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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젊은 근희의 행진
이서수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6월
평점 :
-20230821 이서수.
읽기 전부터 끌렸다가 단편 소설 한 방에 그 예감이 맞았다 했던 이서수의 소설집 읽기는 여러모로 묘한 경험이었다.
4년 전에 초고 썼던 단편 소설을 겨우 한 주 고치다가 지쳐버렸다. 나는 참 가망 없는 짓을 하네 싶어서 한 편만 고치고 중단했다. 모델하우스에서 예전 애인을 마주치는 이야기였다. 초고를 쓰게 된 무렵에는 갑자기 새로 지은 집을 갖고 싶다!!! 하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모델하우스에 구경갔었는데, 뒤늦게 알았다. 100번 넘게 부은 청약 통장이어도, 매달 2만원씩 부어서는 총액이 청약 자격이 안 됐다. 그게 허탈해서 쓴 소설인데 그냥 소설이라도 하나라도 남아서 좋았다. 나중에 근처 20년 가까이 된 구옥 아파트로 이사 갔으니 뭐 배드엔딩은 아니지만…
오, 그런데 이 소설집은 최소 네 개, 상가 임대하고 자영업 하는 이야기까지 치면 다섯 개가 부동산 소설이었다. 엄마랑 이사갈 방을 보러 다니고, 중절 수술 후 공사 소음 때문에 쉴 수 없는 원래 방을 떠나 공실 원룸에 몰래 숨어들다 쫓겨나고, 엄마가 반지하 빌라를 세 끼고 사는 바람에 나와 애인이 사는 집에 꼽사리 끼고, 부부가 아파트를 못 사서 마음이 아프지만 지구는 내 거고, 덮밥집은 손님이 없어 월세 만큼도 못 번다. 부동산 중개인이 이만큼 많이 나온 소설책 못 봤어. 서수 언니 아무래도 법대 나와서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 놓은 모양이다. 전문가야 제법…
문제는, 너무 많은 부분들이 내가 습작에서 다루던 표현, 소재, 그런 걸 이 언니가 이미 써버렸다. 한쪽만 반지하야 하는 집이라든가, 집 사고 싶은 염원을 담은 커플이라든가, 가망 없는 유튜버라든가(이건 현실세계에 너무 흔하지만), 외계인 타령을 하는 엉뚱한 사람이라든가, 심지어 모델하우스 소설 등장인물 중에 경현이가 있는데 여기도 경현이 나오고, 경현의 부인은 연희인데 이 소설집에서는 연희동을 돌아다녀……이건 너무 어거지지만 ㅋㅋㅋ비슷한 게 너무 많아서 사소한 거에도 아팠다고…왜 이름마저 겹치냐고...
이 언니는 내가 소설을 시작하기도 훨씬 전인 2014년에 등단을 했고, 오래도록 버로우 타다가 2021년에 이효석 대상을 타고 빵 포텐이 터져가지고 발표작도 여러 가지 나오고 이 소설집도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마지막에 실린 구제집 털려다 마는 소설은 읽자마자 이거 되게 오래 전에 썼나 보네…했는데 역시나 등단작이었다.
낙성대 방보러 다니는 소설은 거기도 내 나와바리라서 뭔가 친근했는데, 정작 낙성대에는 살아보지 못했고, 낙성대에 집보러 다니다 까인 기억만 났다. 서울대 후문에 교수회관에서도 한참 올라간 곳의 숲속에 있는 아주 오래된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 입구에 독점적 부동산 하나가 있다. 인터넷에 올라온 집을 보러 왔다니까 그 동 현관까지 데려갔던 중개인 아저씨가 갑자기 버럭 거리면서 사지도 않을 거면 보지도 마! 이러고 화내고서 혼자 부동산으로 돌아가 버렸다. 헐… 내가 집 살 능력 안 되게 빈티나 보였나 보다. 뭐 대출이 절반 이상일 예정이긴 했지만 그래도 거 너무 하지 않나… 사람 골라가며 화내고 집 안 보여주던 중개인 아저씨는 연세 많았는데 아직 살아있나. 다시 큰길로 나와서 길 건너서 맞은편 블록의 부동산에 갔더니, 아파트를 보여달라니까 여기는 30평대만 있는데요, 하고 또 집을 안 보여줬다… 아… 나는 20평대를 살 것 같은 얼굴이었던 것인가… 사실 20평대를 알아보고 있긴 했는데 뭔가 이래저래 빡치는 구석이 많았다. 꼴랑 1억 전세금 밖에 없었지만 대출 3억을 받아서 거기서 멀지 않은 동네에 30평짜리 옹벽 옆 저층 아파트를 사버렸다. 그리고 5년 후에 부동산 급등기에 두 배 넘게 올라 팔아 버리고 같은 동네 소단지 40평대로 갈아타기에 성공한다… 3대가 살 수 있는 집을 손에 넣고 빚도 얻고 2년 만에 집값하락도 얻었지만 뭐… 돈 없어서 찔찔대고 -4300만원 전세금 대출로 시작했던 가난한 신혼시절에 비하면 십 년만에 인생역전… 야 소설 속 방 얻으러 다니는 애한테 이런 이야기 해주면 좀 풀리냐? 쓰고 보니 투기꾼 새끼 같다… 실거주래도 갬블러였다 나...
