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아이 기억
아니 에르노 지음, 백수린 옮김 / 레모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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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26 아니 에르노.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답답한 듯 친구가 완전 유교걸이야, 했다. 나는 그 말이 조금은 기가 막혀서 아니 나 불교걸이야, 했다. 열반인이잖아. ㅋㅋㅋㅋ인터넷에서 주워 본 말이긴 했지만 그 덕에 한참 웃었다. 가만 보면 나는 누가 하는 말에 자꾸 아니, 그게 아니라고 한다. 닉네임에는 안티anti-, 反-을 두 개나 달고 말이야. 사실 하나는 쟁반할 때 반이라고 한다. 반대쟁이는 결국 엄청난 반대쟁이를 낳았는데, 여섯 살 작은 어린이는 계란을 부쳐주면 이거 말고 생선, 생선을 구워주면 이거 말고 스팸, 스낵면을 끓여주면 (스)냉면 말고 스라면, 매사에 토다는 심술쟁이 영감짓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작년에 내가 수능 치르고 얼마 안 되어서 나왔다. 엄마는 노벨상 아니 에르노가 탔더라, 그러고는 신간이 나왔던데, 하며 궁금해 했다. 나는 엄마에게 평생 커피랑 책은 안 떨어지게 해준다고 약속을 했던 것 같아서 백수린 소설가가 번역했대, 하고 주문해서 건넸다. 아이들 줄 중고책과 스티커북, 내 책은 하나도 안 사고 파푸아뉴기니 원두만 함께.

 우리집의 대부분의 아니 에르노 책은 엄마가 모았다. 나는 몇 권을 읽어도 시큰둥해가지고 더 읽을 생각이 안 들다가, 아니, 왜 난 별로인 거지? 하고 확인하듯 다시 읽는 거다. 이번에도 별 생각이 없다가 갑자기 아니 에르노는 이중 부정이다. 이런 제목이 떠올라가지고 저거 써 먹으려면 독후감을 하나 써야지…그런데 이미 다정한 이웃과 댓글 주고 받다가 스포일러 해 버린 것…


 1940년에 태어난 아니는 70대 중반쯤 되어서야 1958년의 여자아이에 관해 쓸 수 있었다. 낡은 빨간 수첩에 끄적인 글자들과 사진 몇 장을 뒤적이면서. 1984년에 태어난 나는 비슷하게 2003년을 돌아본다. 거의 50년의 간극이 있는데도, 왜 만18-19세 여자(로 지정된) 아이의 여름은 그토록 혼란한지, 수치심은 왜 오로지 나의(우리의) 몫인지 궁금했다. 허벅지 또는 배 위로 뜨끈한 것을 뿌려대던 남자아이들의 삶에 어떤 티끌도, 조각난 기억도 남기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면 조금 원통하긴 하다. 


 아니에게 수첩이 남았다면, 나에게는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남았다. 사이트 멸망과 함께 묻혔던 흑역사가 대거 인양되었다. ㅋㅋㅋㅋㅋ 나는 주로 그림일기 같은 걸 남겨 놓았는데, 그림과 짤막한 글에 얽힌 사람과 사건이 누군지 대부분 기억할 수 있다. 겨우 20년 전인 걸. 그렇지만 그때의 감정과 서러움은 그 사이 휘발되었다. 그건 꽤나 오래 지고 다니던 마음들인데, 나도 모르게 사라졌어. 나는 이제 외롭지 않고 나를 사랑할 사람을 찾아 헤매지 않아. 내가 욕망하는 사람이 나를 욕망하기를 원했고, 한국 나이 스무살에는 이루지 못했던 그 바람을 스물한살, 그리고 아마도 한국 나이 마흔살까지 큰 좌절하지 않고 살고 있다. (중간중간의 부침 정도는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아직 선거법 개정 전이라 2004년의 총선에서 선거권조차 얻지 못했던 아기 같던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2월, 3월, 6월에 그나마 괜찮았던 남자애들에게 대쉬했다가 미안해, 고마워, 하는 말들과 함께 차이고, 그 여름부터 반 년 간 별로 괜찮지 않은 남자애들 사이를 떠밀려 다녔다. 사랑은 커녕. 즐거움조차 없었다. 외로운 방구석에서 마우스로 끄적끄적 그림 그리고 있었을 어린 내가 조금 가엾다. 그래도 너는, 꿈속에서 안았던 허리까지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빨간머리(파란머리?) 천사를 만나 만20살이 되기 전에 조금 덜 외롭게 된단다. 그 이후의 굴곡은 칠십살 너무 늦나 오십살 쯤 풀어놓기로 하자. ㅎㅎㅎ 


