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섬의 애슐리 : 테이크아웃 01 테이크아웃 1
정세랑 지음, 한예롤 그림 / 미메시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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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2 정세랑.

사진을 찍거나 찍히기를 즐기지 않는다. 그래도 어쩌다 우연히 누군가 찍은 곳에 내가 남아 있으면 모아두었다. 당장이 아닌 나중에 쓸모가 있었다. 오랜 뒤에 보면 나 생각보다 예뻤어,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보이는대로, 보여지는대로 믿는다. 사실 그거 말고 진짜가 뭐냐 하면 다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야, 아니면 며칠 전 애린 왕자가 하듯 ”…중요한 기는 눈에 비지 않는다카이.” 하는 소리를 좋아한다.
그렇지만 살아보면 보이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평범하게 사는 중에도 뼈져리게 느낀다. 소개팅이나 면접에서 (아마도 내 외모 때문에) 까이면, 아니 당장 아침에 퉁퉁 부은 얼굴을 거울 앞에 마주하며 삶의 의지가 꺾이면, 남들 앞에 매끈하고 반듯하게 보이기 위한 그 모든 노력들, 머리카락을 열판으로 지져 펴고, 얼굴의 굴곡을 미세한 피부색 입자와 적당한 수분과 유분 혼합물로 꼼꼼하게 메우고, 눈구멍의 경계를 어두운 색으로 그리며 눈의 크기와 인상을 좌우할 각도와 굵기 조절에 골몰하고, 유행에 맞는 옷과 신발과 가방을 사고, 표정과 얼굴 각도와 등과 어깨의 각도와 보폭과 특정 상황에서 특정 어휘를 구사할 때의 제스처를 선택하는 그 어마어마한 에너지의 투입을 무용한 치장이라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 책 안의 섬 안의 애슐리는 그런 자기를 만드는 데 별 관심이 없던 것 같다. 사실 자기가 누구고 어떻게 살고 무얼 좋아하고 그런 걸 작가는 설명하지도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냥 섬 사람인데 본토인 비스무레 하고, 출생 비화와 가족 관계와 애슐리가 먹고 살기 위해 어떤 일을 하는지 정도만 보여준다. 그런 애슐리가 우연히 누군가 포착한 그 순간 안에 ‘갇혔고’, 애슐리는 그걸 대중 앞에 드러내는 것에 별 고민 없이 승락했고, 그래서 애슐리의 사진은 그때그때 누군가의 입맛에 맞는대로 캡션이 달린 채 공유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 또한 그가 선택하지 않은 대로 엉뚱한, 나중에 알고보면 개쓰레기인 인간과 혼인을 맺고, 죽을 뻔하고, 누가 구해줘서 겨우 빠져나오고, 본토로 나와 익명 속에 이런 저런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이 세계의 사람도 우리 같은지 생각보다 쉽게 매체 속 사람들을 잊어서 애슐리는 수족관 안에서 춤을 추면서도 알아 보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 보다.

철이 없을 때는 주목 받고도 싶고 널리 사람들에게 보여지고도 싶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했는데 내가 아직 기억하지만 나를 잊고 지낼, 다시는 만나지 않게 된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아, 쟤는 요즘 저러고 사는 구나, 하고 알려주고 싶었다. 텔레비전에 나와 본 건 ebs장학퀴즈 출연했던 18살 때였다. 1단계를 어쩌다 통과해 2단계에서 단독샷을 받기 위해 방송국 분한테 메이크업도 받았다. 분장사님은 내 턱에 점이 있는데 거기 털이 났네, 하고 뽑으려다 아니다 놔두자 하고 뭔가 미신적인 신체 보존을 해주셨지만 3단계 진출은 실패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아이들과 내가 죽치고 살던 피씨통신동호회에 방송 사실을 알렸더니 다들 봤다, 봤다, 하고 신기해했다. 누가 얼평 같은 거 안 했는대도 방송분을 보고는 쪽팔려 죽을 것 같았다. 여름이라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촌출신이라…) 이빨은 커다랗고 뜬금없이 노래 불러보랜다고 진짜 부르고 그게 방송에 나오고 뭐 그랬었다. 진행자 원종배 아저씨가 내 허리 사이즈가지고 성희롱하는 장면은 편집되어 나오지 않았다. 지금도 믿을 수 없다. 아니 시발 교육방송 녹화중에 비비안리가 정답인 문제에서 왜 출연자 허리 사이즈를 운운하는가. 싯팔싯팔 ㅋㅋㅋ
텔레비전에 또 나오려다가 불발된 적이 있다. 역시나 고등학생 때, KBS1 채널에 아주 시청률이 낮을 만한, 십 대들 나와서 장기자랑하는 영파워 가슴을 열어라? 뭐 그런 프로그램 오디션을 보러 방송국에 갔었다. 얼마 후에 예선 통과 연락을 받았고, 본방 촬영 일정이 되면 다시 연락을 주마 방송국 직원한테 분명 그렇게 들었다. 그러나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해 마지막 주 방송을 보는데 사회자 배동성 아저씨가 출연진 중 마지막 밴드의 앵콜과 함께 그동안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종영합니다, 하는 멘트를 날렸다. 아. 왜. 방송 없어지면 없어진다고 알려나 줘야 안 기다리지.
23살에는 대학 졸업 학기에 마지막 기회라고 MBC대학가요제 예선을 보러 또 방송국에 갔다. 예선 광탈. 그리고 취업 준비에 소홀해서 졸업과 함께 백수가 되었다.

