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 그림자 - 2010년 제43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민음 경장편 4
황정은 지음 / 민음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20210620 황정은.

디디의 우산에서 아마도 먼저 가 본 낡은 전자상가를 이 책에서도 드나들었다. 거기 어둡고 좁은 방 안에서 기계 속을 들여다보고 고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은교와 무재는 냉면과 갈비탕을 먹고, 메밀국수도 해 먹고, 배드민턴도 치고, 섹스는 안 했다. 가진 게 없고 그냥저냥 하루하루 일해서 먹고 사는 삶인데 사람들이 불안이 없고 감정도 없이 덤덤해서 나는 그게 이상했다. 겨우 분노라고는 가동 헐어낸 자리에 벌어지는 시끄러운 무대 소음에 씨팔 씨팔 일을 못하겠네, 하는 여씨 아저씨의 푸념이 금세 당구장으로 멀어진다. 야만적인 앨리스씨에서는 아주 씨팔로 도배가 되어 있던 것에 비하면 이 소설은 진짜 맑게 끓여낸 조개탕 마냥 담담한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무재씨랑 갯벌에 삼만원 짜리 중고차를 타고 달려 가서 조개탕이나 먹고 구운 약단밤이나 까먹으며 천천히 사찰을 향해 올라갔으면 싶었다. 가마 가마 슬럼 슬럼 하고 같은 말을 주고 받고도 싶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모습과 별 다르게 살고 있지도 않구나 싶었다. 날이 좋아서 집안 온창을 열어두고 드나드는 바람을 읽으며 책이나 읽고 앉아 있으니 담담한 하루 아닌가. 그리고 무재랑 은교처럼 치킨도 시켜 먹었다. 다섯이서 순살 한 마리를 나눠먹으니 적긴 했지만 그러고나서 또 닭가슴살 삶은 걸 겨자 양념을 해서 야채랑 섞어 먹었는데 겨자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맵고 쓰다고 엄마한테 투덜거려서 조금 덜 담담한 하루였다.
그래서 그림자가 어쨌다고. 나는 쨍한 해 아래나 저녁에 환히 켠 노란 스탠드불 아래에서나 있구나 하던 그림자를 황정은 선생은 일으켜도 보고 따라가도 보고 그림자 따라 가는 사람 붙잡게도 시켜보고 이거저거 다 해 보았구나…그림자 따위 없으면 뭔가 더 가벼울 것 같은데.

+밑줄 긋기
-실린 것도 몇 가지 없이 박스 몇 개하고 스티로폼 조각하고 비닐 같은 것들이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보며 이런 것들 때문에 죽는구나, 사람이 이런 것을 남기고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다가 조그만 무언가에 옆구리를 베어 먹힌 듯한 심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예요.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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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6-21 14: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체적으로 새하얀 느낌.... 저는 일독 때 다 읽고도 한참동안 흰 백자 백의 그림자인 줄 알았었어요. 좋음......😍

반유행열반인 2021-06-21 19:06   좋아요 0 | URL
왜인지 이슬아 선생님 엄마 아빠 연애담 듣던 생각도 나고 d랑 dd도 생각나고 그랬어요. 기왕 할 거면 만의 그림자 하지 스케일 작게 백이라서 헷갈리게 했네요. 하얀 그림자는 일도 안 나오면서 ㅋㅋㅋ

2021-06-21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6-21 19:05   좋아요 1 | URL
네 ㅎㅎ나쁘진 않은데 황정은님 팬? 빠? 우르르인 게 신기해요 ㅎㅎ저는 연년세세가 제일 잘 읽혔어요.

유부만두 2021-06-25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좋았는데, 로쟈는 이번 ‘한국작가‘ 신간에서 황정은 소설인물들을 까고까고 갈아버렸더군요.

반유행열반인 2021-06-25 20:44   좋아요 0 | URL
그럴 것 같아서인가 저는 이현우 선생님 책을 하나도 안 읽었고 앞으로도 계획이 없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