽, 기담 금오신화 이런 거 말고도 진짜 막장 전개에 재미난게 많다. 어제는 수능특강에 소개된 삼선기 다이제스트를 공부(?그냥 논 거 아니냐…)했는데, 이게 또 스토리가 스펙타클했다.(궁금하면 수능특강 문학 참조…)

이렇게 온갖 책 읽을 시간을 잃은 유폐된 수험생에게 숨은 명작, 숨은 반항아들 소개해주는 수능 국어는 한줄기 빛… 작가가 불행할수록 읽는 나는 즐거운 사례는 늘어만 가고… 난 그냥 명작 안 남기고 행복하게 살다 갈란다…했지만 이 나이에 수능을 준비한다고 꼴값하는 바람에 행복하게만 살기는 이미 글른 듯… 다음 독서는 수능특강 연계 작가 이문구의 소설집들로 픽...ㅋㅋㅋ 오늘 우리동네 리씨 문제 지문으로 읽는데 이거도 너무 재밌어서 풀버전으로 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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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5-03 0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수능 국어로 여가 생활를 하시는군요?! 근데 이옥이란 사람 재미있네요. 글도 궁금해짐… 그나저나 유열 님 웹소설 쓰시면 깨알 재미날 거 같으니, 올해 수능 뜻대로 안 풀리면…. 웹소설 씁시다.

반유행열반인 2024-05-03 10:44   좋아요 1 | URL
저는 웹소설이란 걸 존재만 알았지 도무지 읽을 엄두가 안 나서 + 대중 보편적인 감정과 취향 파악이나 공감 능력도 부족해서 창작도 어렵지 않을까요? 무엇보다도 ‘책만 읽던 서생 두 남장 기생 제자에 훼절 당하고 기생학교 교장 되다!’(삼선기 대략 줄거리…) 이런 제목 붙인 글 읽기도 쓰기도 저에겐 너무 고난도 ㅋㅋㅋㅋ으으으 ㅋㅋㅋㅋ

잠자냥 2024-05-03 11:04   좋아요 1 | URL
웹소설 계 평정중이신 고라니상한테 좀만 배우면 될 거 같은데요? 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5-03 12:55   좋아요 0 | URL
평정은 그분이계속하시면 되고 남에게 배우는 걸 제일 잘 못하는 저는 그냥 이렇게 까까까 독후감이나 쓰고 살다 죽는 걸로….ㅋㅋㅋㅋㅋ

희선 2024-05-11 04: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떤 책에선가 이옥이라는 이름 본 듯도 하네요 거기에는 여러 사람 이야기가 담겼던 것 같은데... 어쩌면 다른 사람이 책 읽고 쓴 글에서 봤을지도...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군요


희선

반유행열반인 2024-05-11 08:10   좋아요 0 | URL
여러버전으로 많이 나왔더라구요. 김려라는 친구가 이옥 글을 발굴해서 정리해서 책으로 엮어 놓은 덕에 원재료가 많아서 어린이책 산문집 전집 요렇개 저렇게 가공해서 내기도 쉽겠더라구요. 이야기는 다양하고 소소하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