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랑, 매기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8
김금희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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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1 김금희.

식탁에 둘러 앉아 있는데 내가 앉은 의자가 삐그덕거렸다. 내가 조립한 이케아제 의자였다. 남편이 그 의자 조립할 때 썼던 육각렌치를 짐정리하다 보았다고 했고 나는 웃었다.
그거 전동드라이버로 했어.
어째서 조립하는 모습은 보지도 못했는데 그 조그만 렌치를 썼을 거라고 상상했을까 싶어 웃겼다.
전동드라이버 사길 잘 했어. 그런데 그냥 전동드릴 살 걸 그랬어. 벽 막 뚫고 앙카도 탁 박아 넣을 수 있는 걸로.
내가 덧붙인 말에 큰아이가 앙카가 뭐야, 했고 부모는 앵커, 닻, 이라고 동시에 말했다.
그 순간 닻이라는 말을 내가 좋아한다는 걸 느꼈다. 나를 붙잡고 흔들리지 않게 해 줄 무언가를 누군가를 오래도록 원했다. 이제 크고 무겁고 아름다운 닻을 갖게 되었으니, 만족할 만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여겨왔다. 오늘은 눈보라를 헤치고 구청에 혼인신고를 하러 다녀온 지 딱 십 년이 되는 날이고, 작은아이가 태어난지 딱 천 일이 되는 날이다. 내 삶의 닻이란 그렇게 오래된 다정한 사람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저녁 식탁 앞에 앉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 배는 얼마나 허약하고 잔물결에도 심하게 흔들리는지. 닻이 여러 개라면 폭풍우에도 좀 더 굳건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무게를 감당하는 일만도 버거워서 가라앉고 싶은 충동을 종종 느꼈다. 너는 왜 바다로 나아가지 않고 자꾸만 방파제나 항구 같은 것이 되려고 하느냐. 한강가의 움직이지 않는 유람선 레스토랑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고선박이 되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물 속에 오래 가라앉힌 쇳덩이는 녹이 슨다고 스스로를 달래면서 가끔 물밖으로 끌어 올리고 멀리 나아간다. 그리고 다시 돌아간다. 영원히 머물 곳은 없다. 봄에 이사를 한다. 주기적으로 직장이 달라진다. 아이들은 자라나고 떠나간다. 어느 기간이나마 고정하고 안전하게 돕는 것들에 고마워하며, 같이 있는 동안은 나도 꼭 붙잡으려 애쓰는 일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직장에서 코로나19 때문에 쓰지 못한 회식비 등을 책 사는 예산으로 돌려줘서 책처돌이는 신이 났다. 한 해 동안 꽤 많은 책을 내 돈 안 내고 갖췄다.(그리고 그런 책은 읽는 일이 미뤄지기 쉽지…) 우록리 할머니들 구술생애사 모음 ‘할매의 탄생’, 드라마 나오기도 전에 고르고 여전히 안 본 ‘보건교사 안은영’, 다윈 새 번역본 ‘종의 기원’,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현미경으로 본 커다란 세상 ‘미생물’(높은 책값에 비해 책 만듦새는 기대에 못 미쳤다...정작 보라고 내밀자 큰아이는 징그러워! 하고 외면해서 슬픔…)
그리고 남은 잔액 털어서 김금희 소설 ‘나의 사랑, 매기’를 골랐다. 한 권이지만 분량은 중편 쯤 되려나. 쌀종이에 꽃과 잎과 커다란 알뿌리가 달린 이름 모를 식물을 그린 표지, 세로폭이 길고 작아 손에 쥐는 책느낌이 좋아서 직장에서 책을 나눠주는 날 동료들에게 예쁘죠, 하고 자랑했다. (다윈 두 권 왔을 때도 표지 질감 신기하다고 여기저기 만져봐요, 해서 이미 책변태로 소문 났을 것 같긴 하다…)

매기와 재훈은 이십 대에 잠시 사귄 연인이었고, 삼십 대에 다시 만나 또 잠시 사랑한다. 배우인 매기는 제주도에 아이와 남편이 있고 서울에 촬영차 올라올 때마다 마포구에 사는 출판사 직원인 재훈을 만난다. 처음 헤어질 때에도 매기는 재훈에게 이런저런 말로 상처를 주었는데, 다시 만나는 동안에도 재훈은 매기가 정한 룰과 제약 때문에 열받으면서도 매기를 그리워하고 계속 만나고 싶어한다. 나는 이 책을 늦게 보았다. 읽는 내내 역시 김금희 너무 좋아, 잘 써, 이런 이야기를 이만큼 쓰는 구나 싶은 동시에 콩콩 찧기는 마늘이 되는 기분이었다. 살살 좀 빻으면 안 될까… 왜 이렇게 디테일이 살아있나요 금희 언니...


