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드러머 걸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4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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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5 존 르 카레.

이십 대에는 야후 사이트의 세계 채팅방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취미가 있었다. 미국놈들이나 유럽 선진국놈들 채팅방에 가면 영어를 버벅거리거나 채팅의 약어를 모르는 티만 내도 무시당하고 욕설을 들었다. 기껏 관심을 주는 건 음란한 말을 건네는 변태들 뿐. 인도인들 채팅방이 유독 많았는데 속내는 어떤지 몰라도 말하는 건 서구놈들보다 한결 친절했다. 먼저 이것저것 묻고 대화에 끼워주었다. 갑자기 파레토의 법칙을 설명해달라는 인도 사람이 있어서, 경제학 개론서를 뒤지며 나름대로 설명해주었다. 그 사람은 갑자기 책을 보내달라고 졸라서, 내 책은 한국어라 님이 못 읽어요 못줘요...하고 달래던 기억도 난다. 동방신기를 좋아해서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열광하던 푸에르토리코의 소녀, 이탈리아의 엔지니어 아저씨 같은 사람은 한참 수다를 떨다가 (그래, 라떼는 카톡은 없고 이런 거 있었다?) 엠에센 메신저에 추가해서 가끔 안부를 주고 받기도 했다.
모함마드도 엠에센 메신저에 추가했다. 프로필 사진에 기관총을 들고 있었다. 왜 총을 들고 있냐고 물으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가자에 산다고 했다. 나는 거기에 컴퓨터도 있고 인터넷도 된다는 게 놀라웠다. 그냥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이 나를 놀리느라 거짓말한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날 나눈 말 대부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런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우리는 결국 이길 거야.
이후 모함마드는 다시 로그인 하지 않았고 지금은 그 메신저마저 사라졌다. 정말 모함마드가 가자지구 주민이었다면, 아직 살아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살아 있다면 아직도 기관총을 손에 쥐고 있겠지. 살아남는 게 싸우는 것이고 싸우는 게 살아남는 거니까 거기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스라엘 군인들 소식을 들을 때 화를 내는 것 뿐이었다.

이웃님 한 분과 박찬욱 이야기를 하다가 그가 가장 최근 연출한 드라마 이야기를 잠시 나눴고, 또다른 이웃님의 카레 포스팅에서 존 르 카레 이름을 보고 아, 드라마는 못 보니 책이라도 함 보자 하고 리틀드러머걸을 빌렸다. 공교롭게도 책을 빌린 다음날 존 르 카레가 작고했다. 괜히 내가 책 빌려서 돌아가신 것 같잖아...하다가 내가 그럴 만한 능력도 힘도 없다는 주제 파악을 하고 2주 동안 두꺼운 책을 열심히 읽었다.

첩보물, 공작과 테러와 암살 같은 건 거의 읽은 적이 없다. 빌릴 때도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다. 존 르 카레가 첩보 요원 출신 작가라는 사실도 나중에 알았다.

이런저런 급진적 정치 투쟁에 참여하던 배우 찰리가 이스라엘 첩보팀에 포섭되어 팔레스타인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아랍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조작?하고, 결국 유대인들이 그 투쟁 세력을 섬멸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과정에서 멘탈이 무너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랍인 미셸의 대역을 맡은 요세프(베커) 또한 찰리의 거울처럼 혼란을 느낀다. 둘이 조우하고 붕괴된 상태로 재회하는 모습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지만 온전하지는 못했다.
나라, 민족, 점령, 해방, 투쟁 같은 거대한 목표에 짓눌려 도구처럼 이용되고 쉽게 죽임당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내내 힘들었다. 각자의 개인사가 감춰진 채 조직의 목표에 헌신하는 요원들, 전사들을 보면 그들을 그 자리에서 삽질하게 만드는 신념이란 무엇일까, 궁지로 몬 인생의 상처는 무엇이었을까 내내 궁금했지만 이야기가 모든 걸 다 담을 수는 없다. 주요 인물들의 지난 고통만 나온다. 감옥에 간 아버지, 부적응의 세월, 유대인 또는 아랍인에게 희생당한 가족과 이웃과 동포, 고문과 부상과 치욕.
누구도 미워하기는 힘든 게, 책 속에서 싸우는 유대인도 팔레스타인인도 모두 희생자이고 생존자였다. 이스마일 카다레의 ‘부서진 사월’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피의 복수 카눈처럼 요세프도, 미셸도, 칼릴도, 쿠르츠도, 그리고 찰리와 헬가도 먼저 흐른 피의 값을 받아내거나 갚는데 이용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개인이 장기판의 말처럼 휘둘리고 다치는 모습을 보는 게 현실이든 이야기든 참 힘들게 느껴진다.

