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이보그가 되기로 했다 - 피터에서 피터 2.0으로
피터 스콧-모건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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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06 피터 스콧 모건.

‘미덕의 불운’의 자매작인 ‘악덕의 번영’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 그런데 책의 앞머리에 예상 못한 새로운 만남(?) 서문(?) 하여간에 위대한 석학(?)이 사악한 세계의 어두운 면으로 바로 입문하지 않게 완충작용을 해 주는 중이었다. 그래서 아직 본문 못 보고 서문 읽는 중…누구의 글인지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야지.

“나는 그저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니야. 번영을 누리며 잘 살고 싶어!”
나를 너무 혹사시키지 말자, 영혼이 없대도 어느 구석은 가련하게 떨고 있는 나를 위로할 책을 찾자…하다가 책 뒷표지에서 번영을 말하는 또 다른 책을 보았다. 이쪽은 표지도 하얀 게 더 희망적으로 보여서 야, 힐링엔 과학책이야, 하고 펼쳤다.

별 생각 없이, 미리 알아봄 없이 제목이나 저자 대충 보고 책을 모으는데, 신기하게도 내가 좋아할 만한 책들이 내게 온다. 이번 책도 그랬다. 원제 피터 2.0, 과학책 같고 뭔가 열심히 분투하는 사람이 나올 것 같았는데, 예상보다 더 재미있게 읽었다. 책 후반부에서 한 9분의 1쯤 남았는데 이제 막 후두절제술 받는 시점이라 마음은 서늘하고 안 그러려고 해도 자꾸 안타깝고 막판엔 그러긴 했지만…

피터의 경우도 오른발이 시작이었다. (나는 오른발목 인대…이젠 나아가지만 피터는…) 마비는 무릎을 타고 올라가다 대칭이 되고, 그렇게 하나하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 로봇공학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컨설팅 회사에서 기관의 암묵적 규칙을 해독하는 알고리즘 연구하는 일을 하고, 사랑하는 프랜시스와 가고 싶은 어디든 여행을 다니던 피터의 삶의 새 버전이 그렇게 시작된다.
피터는 병증에 대해 대략 예감했고, 관련 논문 뒤지면서 공부했고, 의사들은 이런 저런 검사를 통해 한참 뒤에 진단을 내렸다. 근위축성 측삭 경화증(ALS) 및 기타 운동 뉴런 질환(MND), 루게릭병이라고 잘 알려진 질환.

몸의 많은 부분이 하나하나 기능을 상실하고 눈과 뇌의 감각만 남아 있다가 호흡 부전이나 섭식 곤란으로 대부분 사망하는 이 병에 대해 피터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기회로 여긴다. 기능 마비가 오기 전에 미리 호흡, 식사, 배설을 도울 인공 기관을 넣는 수술을 하고, 이동을 도울 휠체어 기능을 점차 높이고, 움직임의 부자유와 상관 없이 소통하고 세상을 접할 수 있도록 아바타 제작, 인공 음성 기술 개발, 최대한 AI를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이러한 기술이 현실화할 수 있도록 기꺼이 자기 몸을 실험도구로 활용하고, 또 협력하여 함께 MND가 일상을 파괴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단순한 생존이 아닌 ‘번영’을 꿈꾸는 비전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동료들을 모으고 재단과 모임을 조직한다.

투병과 과학 기술, 이렇게 엮으면 책이 딱딱하고 슬플 것 같은데 책의 시작부터 피터는 너무도 활기 넘치고 자신만만한 인물이었다. 자신이 창조한 판타지 속을 넘나들고, 나 답게 살기 위해 자신의 퀴어 정체성에 등을 돌리는 세상 보란 듯이 내내 함께 할 사랑 프랜시스를 만나 피터 2.0의 세상과 그 이후의 다른 세계에서까지 함께한다. 책 자체는 재미있었다. 이렇게나 낙관적이고 긍정적이고, 기술을 세상이 더 나아지고 힘든 사람들이 더 낫게 살 수 있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끝까지 열의를 다한 사람을 책으로나마 만날 수 있는 건 좋은 경험이었다.