+밑줄 긋기

-그녀는 카푸친 도서관의 <오늘날의 시인들> 총서 중 빌릴 수 있는 모든 책을 빌렸고, 아폴리네르(루에게 바치는 시), 엘뤼아르, 트리스탕 드렘, 필리프 수포 같은 시인들의 시를 긴 구절 필사한다. (122, 크게 의미 없는 구절 같지만 내가 아니 에르노 책 읽는 옆에 루에게 바치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이 딱 놓여 있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다. ㅎㅎㅎ 나는 언제나 50년은 늦는다우. 아니네 6-70년 늦음. 아니 에르노 덕에 카트린M도 읽었다. 20년은 늦게. 이건 늦게 태어난 자의 설움.)


-우리는 다른 이들의 존재 속에, 그들의 기억 속에,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심지어 행동 속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이 남자와 보낸 두 밤이 내 인생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나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는, 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불균형. 

 나는 그가 부럽지 않다. 글을 쓰고 있는 건 나니까.(131)


-지난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사범학교 시절에 대해서 이렇게나 길게 쓰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분야에 종사하기로 약속을 하고, -10년이란 세월에 서명을 했었다- 그것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직업이어서 그 안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여자아이에게 다시 숨을 불어넣고, 종국에는 문학에서 흔히 다뤄지지 않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할 필요성이 내게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인생을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의 우리 모두는 먹고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의무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있어야 할 그곳에 자신이 있다는 혹은 있지 않다는 느낌을 어떻게 감당해나가는 걸까?(170-171, 아니 에르노가 이 책을 15년 쯤 일찍 쓰고, 그래서 고등학생이던 내가 이 책을 읽었다면 인간은 하여간에 다른 개체가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굴레에서 내가 놓여날 수 있었을까? 마흔 살에 수능 준비한다고 깝치다가 인대파열되고 폐색전증 중병 환자 되는 건 면했을까? ㅎㅎㅎ)


+싸이월드 흑역사 그림일기 대방출


저기 근처에 혈전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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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끼 2023-05-27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선생님 ㅋㅋㅋㅋㅋ오밤에 ㅋㅋㅋㅋㅋ저 다 못읽고 불교걸 하나 읽고 빵터져서 댓글쓰러왔어요... 선생님 진짜....... ㅜㅜ.. 근데 다 읽고 댓글달걸 그랬나봐요 ;; 읽으면서 숙연해짐

반유행열반인 2023-05-27 00:44   좋아요 1 | URL
아니 아니에르노 선생님은 숙연하게 쓰셨는데 저는 하나도 사실 하나도는 아닌 것 같고 그다지 숙연하지 않았습니다 ㅎㅎㅎ저 양반도 뭐 나이들어서 활활 타오르는 장작이 되셨으니 그리고 쓰고 싶은 거 다 쓰셨으니 뭐 수치심은 남아도 여한 없는 삶이 아닐지ㅎㅎㅎ

2023-05-27 07: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7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7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7 0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7 1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3-05-27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ㅋ 열반인님의 젊은 시절의 감수성이 잘 느껴지네요~! 약간 흑역사 느낌도 들지만 ㅋㅋ 그림이 귀여우면서도 좀 무섭네요. 역시 20대부터 열반인님은 남다르셨던거 같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5-27 19:34   좋아요 1 | URL
그래도 저 흑역사가 있어서 지금의
탄탄(?)한 제가 있지 싶습니다. 이십대 다크 열반에서 사십대 그레이 열반 정도는 왔지 싶습니다 ㅎㅎㅎ

Yeagene 2023-05-28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흑역사를 대방출하시다니...역시 열반인님 대단하세요 ㅎㅎ근데 내용이 어두워서 웃으며 넘어갈수가 없네요;;;

반유행열반인 2023-05-28 14:08   좋아요 1 | URL
웃으며 넘어가셔도 뭐 ㅎㅎㅎ이십년이면 너무 너무 옛날이잖아요 ㅎㅎ이젠
저거 그린 애랑 저랑 유사점보다 저와 예진님이 더 비슷할지도 모르겠네요. (예진님은
아니야!!! 하실 수도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