종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 태어난 예수가 복수를 말하거나 남을 해치고 빼앗는 것을 허락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용서와 사랑을 설파했다지. 가장 어려운 일이라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부족한 나는 용서 대신 분노하고 온전히 사랑하는 대신 의심하기만 한다. 그 편이 더 쉬우니까. 책을 읽는 동안 내심 누군가가 공작의 과정에서 포기하고 실패하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끝없이 달려서 누군가를 터뜨리고 부수고 죽이는 데 성공했다. 죽이고 싶은 상대를 죽이는 일을 포기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모두가 비겁해서 그런 포기는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도 슬픔과 고통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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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미터쯤 앞에도 작은 카페의 불빛이 보였지만 그 너머로는 다시 황량한 눈의 고원들과 목적지 없는 도로뿐이었다. 그토록 황량한 곳에 어떤 미친놈이 카페를 열었는지는 아마도 내세에나 풀릴 수수께끼일 것이다.

-“당신은 내 나라를 저버린 영국인이오.” 그가 조용히 선언했다. 눈앞에 드러난 증거조차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그가 고개를 들더니 불만이라도 토하듯 고개를 젖혔다. 요제프가 쏜 화기의 위력에 몸에 불까지 붙었다. 방아쇠를 당길 때 가만히 서 있으라고 배웠으나, 요제프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총알을 믿지 않았다. 그는 총알을 타깃에 박아 넣기라도 하려는 듯 끝까지 쫓아오며 쏘아댔다. 진부한 침략자처럼 문을 뚫고 들어와 곧바로 적에게 달려든 것이다. 그는 두 팔을 완전히 뻗은 자세로 계속 거리를 좁혔다. 그녀는 칼릴의 얼굴이 터지는 광경도 보았다. 몸을 뒤틀며 도움을 청하듯 벽을 향해 두 팔을 뻗는 것도 보았다. 총알은 그의 등을 뚫고 흰 셔츠를 망가뜨렸다. 그는 두 손을 벽에 댔다. 의수 하나, 진짜 손 하나. 이윽고 너덜거리는 몸이 미끄러지며, 스크럼을 뚫고 나가려는 럭비 선수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하지만 이미 그때쯤 요제프가 다가와 두 다리를 걷어차 그의 마지막 여행을 재촉해주었다.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난 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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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2020-12-25 1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열반인님 대단쓰.. 야후에서 세계인들이랑 노셨구나. 라떼는 미소년이죠! ㅋㅋㅋ MSN 진짜 오랜만이네요. 열반인님 읽고 계신다는 소식을 어디선가 듣고, 이 책 저도 오늘 사서 오늘 도착했어요. ˝죽이고 싶은 상대를 죽이는 일을 포기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모두가 비겁해서 그런 포기는 정말 드물게 일어난다.˝ 저도 요즘 비슷한 생각해요. 부수고 해치고 싸우고 죽이는 게 더 쉬운 길이고 다른쪽이 더 어려운 일 같다는.. 오늘 같은 날 마음을 다잡고 멋진 리뷰 남기시는 거도 대단 / 그와중에 성탄절에 어울리면서도 묵직한 마무리는 더 대단... 님들아 이게 우리 열반인님이다!!!

반유행열반인 2020-12-25 19:10   좋아요 1 | URL
사람이 극단으로 외로우면 외계로 신호 보내고 그러는 거죠 ㅋㅋㅋㅋ 오늘 같은 날 책 읽고 리뷰 쓰는 거 말고 할 일 없어서인데 그걸 이렇게 금가루 바르고 띄워주는 세인트 하나님 ㅋㅋㅋㅋㅋ엠에센이 미소년이었어요? 미소녀 합시다 ㅋㅋㅋㅋ

라로 2020-12-26 1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존 르 카레, 죽기전에 두 번 테리 그로스라는 사람과 인터뷰 하는 거 들었는데,,,, 울었다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삶을 살다가 간 착한 작가더라구요. 저는 그의 책을 다 좋아합니다. 팬이에요!!! 그런데 인터뷰를 들으면서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서 그에 대해서 넘 몰랐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란 인간이 늘 그렇지 뭐 했어요.

반유행열반인 2020-12-26 10:35   좋아요 1 | URL
따뜻한 라로님 울린 작가라니 전 겨우 처음 읽었으니 하나도 모르는 걸요 그래도 책 많이 남겨주고 가셨으니 하나하나 찾아보려구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