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버스의 극장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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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8 필립 로스.

나는 드렌카가 되어 누워있었다. 나를 잊지 못한 이들이 돌아가며 찾아와, 미친놈들처럼 허공에 딸딸이를 쳐대다 무덤 위 흙이 마를 새 없이 축축이 적셔놓고 사라졌다. 그치만 스콧, 배럴, 새버스, 이하 생략, 나는 거기에 없어요. 너희들이 아직도 바라는 내 다리 사이는 이미 썩어 흙이 되고 없다네.

나는 또 니키가 되어 사라져 보았다. 내 연기를 조형할 줄은 알았지만 내 깊은 슬픔에는 단 한 번도 공감하지 못하던 사람. 그 사람을 떠나거나 떠나려고 시도하다 살해당했다. 왜 여기 있는 나를 두고 엉뚱한 데를 찾아다니고 있어?

나는 로즈애나도 되어 보았다. 추잡한 소문에 휘말려 나를 미치게 만드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고,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나를 떠난 엄마와, 내가 떠나왔다고 자살해버린 아빠에게서 찾기도 하고, 삶을 견뎌보겠다고 술에 중독되거나 중독을 벗어나는 일에 중독되는 나는 내가 보기에도 가엾었다.

그리고 캐시 굴스비도, 미셸도, 크리스타도, 헬렌도 되어보았다. 저마다 겪는 방식은 다르고 다양했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저기 작달만하고 손 마디마디가 관절염으로 휘어지고 삶을 대하는 태도는 저기 달린 29센티미터 좆만큼도 무겁지 않은 저놈의 왕년의 인형술사한테는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 보지 말자는 말 말고는 남길 게 없구나.

인생에서 스쳐가거나 안타깝게도 더 깊숙이 관여하고 얽히게 된다면 절대 좋지 않을 인물이지만, 700페이지 가까이 쫓아다니며 왜 쟤는 저 모양인가, 하는 물음에 나름의 항변을 들으며 새버스를 따라가는 여정은 그럭저럭 재미있었다. 결국 그의 업보는 삶의 끄트머리에서 행복도 만족도 기대도 없이 죽음 말고는 꿈꿀 수 없는 지경으로 그를 밀어뜨리기 때문에 그나마 봐줄 만했다. (못난 인물의 불행은 왜 독자의 행복…) 사실 모든 관습과 규범에 반대하고 조롱하고 희화화하고 제멋대로 사는 새버스는 나랑 많이 닮은 부분도 있어서 아…여기서 더 엇나가면 저런 망가진 광대가 되겠구나… 착하게 살아야지… 싶다가도 어떻게 살아야 착하게 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새버스 덕에 미국 묘지도 두 군데나 가보고, 장례식장, 뉴욕 지하철과 광장 한복판에도, 유대인들 살던 해안 마을, 정신병원, 중산층 가정 외동딸의 방, 암환자의 병실, 방탕한 선원들이 드나들던 항구, 이차 대전 한가운데, 정신 없이 돌아다녔다. 내가 새버스만큼 나이를 먹으려면 그래도 이십년에서 삼십년 사이만큼 남았는데, 나의 끝을 스스로 끝장내고 싶을 만큼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올지, 그때 새버스보다는 덜 못나게 계획을 실행으로 옮길 수 있을지 (나는 생각보다 잘 할 것 같다…준비는 늘 치밀하고 플랜비 씨 디 많으니까…) 잠깐 근심하다 훠이훠이 아직은 그만큼 망가지지 않았다. 소설의 끝은 결코 끝내지 못한 남자의 모습이지만 아쉬울 것 없이 묵직하게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그렇게 끝났다. 그것이 전부였다. “끝Terminado.”’(284)


+밑줄 긋기
-간절히 원한다고? 이거 왜 이래. 아니다, 새버스는 자신이 하는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고, 믿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자신이 어쩌다 이런 실패자가 되고 말았는지 묘사하려고 주도면밀하게 노력할수록 진실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진실한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다. (235)

