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9월
평점 :
판매중지


-20201008 줄리언 반스.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행복하다.
논리학이나 명제에 취약한 나는 어설피 적어둔 삼단 논법의 대전제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뒤늦게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어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다고 해서 늘 행복하지는 않다.
대전제가 틀려버리면 나는 행복하다. 까지 이를 수 없다.
뭐 아무려면 어때.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때때로 행복한 시절이 있었다.
이건 명제가 아닌, 회상이고 기억이다. 이 정도까지만 고치기로 한다.

소설의 제목만 보고 막연하게 달달할 줄 알았다. 대체 왜? 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읽지 않았냐? 예감은 틀렸다. 달달함은 소설의 첫 머리에서만 잠깐 나오다 봄눈처럼 녹아 없어졌다.
열아홉 살, 어린이에서 겨우 청년으로 넘어가는 중인 케이시 폴과 마흔여덟 살의 기혼 여성 수전 맥클라우드는 테니스 클럽에서 혼합 복식 경기를 하다가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 대담하게도 폴은 수전의 남편 고든과 딸들이 있는 집에 가서 뭉기적대며 시간을 보내고, 두 사람은 차를 타고 이곳저곳 다니고 섹스를 한다. 폴은 수전이 남편에게 맞아서(정확히는 고든이 수전의 얼굴을 문에다 처박아서) 이가 부러진 걸 알고 분개한다. 몇 년 쯤 지나 둘은 런던으로 도망간다. 집을 구해 함께 살면서 폴은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 공부를 한다. 수전은? 술을 마신다. 그녀의 알코올 의존은 심해졌고, 생활은 방치되고, 그럼에도 폴은 그녀를 견디고 버티고 치료하려고 애썼다(고 기억한다). 그러다가 해외 출장을 이유로 수전을 그녀의 딸 마사에게 반품하듯 되돌려보낸다.
위대한 사랑에 대한 다짐, 확신, 자부심은 영원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상대가 나보다 훨씬 더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 있고 알코올로 삶이 망가졌고 나와 함께한 많은 좋은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라면, 그런데도 상대를 사랑했던 나는 어떤 기억과 감정에 여전히 휩싸여 있다면.
사랑 뒤에 남은, 혹은 사랑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 사랑을 지탱할 여력이 없는 상태에 놓일 때의 고통이 너무나 생생해서 책을 읽는 며칠 간은 잔뜩 우울해져 버렸다. 그래서 주변의 사소하고 평범한 풍경에도 쉽게 괴로워졌던 건지도 모르겠다. 예민한 나새끼야...
기억은 어느 것도 완전하지 않다. 그런 사실을 표현하기 위함인지 인칭?시점?이 나, 에서 너, 에서 그, 에서 다시 나,로 여러 번 바뀌었다. 읽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그렇게 지칭이 달라지는 것이 어떤 효과를 주는지는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다. 사람은 대부분 자기기만에 충실해서 스스로에게 유리한 기억만 남기고 불리한 기억은 잊어버리거나 왜곡해서 간직하기도 한다. 이전에 읽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도 비슷한 상황이 등장했던 것 같다. (나한테 불리한 것도 아닌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의 뇌새끼는 가끔 잔인해서 불쑥, 응 그거 아닌데? 이거 갑자기 생각이 나네 ㅎㅎ 하면서 수치와 당혹을 느끼게 하는 기억을 끄집어내곤 한다. 나는 자기 기만에 제대로 성공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내가 했던 잘못, 남에게 못되게 군 일, 멍청하고 예의 없고 악의적이고 잔인했던 말과 행동들을 자주 곱씹으며 끝없이 스스로를 미워했다. 나새끼야 왜 그랬니, 세상 못난 새끼야, 그래서 지금 네가 친구가 없는 거야.
사랑의 기억들은 어떨까. 아주 가까운 시절 조차 희미할 때가 있고 반대로 정말 오래 지났는데도 선명한 장면이 있다. 사랑은 순수한 진심과 진실로 지탱될 수 있다 믿던 날이 있었다. 어느 순간 그저 견디고 감추고 말하지 않아야 부서지지 않는 마음과 관계도 있다는 걸 알았다.
나를 알던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까, 내가 좋아하던 사람들은 가끔은 내 생각할까, 궁금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나쁜 기억이라면 그냥 잊혀지고 싶다. 좋은 기억이라 또다른 회한을 남긴다면 그래도 잊혀지고 싶다.
나는 내가 기억력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고 그것 때문에 오래도록 힘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시간과 노화가 내게 망각의 축복을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잘 잊는 나는 조금 덜 불행하고 더 행복해질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는다. 반대로 잊게될 어떤 감정과 기분이 아쉽고 슬프기도 하다. 내가 무얼 원하는지 무얼 잃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런 저런 사랑을 했고, 좋은 때가 있었고, 언제나 많이 울었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졌다는 것만은 잊지 못할 듯.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0-09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09 0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파이버 2020-10-09 00: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년전에 영화관에서 <예감은…>을 보고 충격을 받고, 소설을 읽고 원작에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옛사랑을 주제로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싶었어요… ‘연애의 기억‘ 표지는 감성적인데 달달한 내용이 아니군요 이건 표지낚시 아닙니까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10-09 05:21   좋아요 3 | URL
영화도 있군요! 낚아서 독자를 내동댕이 치려는 심보 ㅋㅋㅋ저는 오히려 지나간 사랑은 좋을 리가 없지, 해서 예감은...이 그렇게 뒷통수를 때려줘서 즐겁게 읽었던 것 같아요(벌써 기억이 안 나...). 이 책은 그 책 보다는 뒷부분이 더 재미없었어요 ㅋㅋㅋㅋ뒤에 가서도 뭐 후려치는 건 없어요.

syo 2020-10-09 14: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행복할 수 있다˝
이게 완결된 명제입니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건 무슨 일에나 당연하고, 우리는 각자 자기가 더 행복하길 바라며 조금이라도 나를 행복하게 해 줄 확률이 큰 방향으로 자꾸 이끌려가는 거겠지요. 그 확률을 0으로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계속 노력해야 하는 거구요. 정말 어렵더라구요. 저도 늘 그 노력이 망하는 겻 같지만, 그래도 겁없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반유행열반인 2020-10-09 14:03   좋아요 0 | URL
최선을 다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