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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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8 프리모 레비.



 시작은 예쁜 담요였을지도 모른다. 올리버 색스가 자기 나이와 같은 원자 번호의 원소로 이루어진 기념품을 모으는 장면을 읽고 흥미를 느꼈을지도. 이젠 정확한 내 나이를 모르겠다. 이트륨, 지르코늄, 니오븀 셋 중 하나인데, 셋다 내구도가 좋다고 한다. 다른 금속에 섞어 강화시켜주거나, 산화물을 치과 치료에 쓴다. 확실히 살아온 중에 몸도 마음도 제일 튼튼한 시절이긴 하다. 


 

 막연하게 물리나 화학 공부를 더 해 보고 싶었다. 그럼 수학도 왠지 같이 해야 할 것 같고. 과학이든 수학이든 고교 수준부터 보자, 그럼 아예 수능을 볼까? 하다가 그해부터 약대가 다시 수능으로 입학생을 뽑는 걸 알게 되었다. 화학, 화학이다! 하고 EBS 화학 강의를 몇 개 보다 보름만에 접었다. 진리의 생지(생명과학+지구과학)! 입시에 성공하면 나는 주로 화학을 공부하게 될텐데, 화학을 배우려면 생명과학과 지구과학으로 대학 문을 뚫어야 하는 묘한 상황… 작년에 조금 쉬는 김에 물리 해 볼까...하면서 내신 강의를 석달 정도 2/3쯤 듣다가 다시 생명과학으로 돌아왔다. ㅋㅋㅋ반도체까지 배우긴 했는데 역시…물리야 만나서 반가웠고 시험으론 만나지 말자…



 책 쟁이는 비중이 문학과 교양과학책이 거의 반반 비등비등한, 뼈문과지만 이과로 개조되길 열망하는 나새끼는, 그래서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라는 책이 오래도록 궁금했다. 무슨 책인지도 모르지만 왠지 내가 읽으면 좋아할 것 같았다. 막상 중고로 책을 마련하고 나니 어, 과학책인 줄 알았는데 소설이야? 작가가 과학자 아니야? 소설가야? 아 둘다야? 읽지도 않고 그냥 어리둥절하면서 꽂아놨다. 그러고나서도 프리모 레비 책만 보이면 막 주워모아서 다섯 권이나 꽂아 놨다. 읽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오래 읽지 않았다. 읽게 된다면 주기율표가 제일 먼저겠지. 



 해가 바뀌고서 책을 펼쳤고, 거의 석 달에 걸쳐 읽었다. 책은 깜짝 놀랄 정도로 흥미로웠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았는데 실제로 좋았다. 그런데도 책을 매일 읽지는 못하는 딱한 날이 이어졌다. 강제수용소 생활에 비할 바는 못 되겠지만 하여간에 하고 싶은 걸 못하는 나날이다. 공부를 많이 못한 날은 공부도 안 하는 게 책은 무슨! 공부 많이 한 날은 상으로 읽자, 하지만 이미 피곤해져서 그냥 쓰러져 잤다. 졸음을 참고 열한시 열두시 언저리에 원소 한 꼭지씩 읽는 날은 운이 좋았다. 그리고 아주 만족스러운 독서였다. 컵받침에 쏟은 설탕 알갱이 한 알 한 알 집어먹어서 즐거운 건지 설탕은 원래 맛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그랬다. 



 철의 이미지와 잘 맞는 산 타는 강인한 산드로(산에 올라가서 산드로? 미안…)의 이야기가 강렬했다. 읽어나갈수록 강렬함과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자꾸 갱신되었다. 폐기물에서 니켈 추출하려고 광산에서 일하던 시절 레비가 쓴 환상동화들도 좀 어이없지만 재미있었다. 야, 거대한 납 맥 찾았으니 이제 자손을 퍼뜨리자! 수은 판 돈으로 내 부인한테 껄떡대는 놈한테 소개시켜줄 여자를 데려왔는데 그냥 이 여자, 나랑 살자! 이런 원시적인 빻은 이야기가 왜 재미있어…