소설 읽는 동안 앞으로 한 15년 버티고 계속 쓰면 내가 도달할 수도 있을 어떤 평행우주를 만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우리는 두 번째 이서수는 필요없잖아요… 약간의 허탈함도 느껴지고, 그런데 왜 내가 쓴 거 같이 친근하면서도 오십 배는 잘 썼어? 하면서 오랜만에 재미있게 읽은 단편소설집이었다. 아, 이 소설에 언니가 진짜 많이 나오는데, 그 언니는 친언니일수도, 사촌언니일수도, 사랑하는 사람일수도, 당근마켓에서 만난 언니일수도 있다. 나는 언니들이랑 그렇게 꽁냥꽁냥 으쌰으쌰 이런 걸 잘 못해서 (동생들이랑도 잘 못함) 나는 친구도 거의 다 남자사람이고 그래서 아 망했다...나는 소설 독자의 구할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마음과 관계망을 헤아리지 못해 그저 망했다...하고 있었다. ㅋㅋㅋㅋ언니 출몰 소설 정도로 진짜 언니 엄청 나옴… 나만 언니 없어… 나도 제목이 언니인 습작을 한 적은 있는데 그거는 언니한테 원한에 사무친 소설이야… 다 필요 없어!! ㅋㅋㅋ
이서수 작가의 다음 소설들도 기대합니다. 장편소설도 차차 읽어봐야겠다.
+밑줄 긋기
-취하면 가끔 그런 얘기를 했다. 내가 아는 섬이 있는데, 거기 가서 같이 살자. 물고기나 잡아먹으면서. 언니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우리가 그 비린 것들을 매일 먹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언니는 지금도 밤 9시만 되면 KFC 1+1 치킨을 먹기 위해 집을 나서지 않느냐고 덧붙이면서.
-떡집에서 못 팔고 버린 떡 같은 하루.
(‘미조의 시대’ 중)
-꿈과 돈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나도 알고, 언니도 알았다. 꿈을 제대로 이루거나 완전히 버려야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나는 언니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어. 단 한 사람만 믿어주고 지지해주면, 그 사람은 산다고. 그 언니 이제 자살할 생각 같은 거 안 해. 팬이 보내준 육개장사발면 먹고 힘내서 글 써.
-문장은 우리를 보호하는 갑옷이고, 찌르는 창이고, 잘라내는 칼날이고, 이어주는 교각이지만, 대체로 이 채팅방의 문장은 쓰레기에 가까웠다.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중)
-어머머, 근희 가슴이 왜 이렇게 커? 친구들은 오근희의 방송을 보고 나서 나의 상반신을 보더니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벌컥 소리를 내질렀다. 저급한 것들아, 내 동생 가슴 그만 봐! 나는 친구들을 향해 외쳤지만, 사실 세상을 향해 외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동생 가슴 그만 봐!
-언니, 관종이 되려면 관종으로 불리는 걸 참고 견뎌야 해.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언니는 모르지? 한 가지 더 언니가 모르는 게 있어. 관종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걸 왜 모를까. 왜겠어. 언니가 꼰대라서 그런 거지.
(‘젊은 근희의 행진’ 중)
-방금 전 김 사장이 그의 가게 앞을 다시 지나갔다. 이번에도 꼿꼿하게 앞만 보며 뒷짐을 지고 걸었다. 그는 이래도 돌아보지 않나 싶어 한번 매미 소리를 내봤다.
매앰매앰.
김 사장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건지 아니면 듣고서도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건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는 서운함 대신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그를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는 김 사장과 동네 주민들에게.
(‘그는 매미를 먹었다’ 중)
발표 지면
〈미조의 시대〉 ……… 《악스트》 2021년 3/4월호
〈엉킨 소매〉 ……… 《문학과사회》 2022년 가을호
〈발 없는 새 떨어뜨리기〉 ……… 《릿터》 2022년 4/5월호
〈젊은 근희의 행진〉 ……… 《악스트》 2022년 1/2월호
〈연희동의 밤〉 ……… 《문학인》 2022년 여름호
〈나의 방광 나의 지구〉 ……… 《2021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수록 자선작
〈재활하고 사랑하는〉 ……… 〈웹진 비유〉 2022년 11월호
〈그는 매미를 먹었다〉 ……… 〈웹진 비유〉 2019년 9월호
〈현서의 그림자〉(발표 시 제목 ‘K의 그림자’) ……… 〈문장 웹진〉 2014년 8월호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 ………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