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 - 하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20221221 박상륭.

망각은 축복이다. 나는 이십 년 전에 이 책을 한 번 읽었었다는 것과, 젊은 시님과 여인이 시진하게, 끝장나게 섹스를 하는 장면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다. 막상 다시 읽으니 스님과 장로 손녀딸이 하룻밤 사이 스물여덟 번 교합을 하는 장면은 생각만큼 놀랍지도 그리 길지도 않았다. 어린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가! 했을 것이고 지금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을 법하지,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헴헴. 어쨌거나 하권을 읽으면서 내 뇌가 거의 깨끗하게 이 책 내용을 씻어 내린 걸 감사할 지경이었다. 읽는 내내 새롭게 재미있었다.

다만 또 잊고 있던 건…하권에 스님의 수난이 나오고 그럼 나는 재미있겠지…했는데, 그전 앞부분 거의 90쪽가량은 나의 수난이었다. 스님이 읍의 장로 댁 예배 모임 같은 곳에서 자신의 ‘죽음론’에 관한 설법을 한다… 지루하고 어렵다… 아니 작가님도 자기가 무슨 말 하는 줄 알고 썼습니까… 그래도 이 책의 고갱이는 하권 중반부 이후에 연꽃잎 속 보석처럼 담겨 있으니… 혹여 하권 앞 몇 페이지 힘드신 분들은 검은 것은 글자요… 하고 잘 버티길 기원합니다…옴마니팟메훔.

2014년 성탄절에 신자도 아닌 내가 갑자기 예수님이 궁금해져서 마태복음을 읽었다. 내용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다른 건 몰라도 예수님은 좋은 선생님이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은 난다. 이 소설은 예수의 앞선 걸음을 따온 듯 스님이 유리에 들어서는 날로부터 열반하는 날까지 40일을 따라가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 십자가에 매달리지는 않지만(당장 부활하지도 않는 것 같지만) 비슷하게 나무 높은 곳에 매달리는 죽음을 택한다. 스님을 비롯해 모든 인물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스님이 서른세 해 삶을 자주 상기해 죽음을 마주하는 나이조차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는 어리구나… 얼마나 창창한가 서른세 살이라니…) 다만 예수는 자기 죄도 아닌 인류의 죄를 안고 못 박히지만(그걸 가지고 자기 탄생 전 영아 살해에 대해 일언반구도 안 한다고 스님이 뭐라 한 번 함 ㅋㅋㅋ) 스님은 존자 스님, 문하생 스님, 오조 촌장 대사 스님까지 혼자 쓰리킬 하고 그 업으로 한 번 죽으니 앞으로 두 번 더 환생하고 두 번 더 죽어야 하는 거 아닌지… 이건 그냥 갑자기 든 나쁜 생각… 난 이렇게 말로 생각으로 죄 많은 나쁜 놈이니 몇만 번이고 다시 돌아와 쥐로도 굼벵이로도 바퀴벌레로도 뜯겨 죽어야 할 것 같다… ㅋㅋㅋㅋ

직접 언급하지는 않아도 불교와 기독교를 이야기 큰 기둥으로 삼고 있다는 걸 종교를 잘 모르는 나도 짐작할 만큼 여러 인용과 비유가 등장하고, 그 외에도 잘은 몰라도 최소 일곱 개 이상의 온갖 신앙이 차용된 모양이다. 고기, 나무, 온갖 음양 합일의 상징, 그게 다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도 없고 몰라도 상관없었다. 고달프고 힘든 사람의 삶과 노동과 번뇌와 이런저런 죽음, 그 와중에도 소소한 생의 집착을 불러일으키는 보살핌, 사랑, 애욕, 그건 다 아는 이야기이고 읽어도 읽어도 질리지 않는 변주니까… 이야기 속 인물이 괴로울수록 그치 나만 힘든 거 아니지…나만 나쁜 놈 아니지…하는 나란 새끼…

촛불중 새끼가 제일로 미웠는데, 스님을 사랑하는 수도부를 강간하고 죽게 만든 샹놈이라 진짜 죽여버렸으면 좋겠다…야 스님 너 사람 잘 죽이면서 왜 저놈은 안 죽이냐…그랬는데 또 막상 주인공 스님이 혼자 엄청 뛰어나고 어디 가나 다들 그걸 알아보고 유리에서도 읍내에서도 여인들이 촛불중은 안 좋아하고 주인공 스님만 좋아하고 죽은 대사님도 맨날 우리 제자가…그러고 읍장까지 오구오구하는 꼴 내내 보고 그러면 저렇게 비뚤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싶었다. 왜 맨날 악당한테 감정 이입하고 빙의하냐…아닌가 악당 아닌가 칠조 촌장님인가… 촛불중이 칠조된 건지 아닌지는 칠조어론 보면 나오는 건가요… 지금은 말고 아주 나중에요…

