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eBook] 사랑하는 토끼 머리에게 ㅣ 테이크아웃 9
오한기 지음, 소냐리 그림 / 미메시스 / 2020년 3월
평점 :
판매중지
-20210207 오한기 글. 소냐리 그림.
이웃님의 정지돈 리뷰를 보다가 오한기가 생각났고 나는 오한기를 소설계의 마릴린 맨슨이라는 이상한 말로 지칭했다.
마릴린 맨슨. 거의 20년을 좋아했다. 금기를 일부러 조롱하고 괴기와 미가 닿는 지점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와 음악이 시꺼먼 마음에는 와닿았다.
뮤직비디오나 무대에서, 그리고 그가 그린 그림에서 맨슨이 여성을 도구와 장치로 다루는 모습을 지켜보면 그동안 이 인간이 미투에 언급 안 된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다.
그의 예전 연인이었던 에반 레이첼우드가 그녀가 십대였던 교제 당시 맨슨이 자신을 그루밍하며 통제했던 일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맨슨은 이를 부인하고 이상 행동을 보여 경찰까지 출동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스무살의 어떤 짧은 날들을 떠올렸다. 결국 만나지 않게 된 어떤 남자의 전화를 받고, 당신은 처음 만난 날부터 반복해서 내가 싫다고 해도 원하지 않는 일을 했고, 나는 그 일로 인해 괴로웠고 지금도 괴롭다고 했다. 남자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너에게 잘해주려고 했고, 네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고 도왔고, 너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네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나는 아니었다. 내가 싫다고 했던 일이 싫은 게 아닌 것처럼 만들려고 시도했었다. 그 사람을 좋아하려고 애써 보았다. 그 사람에게 맛있는 걸 사 주고 선물도 주고 대화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럴 수록 나와 접점이 없고 말이 통하지 않는 것만 확인했다.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나는 몸도 마음도 아팠다. 그 사람이 사 주는 맥도날드나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으며 쉼없이 재잘재잘 말을 늘어놓았지만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 울었다. 빨갛게 길바닥에 흩어진 장미꽃잎들을 보면서도 울었다. 나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았어, 처음부터 끝까지.
흠. 맨슨 안녕.
호칭과 명명은 중요한 일이다. 토끼 머리는 토끼 머리가 싫어서 벗어나려고 발악을 해 보고, 그게 안 되니 그 이름에 맞추기 위해 토끼가 되려고 또 애를 써 보았지만, 행복하지 못했다. 책 말미의 작가 인터뷰를 보고 나서야 아, 이 토끼 머리가 ‘가정법’에서 머리 잘리고 불타 죽은 그 토끼 머리인 걸 알았다. 책이 나온 순서는 이 책이 먼저인가 보다. 토끼 머리는 토끼 머리를 대체할 다른 이름을 스스로 구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적확한 이름으로 불리워야 했던 게 아닐까 잠시 생각했다. 작가가 토끼 머리 자리에 다른 말로 어떤 것들을 넣고 싶었을까도 궁금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오한기 이름에서 느낀 것처럼 소설에서 매번 오기와 한기를 느끼지만 거기까지지, 이 소설이 잘 쓰여졌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허술하고 매끈하지 않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상상과 이미지만 약간 느낌이 있는 정도였다.
흠. 맨슨 안녕.
미메시스 테이크아웃이라고, 단편 하나씩에 일러스트를 묶은 시리즈이다. 전에 정용준 읽었고, 오한기 두번째고, 생각난 김에 정지돈도 빌렸고, 최은영이랑 정세랑도 눈여겨 보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이 시리즈는 그저 그렇네...단편집 한 권 보면 그 중 한 편이라도 건지는데 딱 한 편이 딱 한 방이 없으면 좀 망한 느낌이다. 작가들도 다른 소설과 묶지 않을 만큼 아주 큰 애착 없는 소설 툭 던지는 건 아닌지...이건 그냥 넘겨 짚음이고… 앞으로 세 권 더 보고 판단 내리기로 함 ㅋㅋㅋ
+밑줄 긋기
-나는 더 이상 캐리커처가 아니라 정밀하게 그린 초상화였다.
-창밖에는 뜨거운 햇빛과 녹색 이파리가 울창한 나무들이 보였다. 햇빛은 녹색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 끔찍한 광경을 피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분명히 눈을 감고 있었는데 보였다. 날개 달린 토끼들이 나뭇가지 위에 떼 지어 앉아 있는 광경이. 머리만 비정상적으로 큰 토끼들이었다. 토끼들은 날개를 퍼드득대며 나뭇잎을 뜯어먹고 있었다.
저리 꺼져! 이 괴물들아!
내가 소리쳤다. 그러자 그들은 나를 일제히 노려보며 괴상한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네 자리를 남겨뒀으니 언제든지 이리로 오렴.
그들 중 하나가 입을 오물거렸는데, 이런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내 인생이 그에게 달려 있는 듯해서 불쾌해졌다. 그때 그가 눈을 감아 보라고 명령하듯 말했다. 그의 말에는 거부하지 못할 힘이 서려 있었다.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 앞에서 한없이 약해졌고, 그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뭐가 보이지?
잠시 후 그가 물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커다란 접시 위에 놓여 있는 토끼 통구이 요리를 앞에 두고 있었다. 가만히 집중해 보니 나는 둘이었다. 접시 위에 있던 토끼 통구이도 바로 나였던 것이었다. 나는 온몸이 불에 그을린 채 접시 위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나이프를 들고 토끼 목을 썰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목이 잘려 나갔고, 토끼 머리는 몸통과 분리돼 테이블을 제멋대로 굴러다녔다. 나는 피 묻은 나이프를 든 채 나를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토끼 머리는 울고 있었다. 아니, 웃고 있었나. 더 이상 기억나지 않는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207/pimg_7921671142832110.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