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
신박진영 지음 / 봄알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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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2 신박진영.

중학생 때, 학교 애들 중에 가출했다 돌아온 여자 아이들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수군댔다. 티켓다방 다니다 잡혀왔대. 창녀촌에 있었대. 그 조용한 말에는 오염된 존재, 우리와는 달라진 누군가를 멀리 밀어내는 힘 같은 게 실려 있었다. 아빠의 욕설과 폭력, 기물파손, 엄마와 동생을 학대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늘 집을 뛰쳐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돌아온, 혹은 돌아오지 못한 여자 아이들에 관한 소문은 가출 욕구를 참게 만들 만큼 강력했다. 나가봤자 갈 수 있는 곳은 그런 곳뿐이라는 체념.

아빠는 내가 수능을 앞둔 나흘 밤 연속으로 만취해서 장롱을 발로 차 부수고, 욕하고 소리지르고, 엄마를 죽이겠다고 목을 조르고, 텔레비전을 최대 볼륨으로 틀어놓고, 광란에 가까운 발작을 일으켰다. 이상하게도 내가 고입 연합고사를 앞두거나, 대학 졸업 후 취업을 위한 시험을 준비할 때처럼 중요한 일이 코앞으로 다가오면 무슨 방해 공작을 펼치듯 저런 짓을 하는 사람이었다. 폭력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엄마는 오히려 며칠 잠을 제대로 못자서 몽롱한데다 극도의 불안 상태인 나를 달래며 수능날 아침밥과 도시락을 챙겨주고, 안정에 좋다는 대추차가 담긴 보온병까지 들려주었다. 전날 술 마신 아빠는 아침까지 자고 있었고, 삼촌이 차로 한 시간 거리의 시험장에 태워다 주었다.
안정에 좋다는 대추차를 시험 시작 전 목을 축이기 위해 한 모금 마셨고, 불행이 시작되었다. 2교시 수리 영역 100분, 3교시 탐구 영역 120분 내내 배가 터질 것 같은 요의를 느꼈다. 그때는 시험 중 화장실 출입이 허용되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오줌 쌀 것 같아서 머리를 쥐어뜯고 나중에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문제를 억지로 풀었다. 제2외국어까지 다 마치고 시험장 나서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이 몇 단계 낮아졌다는 강력한 예감이 들었고, 저녁에 가채점을 해보니 실제로 평소 모의고사보다 20점 정도 하락한 점수였다. 아 대추차...이후로도 쳐다보지도 않는 대추차…
반전은 그 해 수능이 미친 난이도라 다른 애들은 5-60점씩 마구 떨어졌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내 점수는 평소대로 유지된 거나 다름없었고 남들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대학에 다 붙어버려서 그 중에 하나를 골라서 갔다.

학교 이름 덕에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쉬웠다. 그렇다고 떼돈 번 수준은 아니고 (첫 달은 중개소에서 수수료로 가져가고 쉽게 잘려서 안정된 소득도 아닌…) 두 개쯤 하면 60만원으로 월세 내고 간신히 생활비와 용돈 쓰는 정도였다. 덕분에 스무살 내내 가출의 연속이었다. 아빠가 때리거나 엄마를 못살게 굴면 며칠씩 집을 나왔다. 돈도 있고, 불쌍해하며 재워주는 자취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아예 엄마를 데리고 탈출 시도한 적도 몇 번 있었는데, 궁핍한 상황에 엄마는 결국 울면서 다시 집에 돌아가곤 했다.(완전한 탈출과 이혼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 뒤 마지막 가출로 겨우 이루어졌다.) 대학 입학부터 졸업 후 취업할 때까지 과외 말고는 다른 아르바이트나 소득활동을 해 본 적이 없다. 당시 최저시급에 비해 과외로 벌 수 있는 시간당 소득은 3-5배나 높았다. 일주일에 8시간만 아이들을 가르치면 저축까지는 몰라도 생존은 가능했고 공부와 동아리활동도 어렵지만 지속 가능했다. 운이 좋았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항상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 보는 버릇이 있어서, 만약 그때 시험을 망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하기 힘든 대학을 나왔다면, 대학을 나왔는데도 결국 취업에 실패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상상해 본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데. 나와 엄마는 아직 아빠랑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뱉던 욕설대로 정말 우리를 죽일 것 같다 싶어 결국 뛰쳐나왔을 것 같긴 한데, 그러면 뭘 해서 먹고 살았을까. 마지막으로 집을 나왔을 때 나는 취업 준비 중이었고, 엄마는 동네 고깃집이라도 취업해보려고 면접을 봤는데 너무 연약해 보인다고 거절당했다. 지역 여성인력개발센터에 가서 교육을 받고 중개소를 거쳐 아기돌보는 일을 하게 되셨다. 내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4년 간 베이비시터일을 계속 하셨다.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단신에다 체구가 작고 쨈병뚜껑 같은 거 돌려서 여는 것도 잘 못할 만큼 힘이 약하다. (학교 다닐 때 체육을 제일 못했다.) 육체 활동에 취약하니 가사도우미나 아기 돌보는 일은 겨우 가능했을까.

이런저런 밥벌이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생각으로 헤매다가 가장 끝에는 이런 걸 선택이라고 해도 될까 싶은 무서운 경우에 다다르기도 했다. 육체 노동이든 사무직 노동이든 내 다른 노동력을 사 주는 곳이 없다면 결국에는 성을 파는 일까지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가정. 성이라는 게 사고 파는 대상이 되는 현실을 보여준 건 대중매체의 선정적인 탐사보도나 사건사고를 다룬 기사, 임권택의 ‘노는 계집 창’이나 김기덕의 ‘나쁜 남자’, ‘사마리아’ 같은 끔찍한 영화들, 김성모가 성매매집결지를 소재로 그린 수많은 만화 시리즈물 같은 콘텐츠들이었다. 실제로 주변에서 성매매 경험을 들은 건 친했던 대학 동기가 군대 시절 오피스텔 성매매를 몇 번 했었다고 해서 놀랐던 일이 유일하다.

