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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이스 닌 : 거짓의 바다에서
레오니 비쇼프 지음, 윤예니 옮김 / 바람북스 / 2022년 8월
평점 :
-20240224 레오니 비쇼프.
몇 달 전 청소년회관에서 한 주 한 번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엄마는 연필 소묘 단계를 마친 모양이다. 이제 색연필 그림에 들어간다고 선생님이 권해준 제품을 구해달라고 하셨다. 72색 전문가용 유성색연필은 거의 10만원이나 하는 제품이었지만, 그 정도 비용은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림 수업이 있는 날 엄마는 유독 설레고 들떠 보인다. 스케치북과 연필이 담긴 에코백을 메고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두 시간 그림을 그린 뒤엔 같은 시설에서 필라테스 수업을 듣고 돌아오신다. 주말에는 또 같은 시설의 피아노 레슨에 다녀오신다. 방에서는 책을 읽거나 유튜브를 보거나 소설을 고치시는 것 같다. 그래, 저게 삶이지. 노년에라도 하고 싶은 것 실컷 하시며 꽃길만 걸으세요.
쿠팡에 낮에 주문한 색연필은 그날 밤중에 도착했다. 빠르고 신기한 세상이 되었다. 어제 주문한 책이 늦어도 다음 날이면 오고, 낮에 주문한 책이 밤에 오는 날도 있다. 그렇게나 빨리 받은 책 중에 색연필로 그린 만화라서 더 관심이 갔다.
만화책을 읽기 전, 이전에 읽은 ‘미친 사랑의 서’를 다시 뒤적여 만난 아나이스 닌의 이야기는, 만화를 다 읽고 보니 만화에서 다룬 시기 이후의 또다른 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닌은 미국 대륙의 동편과 서편에 남편 하나씩을 두고 대륙을 횡단하며 중혼생활을 한다. 원래 남편한테는 죽을 때까지 숨기고, 두번째 남편한테는 처음에는 나이랑 이전 혼인 사실까지 숨기고 온통 거짓말을 하며 대륙 양편을 오가다 지쳤는지, 야 나 사실 결혼했어, 한다. 그런데 두번째 남편놈도 특이해서 오히려 좋아~ 상관 없잖아~하고 그녀가 암으로 죽을 때까지 간호도 해주고 혼인 관계를 유지한다. 와… 그 부지런함과 에너지는 참 놀랄만 하군요… ‘아내가 결혼했다’의 주인아 씨(주인공 이름임) 인물을 구상했을 때 왠지 아나이스 닌의 생애를 참고했을 것도 같다. 그렇게나 특이해 보이는 삶도 이전의 역사와 창작물을 뒤적뒤적해보면 그저 복제품이거나 약간의 변주를 더 한 정도일 때가 많다. 나도 부지런한 사람입니다만… 하여간에 부지런들 하시네...
그러니까 만화랑 책이랑 둘이 내용이 많이 겹치지 않아서 좋았다. 소설을 쓰고 싶지만 일기를 더 많이 쓴 사람이 사랑하고, 더 많이 더 더 많이 사랑하려고 애쓰는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다정하고 은행가 일 하면서 돈도 잘 벌어오지만 아나이스 닌의 예술에 관한 열망을 채워주지는 못하는 휴고, 재미있고 글 잘 쓰고 말도 몸도 잘 통하지만 돈 없고 현실 감각 없는(머리숱도 없는) 헨리, 거기에다 정신분석상담사, 친아버지(…), 또다른 상담사(...이새끼들 직업 윤리 어디다 버림), 결말에는 또다른 사랑들이 줄줄이 기다리는 듯한 암시로 내가 미리 알게된 중혼까지는 안 나오지만, 하여간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서 행복했니, 아나이스?
일기작가라 할 만큼, 시시콜콜 자기 이야기와 속내를 일기장에 잔뜩 남겨놔서 후대 사람들은 그거 보고 만화책도 만들고 산문집의 가십거리로도 만들고 우리는 그걸 보고 재미있어 하거나 욕하거나 별일이네, 한다. 나도 어느 시절까지는 일기를 열심히 쓰는 사람이었다. 지금도 가끔 내 일기를 펼쳐보면 세상 재밌어…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일기를 좀처럼 쓰지 않게 되었다.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아. 그런 생각도 하고… 블로그에 올리는 독후감이나 리뷰 같은 게 사실상 일기처럼 되었지만 남이 볼 수 있는 글은 내가 제법 날것으로 쓰는 편이긴 해도 자기검열이 늘 조금은 기본값이 되는 것 같다. 그것 말고 혼자 쓰는 글이 없어진 건… 조금은 살만해진 걸까? 나는 그냥 많이 남기지 않기로 했다. 예전에 일기든 소설이든 열심히 쓸 때는 뭔가를 체험하면 그 순간 나중에 쓸 궁리를 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그냥 그 순간을 산다. 이미 죽은 많은 이들이 남긴 자기들 이야기 읽으면서 나는 재미있긴 한데 나는 그렇게 파헤쳐지고 분석되고 평가되고 싶진 않구나 이젠.
+만화 속 헨리 밀러. 그림만 봐도 개못생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