 인으로 당뇨 치료하려는 무의미한 실험하는 와중에 유일하게 의미있었던, 좋아하는 직장 동료 겸 동창생 여자친구 붙잡지 못하는 이야기, 포로로 잡힌 중에 곧 다시 풀려나 흐르는 강에서 사금 캘 것을 자랑하는 다른 죄수를 보고 부러워하는 이야기, 왠 고객이 고객 상담하자고 갔더니 지루하게 생존담 썰 풀면서 패전 독일 병사들이 준 우라늄이라고 보내준 걸 분석한 이야기, 감광지의 완두콩 얼룩의 비밀, 결함있는 니스 원료와 바나듐 때문에 재회하게 된 수용소의 독일군 학자, 마지막은 탄소 순환을 온갖 비유 버무려 아름답고 비장하게 마무리해서 오 사기다… 화학자가 글도 잘 써… 생존도 잘 해… 남의 이야기도 잘 듣고 잘 주워다 잘 모아놨다 했다. 

 본문도 좋은데 말미에는 필립 로스가 토리노의 레비 집 찾아가서 대담한 내용을 정리해 놨다. 나도 질 수 없지! 문돌이 파워! 하고 인터뷰 도입부부터 겁나 힘준 게 느껴져서 이거 읽는 재미도 좋았다. 필립 로스는 질문 던지는 거 보니까 참 좋은 독자였다… 레비는 로스랑 이야기 나누면서 내 책을 이렇게 열심히 제대로 읽은 사람이랑 말하니까 좋다 히히 했을 것 같다. 그치만 지금은 두 할배 다 이 세상에 없구나…


 나와 주변을 이루는 수많은 물질들 대부분에 앞선 사람들이 열심히 이름을 붙여 두었다. 분자 구조식이랑 특성이랑 다 잘 분석해서 요렇게 조렇게 활용할 방법도 찾아 두었다. 새로운 걸 발견하거나 만들기는 커녕, 남들이 이미 그렇게 정리해둔 물질 중 아주 일부를 시험 기간 앞두고 이름과 화학식과 특성을 나타내는 숫자들과 구조 등등을 달달 잠시 외우다 잊어버리고 말겠지. 나한테 그걸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말이다. 하고자 하는 것, 하게 될 것은 명확하고 그걸 하겠다고 해야 할 수단도 분명하니까, 해야지. 그때 되면 모아둔 남은 레비의 책도 내킬 때마다 술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뭐 화학 공부 안 하게 되어도 책은 읽을 수 있겠네… 


 알라딘 사은품으로 모셔둔 주기율표 북램프는 왜 이렇게 불빛이 흐릿하고 약하고 표면도 희끄무레하냐...거의 4-5년 만에 그 이유를 알았다. 양면을 덮은 보호 필름을 하나도 떼지 않아서 그랬다. 필름을 벗겨내자 빛도 음각된 주기율표도 아주 또렷하게 방안을 비추었다. 인간이 이렇게 허술해서야... 나트륨 넣을 자리에 칼륨 넣고 펑 터지고 난리 나는 거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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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3-29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물리 화학 수학을 더 공부하고 싶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인간은 다양합니다! ㅋㅋㅋㅋ 레비의 이 책은 아직 안 읽어봤는데 궁금해지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3-29 20:56   좋아요 1 | URL
그게 딱 2년 반 전 나새끼의 바람이었고…지금은 아닙니다…안 하고 싶어요…공부 1도 안 한 영어 역사만 1등급, 시간 조금 들인 국어도 1등급인데 대부분의 시간 쏟아 붓는 수학 과학은 내내 3,4등급 ㅋㅋㅋㅋ 저는 역시나 뼈문과였던 것입니다… 레비 다른 책은 읽으셨군요. 저한테는 아주 좋았습니다.

새파랑 2024-03-30 1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과학탐구 물리 했었는데 ㅋㅋ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번도 물리 화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안들던데,
대단하십니다 ㅋㅋ

근데 주기율표 북램프 사은품은 갖고 싶네요~!!

반유행열반인 2024-03-30 11:01   좋아요 1 | URL
4-5년 전 사은품이었는데 램프 사진보고 은근히 물욕 올리시는 분이 있네요 ㅋㅋㅋ알라딘은 주기율표 굿즈 시리즈 재출시를 고려해주십시오 ㅋㅋㅋ안경수건처럼 헐랭하게 만들지 말고 이쁘게 ㅋㅋㅋ

2024-04-05 1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4-05 2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