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지킬 박사와 하이드 펭귄클래식 31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20210107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작년에 큰꼬맹이가 어린이판 지킬 박사와 하이드를 보고는 재미있다며 이런저런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나도 읽었다. 전자책 기록을 보니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9월에 읽었는데 내내 묵히다 해가 바뀌고 나서야 함께 실린 다른 단편들도 마저 보았다.

지킬과 하이드가 언급될 때면 인간의 이중성이라는 말이 꼭 따라 붙는다. 스티븐슨이 해당 소설과 작가 노트 비슷한 ’꿈에 관하여’ 라는 글에서 그 말을 그대로 제시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겨우 이중성이라는 말로 인간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다. 선-악 대립구도에 너무 함몰된 건 아닌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다중 인격에 관한 영화나 소설도 제법 많은 것 같다. 제일 열광하고 봤던 건 영화 ‘파이트클럽’이었다.

어쨌거나 이런 이야기들 덕에 우리가 쉽게 빠지는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가르기와 규정하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짧다하기도 길다하기도 애매하게 사는 동안 그나마 깨달은 점은 어디에도 그렇게 라벨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은 아마도 너에게만 ‘좋은 사람’일 수 있다. 나에게는 한없이 모진 사람일 수도...반대로 다수가 ’나쁜 사람’이라 손가락질하는 인간조차 누군가는 그의 선의의 순간만을 포착하고(혹은 호의의 혜택만을 누린 덕에) 다른 판단을 내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간의 자아정체성, 단일한 자아의 어떤 특성을 파악하는 데 골몰하지만 사실 인간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알아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부쩍든다. 겹겹이 다층적인 일화와 삽화와 경험과 행동과 말이 쌓여 만들어진 어떤 덩어리를 일부나마 감지한, 또다른 그런 덩어리인 누군가가 판단의 언어를 들이댈 뿐이다.

물론 남을 해치거나 고통을 주며 기쁨을 누리거나 이득을 취하는 이들은 확실히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티븐슨의 소설에 나오는 하이드, 맥팔레인(시체도둑 작중 인물)은 그런 의미에서 악한의 원형에 가깝다. 그러나 하이드를 이끌어낸 원인이자 창조자인 지킬, 맥팔레인의 시체장사에 공범이 된 페츠 같은 사람은 어떨까? 평범하다 일컬어지는 사람 대부분 이들과 비슷하다. 자신의 부끄러움이 밝혀지는 것이 두려워 잘못된 선택을 하고, 약점을 잡히고, 번민하고,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망가지곤 한다.

끝없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지 고민하고 절제하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켜가려고 해도 어느 순간 남에게 모진 짓을 하고 마는 사람들을 끝없이 본다. 유명한 사람들 중에도 있고 지인 중에도 있고 나도 가끔 그런 꼬라지를 한다. 하물며 동물적 본성, 자신의 안위와 공포의 회피에 압도되어 사는 사람도 드물지 않다. 스티븐슨은 사람의 그런 짐승성을 대단히 예리하게 포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짐승은 짐승인데 또 완전히 짐승은 아닌, 더 나은 다른 존재가 되려는 인간의 고민이 재미있고 섬뜩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나름의 합리화가 성공해 개연성을 갖추면 백 년 후에도 여전히 읽히는 책이 되는 거지.


+밑줄긋기
-안개는 여전히 흠뻑 젖은 도시 위로 날개를 활짝 펼치며 내려앉아 있었고 가로등은 붉은 석류석처럼 빛났다. 가라앉은 스모그에 뒤덮이고 짓눌리면서도 도시의 삶은 계속 굴러갔다. 큰길을 따라 강한 바람이 울고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방 안은 불빛으로 아늑했다. 와인은 신맛이 오래전에 사라진 잘 숙성된 상태였고, 황제의 색이라는 와인의 빛깔도 스테인드글라스의 색깔이 점점 깊어지듯 세월과 함께 부드러워져 있었다. 언덕 비탈의 포도밭, 따가운 가을 오후의 붉은빛이 마침내 자유로이 풀려나 런던의 안개를 흩어지게 할 참이었다.

-쾌락은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고고한 자긍심으로 대중들 앞에서 철저하게 근엄한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오만한 욕망을 가진 내게 쾌락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욕망을 감추었다. 그런데 되돌아볼 수 있는 세월이 되어 스스로를 돌아보고 세상에서의 내 성취와 지위를 평가해 보니, 이미 나는 상당히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부조리를 오히려 과시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스스로 세운 고귀한 가치관에 따라 판단했고 거의 병적인 수치심으로 내 부조리를 감추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나 자신을 형성해 왔으며, 내 안에서 인간의 이중성을 나누고 결합시키는 선과 악이라는 두 영역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깊은 고랑을 파서 철저하게 분리시킨 것은, 내가 타락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지향하는 바가 매우 엄격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했다. 만약 각각의 본성을 별개의 개체에 담을 수 있다면, 참을 수 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사는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부조리한 존재는 그의 고결한 쌍둥이의 열망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만의 길을 가고, 정의로운 존재는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높은 곳을 향한 그의 길을 가면 될 것이다. 그는 선행을 하는 가운데 기쁨을 느낄 것이며, 더 이상 이질적인 악마가 행하는 불명예 탓에 괴로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들 모순되는 한 쌍이 함께 묶였다는 것은, 고뇌하는 의식이라는 자궁 속에 이렇게 극과 극인 쌍둥이가 계속 갈등하며 함께 지내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받은 저주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들 둘을 분리할 수 있을까?

-우리 인간은 인생의 불운과 고난을 영원히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 그 짐을 던져버리려고 시도하면 그것이 더욱 낯설고 더욱 끔찍한 무게로 되돌아와 우리를 짓누른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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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1-01-07 18: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신형철이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그나저나 큰 코맹이분... ㅋㅋㅋㅋ 알라딘 마을 미래의 인재가 될 거 같은 싹이 보이네여... 엄마도 읽게 하다니!

반유행열반인 2021-01-07 19:18   좋아요 2 | URL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들으니 묘하게 위로가 되요. 나만 나쁜 사람이 아니었구나 하고 ㅋㅋㅋ큰꼬맹이가 작년에 아마 저보다 더 읽은 것으로 압니다 ㅋㅋㅋ

syo 2021-01-07 2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 소설의 입장에서는 크게 어쩔 수 없는 한계지점일 수도 있겠다 싶어요.

인간이 누구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게 아니라 수십 가지 정체성의 조합이라서, 사실 지금껏 모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처음부터 수십 가지 조합을 갖춘 현실적 인간이었는데도 작품 분량, 작가의 표현력, 독자의 독해력 등에서 유발되는 한계 때문에 평면적 등장인물로 보이거나 기껏해야 두 개짜리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보였을 수도 있다고 우겨버리면 그 주장을 부인하기도 어렵겠어요.

반유행열반인 2021-01-07 21:10   좋아요 0 | URL
수십 가지도 적고 그 정도도 그냥 유형화된 거고 어쩌면 분류 불가능한 걸 그냥 설명하고 싶어서 엠비티아이니 애니어그램이니 심리테스트니 하는 거겠죠 ㅋㅋㅋ사람은 이해하기 쉬운 거랑 단순화하는 걸 좋아하니까요 그편이 인식에 에너지가 덜 들고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