+밑줄 긋기
-허나 어쩌면, 먼저 구원해내야 될 것은, ‘종교 없이도 살지 못하지만, 종교와도 살지 못하는’인간이 아니라, 신들인 듯도 싶은데, 발 붙일 곳이 없어 저것들은, 배고픈 외로운 노래나 부르며, 사람들이 사는 언저리로나 비실거리고 다니는 듯싶기 때문이다. (13-14)

-허나 소승은, 한걸음 더 나아가, 지옥이란, 생시에 지었던 죄업으로 인하여 고통받는 장소가 아니라, ‘죽음’ 자체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바입니다. 왜냐하면, 한번 죽은 몸은 두번 다시 죽지 못하며, 영은 영생으로 반복되지만, 육신을 잃어 염태만을 갖고 있는 존재에게는, 고문이란 체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에 고통으로 하여 죄과를 삭이고, 영혼을 맑혀야 한다면, 이 세상 말고 그런 고장이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적 죄가 완전히 구속되지 않은 혼령이 있다면, 그 혼령을 위해선, 한 번 더, 심지어는 억천만 번을 더 이승에 던져, 그 죄가에 해당하는 살을 입히는 것일 터입니다. 살이란 고통의 전 장소인데, 그래서 이제 지렁이로도, 쥐로도, 박쥐로도, 굼벵이나 소로도 태어날 것인바, 생명은 그 크기나 무게에 있어 비록 같다고 할지라도, 형태가 다르다는 그 비극적 한계에 의해, 비로소 고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굼벵이는 참새에게 쪼이고, 참새는 솔개에게 채이며, 솔개는 뱀에게 휘감기고, 뱀은 독수리 발톱에 찢김을 당합니다. 그렇다고 소승은, 이 세상은 고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소승으로서는 몇만 번이고 돌아와, 이 세상은 살 만한 고장이라고 믿고 있는 중이기도 합니다. (82-83)

-장로와 그의 손녀딸, 그리고 그 큰 집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후덕과 호의의 울타리 속에서 나는, 왠지 짐스럽기만 하던 것이다. 천대와 멸시 속으론 스스럼없이 걸을 수 있었던 나는, 후덕과 호의 속에선 그저 몸이 껄끄럽던 것이다. 후덕과 호의에 내가 길들여본 적이 없었던 짐승이어서 그런지 어쩐지는 몰랐지만, 그 댁에서 내게 던져준 부스러기는 내게 너무 기름졌다. (90)

-나는 이 아침에 기도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 내가 죽고, 내가 썩고, 내가 파사근거려지고, 내가 오소록이 무너나고 싶은 것이었다. 전엔 나는, 나를 한 큰 보자기로나 만들어보려고 애도 썼었다. 거기다 해도 싸고, 달도 싸고, 별도 담을 만큼 담아서, 나 저승 가면, 그 어두운 천장에다 걸어놓고, 나 혼자서라도 좀 덜 춥게, 덜 어둡게 살아보려 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 아침에 나는, 갑자기 줄어들어버려, 해도 그만두고, 달도 그만두고, 육안에 보이는 그만큼 한, 어떤 작은 별 하나 삼켜둬둘 터전이 없는 듯했다. (127)

-나중엔, 내 울음에 내가 먹히어들었다가, 내 울음에 내가 놀라 내 울음을 들어보니, 그것은, 구름낀 날 온골 안으로 울려퍼지는 능구렁이의 울음이 되어, 나를 공포에 질리게 했다. 나는 얼마를 더 울어야 좋을지를 몰랐다. 하나의 눈먼 혹성으로, 저 빛나는 세계로부터 제척받아가며,,수내광을 찾으나 그것은 없는 듯하고, 아무 희망도 없는데, 그래도 수락은커녕 포기도 되지 않는, 저 죽음, 저 목숨을 놓고 나는, 글쎄 얼마를 더 울어야 될지를 몰랐다. 울어도 울어도, 울음은 울어도, 울어도 울음은, 울어도 끝이 나지 않고, 그 검은 꼬리를 바르르바르르 떨며, 자꾸 더 깊은 곳으로 자꾸 더 파고들고만 있었다. 그러며 거기서 그것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잠잠히 머리를 숙이는가 했더니, 어느덧, 떠나 꼬리를 제 입에 물고, 흰 배를 쳐들어올리며, 괴롭게 뒤집혀지고 있었다. 나의 아비가 나를 신육으로 구워내려고 하기 전에, 그는 먼저, 내 목구멍에다 손을 집어넣어 저 칙살맞은 한 마리의 번뇌를 뽑아냈어야 옳았었다. 유방으로 하여 내게 빨게 하였던, 어머니가 키운 것은 무엇이었는가? 자식이 아니라 한 마리의 독한 벌레가 자기의 젖꼭지를 물고 있는 것을 알았다면, 그 옌네 분명히, 장대 끝으로라도 떠다 불구덩이에라도 던졌을 것을, 그래서 자식이라는 것은 젖꼭지를 물고도 울고, 자다가도 울고, 웃다가도 울기를 시작했을 때, 강보에 싸아서, 분노에 날뛰는 불의 아가리에 던져넣어 태워버려야 할 어떤 것이다. 그러지를 않는다면 처음에 형체가 없는 듯하다가, 특히 눈물맛을 보고 나면, 습기 아래에서 지렁이가 자라듯이, 뭔지 가늘고 길숨한 것이 그 애의 눈물 아래에서 돋아났다가, 세상 달이슬에도 젖고, 계집들 암내에도 쐬이다 보면 어느덧 자라고 굳어져, 그 대가리를 목젖 있는 데까지 뽑아올려놓고, 눈을 번들거리고 있는다. 앙금된 눈물, 살을 입은 슬픔, 그 배꼽에서 줄기를 빼올려 피우는, 저 번뇌의 흙탕 아래 도사린 몸, 업, 업이다. 업이다, 어비다, 어비다, 어버이다, 그래서 나 세상의 아들, 우니노라, 이 바람 찬 세상, 눈에 먼지를 끼얹으며 우니노라, 우니노라. (276-277)