살면서 유명해졌다가 마음에 병을 얻고 가장 예쁜 모습과 젊음을 대중에게 소비 당하다가 또 이유 없이, 그저 자기가 자기가 되려는 모습만 보여도 미움 받다가 스러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는 드러나는 삶의 무서움을 알았다. 이제는 최대한 숨는 삶을 택했다. 나란 놈은 왜 이렇게 극과 극인지. 팔로워도 별로 없던 SNS들을 대부분 정리했다. 독서 블로그만 나중에 다시 시작했다. ㅋㅋㅋ 얼굴도 이름도 모를 대량의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지 알았다. 그저 마주한 순간 나에게 눈을 떼지 않는, 그 자리에 한 사람이면 족해. 심지어 나는 일대일 이상의 소통은 너무나 스트레스를 받는다. 셋만 모여도 소외감 느끼거나 기가 빠져. 한 자리에서 한 사람의 관심과 사랑으로도 충분히 행복함을 안다.

정세랑 장편 소설책을 두 권 사 놓고도 아직 안 보고 있다. 그러다가 짧은 소설집을 빌렸다. 정세랑 팬은 아마 못 될 것 같다. 아 별론데, 하다가 또 좋은 지점이 있긴 한데. 얼마 전에 친구랑 이야기하다 내가 정세랑을 안 좋아하는 이유에 그건, 설탕물 마시는 일 같은 거지, 나는 소설을 달달함을 위해 읽지 않아. 누군가에게는 행복이고 열량이고 힘이 되겠지만 나는 모르겠다. 순간의 달달함은 언제나 어두운 세상을 가리는 기만 같아서. 착한 사람들에게 세상을 지탱시키려고 떠넘기는 기분이 싫어서. 나는 설탕물 안 좋아해. 라고 하면서 사실은 조금씩 가끔씩 홀짝 읽고 아 그냥 나도 이거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기원을 하다가 매번 실패하는 것 같다.
이 다음엔 그냥 인간이 제일 나빠, 구조가 문제야, 하는 거나 골라 읽을 것 같다. 읽다 만 1984라든가 ㅋㅋㅋㅋ 달달한 게 나오는 건 주인공을 곧 나락에 빠뜨리기 위함, 이라든가… 나새끼 왜 잔인해. 잔인한 독자여…

+밑줄 긋기
-그렇지만 사람들은 진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심이 없어요. 결국은 이미지와 말들의 싸움이 될 거고, 나는 소모 당할 거예요. 옳다고 믿는 일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나를 소모할 거라고요.

-사람들은 심지어 내가 그 애슐리가 아니라고까지 할 것이다. 닮은 여자가 외국인과 거짓말을 한다고 할 것이다. 아무도 원래부터 그 애슐리가 없었다는 걸 알지 못하므로, 나는 사진의 연속선상에 서서 여러 버전의 이야기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플래시에 눈을 감지 않고 말하겠다. 그것만으로도 세계에 지지 않게, 소모당하지 않게 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섬에는 요즘 어떤 이름이 유행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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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7-02 23: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방송이 없어지지만 않았다면 연예인 될 뻔 하셨군요?ㅎㅎㅎㅎ
저도 달달한 얘긴.. 체질에 안 맞아서.. 그래서 로맨스 소설도 잘 못 읽는 잔인한 독자 2입니다.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1-07-03 08:07   좋아요 2 | URL
무상하고 무상한 걸 알려면 삼십 년 이상을 살아야 하는구나 싶더라구요 ㅋㅋㅋ니가 다 아는 줄 알았지? 하는 걸 알려면 삼십 년 더 살아야 될 거 같고 ㅋㅋㅋㅋㅋㅋ

scott 2021-07-03 00: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이제 방송국까지 가지 않으셔도 ✌️로그에 출연을! 열반인님 기타 치는 모습 만 봐도 플친들 팬 할래요 라고 외쳐요 ^ㅅ^

반유행열반인 2021-07-03 08:08   좋아요 2 | URL
실상은 기타를 칠 줄 모릅니다 에 가까운 실력입니다 ㅋㅋㅋㅋㅋ 유튜브 시대는 저 진짜 이해가 안 되더라구요. 자기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 코로나 확진됐다고 울면서 치킨 먹으면서 그걸 방송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뭘까요 브이로그란...

Yeagene 2021-07-03 1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블로그 등에 얼굴 아무렇지도 않게 공개하는 사람들 신기하더라구요..아직 쓴 맛을 안당해봤나...싶기도 하고요 ㅎㅎ
열반인님은 정세랑 작품을 설탕물로 보시는군요.ㅎㅎ 저도 정세랑 작품 사놓은 게 있는데 자꾸 미루고만 있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7-03 15:10   좋아요 1 | URL
설탕물도 몸에 나쁜 건 전혀 아니지만 풍미까지 후하게 쳐서 사양벌꿀 물 쯤으로 할까요ㅎㅎㅎ안 그래도 제 취미가 그렇게 온갖 것 올려둔 사람들 구경하는 음침한 짓(?)이라 그치만 무해합니다... 구경만 합니다...(음침)

2021-07-03 14: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5: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3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