이런 책 읽고 항상 두려운 건 수십년까지 생존을 내다본 피터가 2022년 생물학적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 것, 더 걱정한 건 책에 나온 스콧 모건 재단 쳤을 때 구심점이 사라지면서 연구가 흐지부지되고 뭐 그런 것이었는데, 홈페이지를 찾아가보니 재단은 그의 연인 프랜시스와 프랜시스의 조카인 앤드류, 그리고 책에도 언급되었던 동료들, 또 새로운 사람들 등등이 여전히 사진을 올린 채로 기금도 모으고 연구도 하고 피터의 업적을 알리면서 존재하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가상 세계 살라니아에서 영생에 가까운 존재로 남는 상상을 피터는 판타지 소설처럼 적어 놓기도 했다. 소설은 아니고 비전이라고 할까. 끝까지 끝난 게 아냐, 하는 낙천성, 카메라를 향해 하얀 이가 드러나게 미소지을 수 있는 여유, 사랑에 대한 믿음, 놀랍기도 하고, 스스로 위대해지는 사람들이 항상 내가 싫어하는 모습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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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불공평한 현실을 참지 않기로 했어. 그것을 바꿀 거야. 얻어맞고 복종하는 것도, 선택지를 빼앗기고 다수에 맞춰 사는 것도 하지 않아. 내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서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 거야. 그리고 협박에 절대 굴복하지 않을 거야. 그자가 아무리 큰 권력을 가졌다 해도. 앞으로는 기성세력이 나를 괴롭히려고 할 때마다 반격하고, 반격하고, 또 반격할 작정이야. 결국 놈들이 굴복할 때까지.”
“그리고 네가 평화협정을 얻어낼 때까지!”
“아니! 무조건적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
(98, 교장실에서 쳐맞는 친구들 소리 듣고, 자신은 학교생활의 모든 즐거움과 권리 다 털린 열여섯 어린 피터의 다짐. 귀엽다. 그리고 이 마음이 생애 말미까지 이어진 게 놀라워…)

-“그렇고말고. 네가 옳아. 넌 진심으로 오페라를 사랑하지 . 변호사가 돼도 물론 잘하겠지만, 무대감독이 되면 정말 잘할 거야. 네가 ‘더 현실적인’ 다른 일보다 오페라를 선택하는 건 필연이야. 내가 최근에 생각한 ‘논리와 사랑의 법칙Law of Logic and Love’에 따르면 그래.”
“운이 척척 맞는군. 그건 인정하지. 그런데 그 법칙은 뭐에 대한 거야?”
“우주의 이치를 설명하는 법칙이야. 우리들 각자가 인생을 바꾸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어김없이 작동하는 암묵적 규칙이 있다고 생각해. 어느 선까지는 논리가 우리를 이끈다 해도, 결정적 순간이 오면 언제나 사랑이 논리를 이겨.” (115)

-“음! 사립학교 출신이라…에로틱해!” 그들은 내게 직접 말을 걸기보다는 나 들으라는 듯 말했다. “사립학교 출신의 유일한 문제는 고학력 등신이 된다는 거지.”
나는 이 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 속눈썹이 너무 진해서 마스카라를 칠한 줄 알았던, 약간 고상을 떠는 게이 남성이 요들풍으로 말했다. “쟤는 외모도 훌륭하고 뇌도 훌륭해!” 그는 프랜시스에게 말하고 있었지만 손으로는 나를 가리켰다. “나라면 쟤를 꽉 붙잡겠어.” 그가 모의라도 하듯 속삭였다.
“꽉 붙잡을 거예요.” (173, 낭만적 사랑을 믿건 안 믿건, 피터는 운도 좋다. 첫사랑이 괜찮은 게이이고 그게 마지막까지 간다는 거… 자기가 쓴 판타지 소설 속 인물처럼 그렇게 순조롭게 이루어진다는 거… 이 책은 이렇게 기대하지 않은 달달이도 보여준다. ㅋㅋㅋㅋ)