-“오, 미키 멋졌어. 재미있었어-그 모든 새끼 고양이와 카부즐이. 사는 거 같았어. 그 전체를 부정당한다면 큰 손실일 거야. 당신이 나한테 그걸 줬어. 당신이 나한테 두 배의 삶을 줬어. 나는 하나로만은 견디지 못했을 거야.”
“너하고 네 두 배의 삶이 자랑스러워.”
“딱 하나 내가 아쉬운 건,” 그녀는 다시 울고 있었다. 그와 함께 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그러나 그는 그것에 익숙해졌다-우리는 넓게 퍼진 채로 살 수 있고 우리는 눈물과 함께 살수 있다. 밤이면 밤마다 우리는 그 모든 것과 함께 살 수 있다. 그것이 멈추지 않는 한). “너무 많은 밤을 함께 잘 수 없었다는 거야. 당신하고 섞여서. 섞여서 맞아?”
“뭐 어때.”
“오늘밤 당신이 밤을 보낼 수 있으면 좋겠어.”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내일 밤에 여기 올게.”
“내 말은 저 위 ‘작은 동굴’에서. 나는 더 많은 남자하고 박고 싶지가 않아, 암이 없다 해도. 내가 살아 있다 해도 그러고 싶지 않아.”
“너는 살아 있어. 지금 여기. 오늘밤. 너는 살아 있어.”
“그러고 싶지 않아. 내가 늘 박는 걸 좋아했던 건 당신이야. 하지만 많은 사람들하고 하고 다닌 걸 후회하지는 않아. 그렇게 안 했다면 큰 손해였을 거야. 몇 명은 뭐 낭비된 시간이었어. 당신도 틀림없이 그런 게 있을 거야. 안 그랬어? 당신이 즐겁지 않은 여자하고?”
“그랬지.”
“그래, 상대에게 관심이 있건 없건 그저 박고만 싶어하는 남자들 경험이 있어. 그게 늘 나한테는 더 힘들었어. 나는 내 심장을 줘, 나 자신을 줘, 씹을 할 때는.”
“정말로 그러지.”
그러다가, 약간 횡설수설한 뒤, 그녀는 잠이 들었고 그는 집으로 갔고-“이제 갈게” 두 시간이 되지 않아 그녀는 혈전이 생겨서 죽었다.
그러니까 그게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어쨌거나 영어로는, 나는 내 심장을 줘, 나 자신을 줘, 씹을 할 때는. 그것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당신하고 섞이는 것, 드렌카, 지금 당신하고 섞이는 것. (688)

-하지만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씨발 죽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는가? 어떻게 가버릴 수 있겠는가? 그가 증오하는 모든 것이 여기에 있는데.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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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8 2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ㅎ
열반인님 새버스
순한 맛 (๑•̀∀•́ฅ ✧

저도 요즘 로스옹 책 다시 읽고 있는데
로스옹은 이렇게 소설로 써대면서 스스로 정신적으로 치료 받았던 것 같습니다
문제 많은거 은폐하고
숨기고 탐닉하지 않고
글로 남겨버린!

마지막 인용구 밑줄 쫘악 ~~~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1:43   좋아요 2 | URL
여기 나오는 스콧은 키가 커요!!!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1:44   좋아요 2 | URL
너무 스포일러 같은데도 맨 마지막이 좋더라구요. 와 거장의 끝맺음은 별거 아닌 거 같은데도 묵직. 웅장. 숙연. ㅋㅋㅋㅋㅋ

2021-12-08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2-08 21: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12-08 21:48   좋아요 2 | URL
인정 합니다
이런 상황을
이런 문장으로 쓴 로스옹!
거장!
이번에 열린에서 폴오스터 자전적인 작품 4321 구백 페이지 넘는거 현재 번역중이라는뎅
거의 유대계 미국 이민사 찬향질로 도배를 ㅋㅋㅋ 했더군요 ^^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1:54   좋아요 2 | URL
저 집에 폴오스터 많은데 놀랍게도(?) 한 권도 안 읽었어요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12-08 2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제 이 책 읽어도 되겠군요 ^^ 리뷰는 실눈뜨고 읽었습니다~!!
매운맛에 별 다섯이라니 😆

scott 2021-12-08 22:37   좋아요 2 | URL
열반인님 리뷰는 순한 맛동산 ^^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2:57   좋아요 2 | URL
본의 아니게 아껴보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새파랑님 ㅎㅎ 작정하고 막장인 작품에 별이 후한 편입니다.
제 리뷰에 열심히 물타서(?) 덜 맵게 서재 관리자한테 짤리지 말라고 애쓰는 스콧님 감사드립니다 ㅋㅋㅋ솔직히 쫄려요…

scott 2021-12-08 22:59   좋아요 2 | URL
열반이님
우리
서재방에서
눈치 밥
(ノ≧ڡ≦)💕

반유행열반인 2021-12-08 23:01   좋아요 2 | URL
서재관리자한테 아주 오래 전에 경고 메일도 여러번 받고 맨날 나만 적립금도 안 주고 그래서요…쫓아내지만 말아다오….눈치밥…

새파랑 2021-12-08 23:11   좋아요 2 | URL
사실 저는 이책 당장 읽을 생각은 없었는데 매운맛에 너무 끌리네요 ㅎㅎ
역시 열반인님은 카산드라의 포스가 느껴집니다 ~!!

Yeagene 2021-12-09 13: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뭔가 내용이 어두운 느낌인데요...정말 매운맛인가 봅니다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12-09 17:45   좋아요 0 | URL
어두우면서도 완전 청승 떨지 않고 형식도 다양하게 실험적으로 왔다갔다 하는게 저의 취향에는 제법 맞았습니다 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