+밑줄 긋기
-매기 어록. 책 속 인물이니 매력적이지 진짜 이런 사람과 사랑한다면 수명이 많이 줄어들겠구나...싶었다.
“잘 지내, 미래는 현재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단지 긴 현재일 뿐이야”(21-22)
나는 그것을 열어보는 일을 최대한 미루고 있다가 노란 고무줄에 손가락을 넣어 풀었는데, 거기에는 아주 간단하게 “나는 인간이니까 당연히 섹스를 하며 살아야 해”라고 쓰여 있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29)

-매기를 사랑하고 나서 줄곧 나를 붙잡았던 의문은 왜 내가 이런 관계를 선택했는가, 였다. 그런데 적어도 9호선에 몸을 구겨 넣고 만원의 상태를 견디며 바닥과, 그 바닥의 깊음과, 그래서 겪는 불편과 고통과 힘듦과 귀찮음 모두의 원인인 한강에 대해 생각할 때에는 매기와 나의 관계에서 선택이란 가능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빗물이 손바닥을 적시듯 매기가 내 인생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는.(60)

-6월의 햇살은 봄의 뒷자락이 남아서인지 목덜미에 눌어붙는 것처럼 은근했다. 햇살은 강했지만 여름과는 달랐다. 그것은 따뜻함과 따가움 사이에 놓인 것 같았다.(71)

-그래, 당신은 고양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나, 죽었다고 생각하나.
상관없어요.(97)

-작은 창으로, 겨울을 견디고 있는 숲의 나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 움츠리고 기꺼이 피폐해진 나무들, 봄이 채 오기 전까지는 어느 것이 성공적으로 살아냈는지 그러지 못했는지 알 수는 없는 것들. 나는 우리가 자꾸 어긋나고 상대를 향한 모멸의 흔적을 남기게 된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고 매기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냥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숙명처럼 가져갈 수 밖에 없었던 슬픔이라고, 그러니까 우리가 덜 사랑하거나 더 사랑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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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11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독후감이 점점 아름다워져요. 이게 다 카페 때문인가... 닻에 대한 열망 파트는 나중에 어디론가 꼭 옮깁시다! 이승우가 글 이렇게 쓴대여.. 수첩에 단상 모아서 소설에 고대로 옮겨버린다고.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표지가 고와요. 마치 빗물처럼 툭툭 떨어져 내린 시작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처럼, 어긋나버린 슬픔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게 좋네요. 쪼금 살아보니까 내 의지보다는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작은 자녀분 천일 축하드려염 🎉)

반유행열반인 2021-01-11 10:40   좋아요 1 | URL
요즘 댓글이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도 카페 때문인가요... ㅋㅋㅋ 독후감에 다 써 먹어버리면 점점 더 소설 못 쓸 거 같아서 원래 독후감은 무미건조똥구멍 같이 썼었는데 요즘은 공력 허비(?)를 여기에 하고 있네요...재활용 나도 할 수 있으까...리바이벌은 잘 못 하는 구만 ㅋㅋㅋ
다른 분 리뷰 보니 표지 흉악하다는 평도 있었나 보더라구요 ㅋㅋㅋ 그냥 받아들이면 맴이 편해지죠. 오래 그걸 못했는데 조금씩 연습중입니다... 꼬맹이 나도 축하해 ㅋㅋㅋ하고 말하고 박수쳐주니 뭔지 모르면서 덩달아 박수치네요 ㅋㅋㅋ

하나 2021-01-11 10:48   좋아요 1 | URL
꼬맹이분도 열반인님도 귀엽네여 ㅋㅋㅋ 표지 흉악하다니.. 10년 전에 이상한 폰트 유행할 때 책을 못 보셨나 ㅋㅋ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에서 바다도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닐 것이다, 라고 쓴 거 보고 ㅋㅋㅋㅋㅋ 그냥 졸라 받아들이는 거구나 생각한 적 있어요. 바다도 받아들이는데 지금 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1-01-11 10:51   좋아요 1 | URL
귀욥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편으로는 실물 보고 실망하실 날이 많이 걱정이 됩니다...
헤밍웨이 하니까 헤밍웨이도 봐야 할 거 같네요 보다 만 에덴의 정원? 인가 하는 안 유명한 소설이랑 노인과 바다는 애기 때 보고는 또 애기들 보는 판형 하나 사놨는데 하나님 책 잘 판다... 바다 걔는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걸 거 같은데?! 인간이고 물고기고 다 쓸어버려야징 케케 하고 ㅋㅋㅋ못된 심성을 투사하는 나란 새끼..같은 마음이 포세이돈을 만들어냈겠구나 싶어요.

하나 2021-01-11 11:05   좋아요 1 | URL
저는 귀여움 필터 장착한지 오래구요 ㅋㅋㅋㅋ 어쩌면 바다 새끼는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걸 거야, 하고 바다를 원망이라도 할 때가 건강한 걸지도 모르겠어요. 노인과 바다 저도 어릴 때 애기들 책으로 보고 다 커서 봤는데 되게 슬프더라고요 ㅋㅋㅋ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그러면서도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이러면서 낚시줄 드리우고.. 헤밍웨이 많이 아팠던 거 같애...

공쟝쟝 2021-01-11 19: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닻.

반유행열반인 2021-01-11 20:14   좋아요 1 | URL
닻닻!!

2021-01-24 0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0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