-“우리는 서로에게 힘이 되잖아.”
이제 프랜시스도 흐느끼기 시작했다.
‘네가 강해져야 해. 안 그러면 나는 버틸 수 없어.“
우리는 적대적인 행성에 단둘이 버려진 추방자처럼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온 세상이 영원히 우리의 적이었다. 잔인한 결말이었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하나가 되어 몸을 들썩이며 흐느꼈다. 불행에 무너진 두 늙은 남자에게 싸움의 투지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서로에게 매달렸다.
”이봐. 정신을 차려야 해.“
프랜시스가 먼저 그 블랙홀을 빠져나왔다.
”길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나는 대답하려 했지만 숨이 쉬어지지 않았고, 늦기 전에 내가 쓸 수 있는 방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설명할 적절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357, 스콧-모건 커플의 위기. 피터의 개조와 연구를 돕기로 하던 기업과 협회, 협력자들이 일순간에 등을 돌려 좌절에 빠진 순간.)

-희망이 없어서 죽음에 내몰리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는 슬플 뿐 아니라 견딜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고려해볼만한 대안, 현실적인 선택지가 전혀 없다. 나는 그들에게 희망, 대안, 선택지를 제시하고 싶다. 선택의 여지가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것을 알고 나서 어떤 선택을 할지는 완전히 그들 몫이라고 생각한다. 즉, 나는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지한다. 하지만 삶을 선택할 권리도 그것만큼 강력하게 지지한다.
선택은 진지하게 견주어볼 만한 대안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선택의 허울을 쓴 기정사실에 불과하다. 결정이 이미 되어 있는 상태에서 결정을 내리는 절차를 밟는 것일 뿐이다. 그들이 진정한 의미의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를 바란다. (384)

-다행히 우주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세 가지밖에 없다. 나머지 규칙은 부차적인 것일 뿐이다.
첫째, 과학은 마법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인간이 중요한 존재인 것은 규칙을 깨기 때문이다.
셋째, 사랑은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이긴다.
‘논리와 사랑의 법칙’에 따르면, 세 번째 법칙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강력하다. 이 법칙이 나머지 모든 법칙을 지배한다.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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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3-07-06 16: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희석 하셨군요ㅋㅋㅋㅋ
피터 대단한데요? 저는 누가 맞는 소릴 옆에서 들었을땐
얼어버려서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저항의식이 생겼어요.
저는 싸드 잠시 옆에 두고 스릴러로 희석중이에요ㅋㅋ

반유행열반인 2023-07-06 17:28   좋아요 2 | URL
희석을 넘어 투석 수준이었어요 ㅎㅎㅎ 그런데 또 글로 쓰여진 것들 사실 나중에 좀 미화와 정당화 되는 경향이 있잖아요 ㅋㅋㅋ누가 옆에서 맞을 기미일 때 제가 선빵 날려본 경험은 있습니다… 싸드 새 책 여니까 누가 나왔냐면….보부아르가 튀어나왔습니다 ㅋㅋㅋ 우와 똑똑한 사람이 나한테 사드를 이해시켜줄지도 몰라!!했는데 저한테는 사드보다 보부아르가 더 어렵구나 하는 중입니다 ㅋㅋ니가 더하다 더해…

얄라알라 2023-07-06 2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 [잠수종과 나비]를 매우 긴 시차를 두고 다시 읽었을 땐, 저자의 글에서 점차 혼란스러움 모호함 의지가 약해짐...그런 느낌을 받아서 슬펐어요. 피터는 낙천성을 독자들에게 선물해 주셨나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7-06 22:27   좋아요 1 | URL
낙천성을 가져라!!! 이게 아니고 인간 자체가 긍정긍정 야 우리가 21세기인데 못 할 게 뭐야!!! 이러고 용감한 걸 보여주더라구요 ㅎㅎㅎ난 근데 그런 거 보면 왜 안쓰러움 ㅋㅋ(긍정 잘 안 옮는 부정쟁이…)

Yeagene 2023-07-07 13: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꽤 낙관적으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열반인님 힐링이 되셨겠는데요?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7-07 15:34   좋아요 1 | URL
책 자체는 열린 결말인데, 픽션도 아니고, 현실 결말은 정해져 있다보니 읽는 동안은 좋았는데 읽고 나니 조금 입이 쓰기도 했어요. 미덕의 번영은 역시 꿈인가 싸드 이새끼 1승 ㅋㅋ이러고 지옥에서 웃고 있을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