-그녀가 오지 않았다면, 설움이 그냥 설움이었다가, 글쎄 내가 죽고 난 뒤, 서리라도 되어 내렸을랑가 몰랐을 것이, 그녀로 하여 기름이 되어, 지글거리며 나를 튀김을 해댄 탓에, 나도 그리고 피곤했다. 우리는 피곤했다. 모든 것이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신들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그들의 인간에의 짝사랑이 그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들에게서 궁합 맞춰지기를 강요했을 때부터, 신들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신들의 품속에서 허긴 우린, 한 번도 화백 제도였던 적이 없다.
성자들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마야! 저쪽 건너 동네 니르바나에 앉아서 이쪽 동네 상사라의 붉은 향수물을 바라보는 저 고요한 눈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성자들의 눈길 아래에서 우리는 한 번도 죄인이 아니어본 적이 없어서, 저 죄태는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영웅들은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한 번도 명확히 정의되어본 적이 없는 비겁이 그들에 의해 정의되고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인 것의 자부심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인간인 것이 무엇보다도 우리를 피곤하게 한다. 인간인 것은 우리를 진실로 피곤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피곤해 있다. (298-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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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1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2-22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12-22 06: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열반인님 리뷰 보고 개정판 구매했는데 완전 기대됩니다. 왠지 필립 로스 느낌도 나네요 ㅋ

반유행열반인 2022-12-22 21:22   좋아요 2 | URL
필립 로스도 좋지만 좀 쌈마이(?) 뭔가 마지막 남성호르몬 남은 거 쥐어짜는 느낌이라면 ㅋㅋㅋ 박상륭은 영혼에 전생이랑 내세까지 쥐어짜고 탈탈 터는 느낌이요 ㅋㅋㅋ올해(몇 권 안 봤지만) 제 최고 픽 소설로 저 혼자 임명합니다 ㅋㅋㅋ

Falstaff 2022-12-22 06: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다시 읽어볼 때가 된 거 같습니다. 근데 언제나 마음 뿐. 정말로 다시 읽을까, 생각할 때마다, 아직 읽지 않고 꽂혀 있는 책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더군요.
전 두 아이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한 권씩 사줬습니다.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유행열반인 2022-12-22 21:24   좋아요 2 | URL
이때다 하고 딱 다시 읽으면 좋은 타이밍이 (거의 이십년 만에) 오긴 오네요 ㅎㅎㅎ 저는 저희 어린이들에게는 있는 책 지가 뽑아다 본다면 굳이 안 말리지만 권하지는 않으려구요…니들은 좀 덜 처절한 거만 보고 살렴 실제 세상은 더 각박하니까… 하고요 ㅋㅋㅋ

Falstaff 2022-12-22 21:33   좋아요 2 | URL
책의 내용보다는요, 여태까지 교과서 읽는 건 이도 나지 않은 정도의 아이들 장난이었다, 앞으로 너네들이 겪고 지낼 세상이 이 책 읽는 것보다 더 힘들다, 어려운 것에 익숙해지기 바란다는 의미입니다.
처음 읽으면 열 명 가운데 아홉 명은 첫 문장 읽고 나가 떨어지잖아요. ㅎㅎㅎ

반유행열반인 2022-12-22 21:58   좋아요 2 | URL
강하게 양육하셨군요 ㅋㅋㅋ 저 그럼 열에 하나에 들었나요? ㅋㅋㅋㅋ 그 중 두 번 읽은 건 또 드물겠죠?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