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대하여 - 박상영 연작소설
박상영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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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11 박상영.

요즘 애들-김남준
보름 이후의 사랑-고찬호
우리가 되는 순간-유한영과 황은채
믿음에 대하여-임철우

네 소설을 묶은 연작소설집. 작품 시작하는 각각마다 제목과 이름이 써 있다. 소설의 주인물 이름을 저렇게 해놓으니 꼭 여러 소설가 작품 묶은 것처럼 착각이 들어서 웃겼다. 심지어 임철우는 진짜 소설가 이름이잖아…

이전에 읽은 김금희 소설이 연작이었고, 이 소설에도 방송국, 잡지사, 마케팅 부서 직원들이 나와서 처음 읽을 땐 둘이 겹치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는 십 대까지만 해도 내가 앞으로 굉장히 창의적인 일을 하고 살 줄만 알았다. 지망도 언론학부, 광고홍보학과, 신문방송학과 같은 곳이었다. 수시로 1차 붙고 안 간 0대는 언론학부, 정시로 붙은 0대도 신문방송학과가 있는 사회과학계열이었지. 그렇지만 대학 간판만 보고 서열 제일 높다는 사범대에 갔고 그렇게 지금의 내가 되었다. 나중에 언론이나 광고에 대해 질색하게 된 걸 생각하면, 그리고 그 분야들이 얼마나 다른 사람과 협업이 중요한지, 수많은 사람들과 상대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그리로 안 빠지길 다행이지 싶다.
사실 나는 언제 어디를 갔더라도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새로운 길을 궁리했을 것이다. 스무살 이후 거처를 옮긴 게 최소 열한 번인 걸 돌아보면. 나는 머무를 줄 모르는 사람이다. 뿌리가 없이 흘러내린다. 거기에다 나는 믿음이 없다. 어느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그런 부분에서 이 소설집의 임철우랑 가장 비슷했다. 자기 자신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 임철우는 사진을 찍는 커리어로 잘 나가다가가 연인의 죽음과 그에 관한 거짓을 알게 되고는 일을 집어치우고, 이태원에서 이자카야를 하다가 코로나 때문에 폭망하고, 다시 사진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래도 한 번은 그만뒀잖아? 나는 아주 긴 그만두기를 하는 중이다. 그 수단이 수능이 될 줄은 몰랐네...

김남준과 황은채가 인턴 자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 보면서 많이 슬펐다. 내가 신규이던 시절에는 실컷 부려먹더라도 이것저것 가르쳐주고 같이 힘들게 일하던 어른들이 있어서 그나마 견딜만 했던 것 같다. 직장이 힘들어진 데에는 그렇게 새로 온 사람들 적응을 돕고 처음 일하는 젊은이들 많이 가르쳐줘야 할 어른들이 사라지고, 자꾸만 자리를 비우고, 자기 일이 아니라고 발뺌하고, 오히려 자기가 할 일을 물정 모르는 새 사람에게 떠넘기고, 잘 알면서도 물어오는 것들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고, 회피하고, 그러면서 잘 못한다고 혼내고 호통치고, 그런 일들이 자꾸만 반복되어서 였다. 내가 그걸 겪는 일도, 그런 일을 겪는 어린 사람들을 보는 일도 고통이었다. 아직 내 위치에서 누굴 돕거나 가르칠 짬도 안 되고, 내가 자라서 저런 거지 같은 어른이 되지 않을 자신도 점점 없어지고, 결국 환멸만이 남았다. 가까운 사람들은 지금 내가 하는 공부가 망해도 돌아갈 곳이 남았으니 최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나는 밤마다 제발 돌아가지 않게 해주세요, 내 삶을 바꾸게 해주세요, 하고 비는 걸요. 이제는 무엇이 되고 싶다, 무엇을 이루고 싶다, 보다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가 가장 큰 원동력이다. 이러다 정말 돌아가게 되면 진짜 큰일 났다ㅋㅋㅋ 내 미래의 가능형에 관해 너무 비관을 하고 욕을 많이 해놨어ㅋㅋㅋㅋㅋ

예전 어른들이 육이오 때 말야- 아이엠에프 때 말야- 하듯 코로나 유행 시기를 회자하고, 이 병을 겪지 않은 아이들이 뭐래 딱딱- 하는 그런 날이 오면, 그래서 우리가 지나온 시간이 가물가물해지면 나는 이 소설을 다시 펼칠 것이다. 몇십명이 걸리면 엄청난 공포이고 혐오이고 배척의 대상이 되던 병이 몇만 몇십만이 되면 그냥 다 그런 것, 원래 그런 것, 그랬던 날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 중 열에 여덟이 게이가 된다면 아마 둘 남은 이성애자들을 핍박하겠지.(열에 하나 했다가 고쳤다. 하나 남으면 이성애 어렵겠다 ㅋㅋㅋㅋㅋ) 시대가 어느 시절인데 아직도 유성생식을 하고 새끼를 까질러서 지구를 파먹는데 일조하냐. 셋 넷이 되려고 하는 저들은 야만이다. 대상만 바꾸었지 사람들은 끝없이 선을 긋고 부려먹고 욕하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산 하나를 함께 쓰고 빗물에 첨벙첨벙 빠져가며 걷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끝없이 이어지고 모이고 자리 잡고 쓸려 나가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탱하는 세상. 믿음이 없는 내가 거기 얹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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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2-12 00:0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성애자 깨알 챙겨주셨네욬ㅋㅋㅋ 마지막 문장 너무 좋다. 어쩐지 믿음이 느껴져서, 라고 하면 오독이거나 억지일까요? ㅎㅎ 긴 그만두기를 응원할게요.

반유행열반인 2023-02-12 09:20   좋아요 3 | URL
다정한 응원 감사합니다 유수님 ㅎㅎㅎ자꾸 없다 하다보니 사실 믿고 싶다, 믿음을 갖고 싶다, 를 다르게 말하고 있구나 싶기도 했어요. ㅎㅎㅎ나는 차가 없어…나는 여자친구가 없어…이런 거랑 비슷한…ㅋㅋㅋㅋㅋㅋ

Yeagene 2023-02-13 15: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궁금하긴 한데 이전의 박상영 작가 작품 분위기랑 다르다고 해서 망설이는 중입니다.일단 장바구니에 담아두긴 했네요ㅎㅎ

반유행열반인 2023-02-13 19:01   좋아요 1 | URL
소재 탓인지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랑 김금희 크리스마스 타일 살짝 비벼놓은 느낌+퀴어 첨가+적 느낌입니다 ㅎㅎㅎ 젊은 노동자들 이야기랑 세대론이랑 지금 시대 모습 반영하려고 애쓴 느낌이어서 나쁘지 않았어요.

물감 2023-02-14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는 머무를 줄 모르는 사람이다. 뿌리가 없이 흘러내린다. 거기에다 나는 믿음이 없다. 어느 것도 확신하지 못한다.]
이 말에 눈물이 핑 도네요. 제 얘기 같아서요.
글 잘 읽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3-02-14 16:22   좋아요 1 | URL
물감님 울지 마세요 ㅠㅠ 흘러내리는 확신 없는 사람들이 복수형이어도 세상 잘 돌아가는 거 보면 조금 더 그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