이 책의 저자 신박진영은 이십 년 가까이 반성매매 운동을 하며 현장에서 성매매 피해자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접하고 그들의 탈출과 성매매방지법 제정 등을 위해 활동해 온 사람이다. 거기에 여성학 연구까지 더해져 이 책은 한국 성매매의 역사부터, 국가의 묵인을 넘어선 성매매의 육성, 촘촘하게 계획되고 짜여지는 경제적 착취와 권력과의 유착과 계급 간 갈등과 성차별과 성 착취 같은 구조적 문제, 현실의 성매매 여성이 겪은 흔한 참혹한 사례들, 성매매를 합법화한 독일과 아예 비범죄 자유화한 뉴질랜드의 실패, 노르딕 모델로 불리는 스웨덴의 성구매 불법화 사례와 같은 정책으로 나아가자는 주장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전까지는 성인 간의 자율적인 거래까지 막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성적 동의와 합의는 거기에 자본과 경제적 논리가 들어서는 순간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어버리고, 모든 노동이 착취의 가능성이 있지만 특히 성의 영역은 노동으로 포함시키거나 합법화하거나 자유화하는 순간 벌어지게 되는 착취의 악순환과 인권침해가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책의 사례와 논리를 따라가다보니 납득하게 되었다. 몇 년 전에 마이클 센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었는데 성을 명시적으로 거래 대상으로 놓는 일의 위험과 문제는 그 책에서 확인했던 품위와 가치, 강압과 불공정성과, 부패와 타락을 경계하는 일까지 연결되어 보였다.

생존을 걱정하지 않고 노동의 대가가 제대로 보장되는 사회, 성을 판매와 구매 대상으로 고려할 수 없는 세상(오늘 날 인신매매와 노예제가 용납되지 않듯이)이 오면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 것이다. 내가 곤궁해지는 날이 와도 최악의 수치심과 모멸감을 감수하며 먹고 살 생각을 품지 않아도 되고, 영화나 만화 속에서 여성의 몸과 마음과 삶이 갈가리 찢겨 뜯어 먹히는 걸 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려면, 그런 세상이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나 성의 구매와 판매가 어쩔 수 없는 것, 당연한 것이라는 편견을 없애는 일부터 시작일 것 같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당사자-되기를 선택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문제제기와 주장을 듣는 게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면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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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1-22 11: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검색해보니 2012년이네요) 변영주 감독의 영화 ‘화차‘ 를 보았어요^^
그때 그 내용이 너무 끔찍해 며칠간 힘들었거든요~~
그 힘든 이유중에
저한테 딸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것이었을 거예요^^
내가 여차해서 경계밖으로 밀려나면 나의 딸아이가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었고 그렇게 만드는 사회가 너무 싫었어요**
반유행님의 글이 너무 그때 제 생각과 똑같아 많이 공감했습니다^^
글의 마지막 단락이 제가 항상 품고 있는 유토피아예요^^
근데 ㅠㅠ ㅡ이 표시가 절로**

페넬로페 2021-01-22 11:33   좋아요 4 | URL
아! 체구 작고 체력 약한 저와 딸아이^^
이것도 격하게 공감**

반유행열반인 2021-01-22 11:34   좋아요 3 | URL
저는 영화 화차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궁금해서 원작소설은 한 권 갖춰 두었습니다. 부족한 생각과 글에 공감해주시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해 함께 꿈꿔주셔서 감사해요. 진짜 책 읽다 알게되는 여성들 이야기 죽음 이야기 들으면 저절로 ㅠㅠ

반유행열반인 2021-01-22 11:37   좋아요 4 | URL
작고 약한 사람도 경계 밖으로 내몰리거나 소모되어 일찍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진보된 거겠죠. 그런 의미에서 제가 밥벌이 하고 사는 건 과거보다는 나아진 것도 같지만 아직도 불쌍하게 죽는 여자랑 아이들 있는 (많은) 거 보면 갈 길 멀다는 생각도 듭니다.

하나 2021-01-22 13:18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때 아르바이트라고는 과외만 해본 사람이었다가, 가게하면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게 됐는데 그 중에서 친해진 언니가 하나 있었어요. 끝내 사적인 관계로까지 발전되지는 못했지만, ˝그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라고 엄마가 말씀하실 때마다 생각이 멈추게 됩니다. 그런 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건가. 언젠가 어떤 책에서 ˝우리 중 누구도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드물었다.˝라는 구절을 보고 한참을 잊을 수 없었는데, 생각이 많이 필요한 주제 같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을 지나와서 여기 도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반유행열반인 2021-01-22 13:54   좋아요 2 | URL
저는 부모님 가게 하는 거만 봤지 직접 장사를 해 본 적은 없는데도 자영업이 절대 쉬운 일 아닌 걸 알겠던데 하나님도 대단하심ㅋㅋㅋ노동자도 어렵고 자영업도 어렵고 대체 먹고 사는 건 왜 어렵냐!!! ㅋㅋㅋ 마지막 문장 왜 눈물 찡하냐 ㅋㅋㅋ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고맙고 도착한 곳에서 환대해주셔서 또 고맙습니다 ㅋㅋㅋㅋ

2021-01-2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3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3 1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