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의 세계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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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27 황인찬
 

 같은 시인의 책을 시집 세 권(한 권은 두 번), 산문집 한 권 이렇게 (내 기준으로) 많이 읽은 건 처음이니까 나는 황인찬의 시와 글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되겠지?(마니아 1위를 내려 놔라 syo야) (+나중에 보니까 그림책 두 권은 왜 뺐어? ㅋㅋㅋㅋ너 마니아 맞음 해라 다 해라ㅋㅋㅋㅋㅋㅋㅋ)
 시를 쓰는 사람은 아주 느릴 것 같다.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쓰고 느리게 고쳤을 텐데 내가 읽는 속도는 너무 빠르다. 나 치고는 천천히 읽는다고 읽었는데도 이렇게 읽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안 될 건 또 뭘까 상관 없는 거 아닌가?(장기하냐)
 
 어제 다 읽은 책에서 벤저민 프랭클린이 ‘그게 뭐’한 이야기가 갑자기 생각났다. 그런데 밑줄을 안 쳐놔서 반납한 걸 또다시 빌려 옮겨 온다.
-1757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핼리 혜성의 위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게 뭐’라는 식의 무관심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 천문학자들은 핼리 혜성이 지구와 부딪치면 모든 생명체가 멸종할지도 모른다고 믿었지만, 프랭클린은 지구가 ‘신의 통치를 받는 무수한 세계’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대답했다. 이는 다중우주론 개념이 나오기 한 세기 전의 일이었다...스탠퍼드대학교에서 아그노톨로지(무지에 관한 연구)를 강의하는 로버트 프록터 교수는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써서 “단일우주에서의 우리의 중요성을 과장하기가 쉽습니다”라고 내게 말했다.(‘우리 몸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중)

 시인의 2019년 시집, 2020년 산문집, 2023년 시집, 다시 2019년 시집, 2015년 시집 순서로 읽었는데, 어떤 시들은 그 안에서 변주되고 반복되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우리 안에서 어떤 장면을 무한하게 복기하고 되새기고 조금씩 바꿨다가 되돌렸다가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지나가는 순간을 한 시절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겠다. 오히려 잊어버리는 것들을 슬퍼해야 할텐데, 잊고 나면 잊었다는 것도 잊을 테니 슬퍼할 줄을 모르게 된다. 그러니까 그게 뭐. 상관 없나.

 반복되는 삶을, 이야기를, 회독을, 두려워하거나 지겨워하지 말아야 한다. 완전히 새로운 건 어디에도 없으니까. 또 완벽하게 똑같은 이야기도 없다. 조금씩 엇박을 주고 조를 바꾸고 크기와 음색을 달리 할 뿐 인간은 인간이라서 다 고만고만하고 아주 작은 변화도 새롭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익숙함을 찾는다. 미지의 세계가 될 뻔한 희지의 세계를 읽고 나는 기지의 세계를 말하는데, 이미 안다 해도 그건 그냥 어렴풋한 앎이고 모르는 세부사항을 알기 위해 들어본 것 같아도 느리게 다시 들여다보고 들어보는 노력이 내게는 좀 더 필요하다. 뭐가 안 풀린다면 나는 그게 부족해서 그렇다. 뻔한 틈에서 아주 작은 걸 새로 알게 되어도 기뻐할 수 있게 되면 무엇이든 더 나아질 거야. 반복을 견디는 걸 넘어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밑줄 긋기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잠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실존하는 기쁨’중. 담그면 아니고 잠기게 하면 아니고 잠그면-금속이니까 자물쇠 같고 금속이 출렁이면 뜨거울 테니까 잠기게 담그면 녹아 없어지고 어두우면 차가우니 금속 같고 차고 뜨겁다. )


-무고한 벌레들이 내 눈으로 자꾸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면 좋을까 할 수 있다면 좋을까
 정말 그럴까
  
 인간으로 있는 것이 자주 겸연쩍었다
(‘여름 연습’ 중)


-밖으로 나가니 검은 모래가 하염없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바다였다
 사람들은 어두운 바다를 보며 감탄했다 놀랍다고, 아름답다고 소리를 지르는 연인들과 가족들

 왜 어두운 바다는 무엇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나
(‘유사’ 중, 흐르는 모래를 실제로 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모래가 유체인 건 모래시계로만 봤다. )


-어린 나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무작정 집을 나선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았는데 자꾸 어딘가에 당도하는 것이 너무 무섭고 이상하다
(‘이것이 시라고 생각된다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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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3-10-27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우 7-8년 전 별점들 보는데 왜 이럼? ㅋㅋㅋ나는 뒤에 평론이 잘못한 거라고 생각한다. 그게 졸라 프레임임... 순식간에 히키고모리 덕후 시 만듦 ㅋㅋㅋㅋㅋ

자목련 2023-10-27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황인찬의 이 시집, 저도 좋아해요. 이 시집은 여름에 많이 생각나요^^

반유행열반인 2023-10-27 16:53   좋아요 0 | URL
봄에 가까운 자목련님께서도 여름 같은 시집을 좋아하시는 군요 ㅎㅎㅎ저는 읽은 세 시집 중 중간에 낀 (나온 시기도 중간인) 사랑을 위한 되풀이가 가장 좋았어요 ㅎㅎㅎ

은오 2023-10-27 22: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치만.... 아직 안 읽은 읽고싶은 책이 너무 많은 걸요..
재독은 어려워...

반유행열반인 2023-10-27 23:19   좋아요 1 | URL
은오님 나 연인 다 읽었다요! 제가 은오님 나이 때는 읽은 거 또 읽고 사골국 우렸었는데 이제 재독은 엄청 드문일이 되었네요 ㅋㅋㅋ 저거는 수학 문제 같은 거 여러 번 복습하자는 다짐입니다(진짜?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