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레코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평점 :
품절


신제품 나왔길래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레코를 샀다. 에예레- 줄이니 예쁘네. 
오늘의 나는 어제보다 더더욱 텅 비었다. 텅 빈 나는 아침에 일어났다. 매미가 시끄럽게 울고 있다. 저것들이 우는 이유를 아니까 징그럽다. 나처럼 맴맴맴맴 하고 있다. 여름 지나면 다 죽을 것들이니 이해하고 사랑하기로 한다. 사랑 많이 하렴 매미들아.
빈 곳을 채울 것은 책이지 뭐, 책. 그리고 아침에 내린 커피.
지난 번 엘 살바도르 엘 보르보욘을 마실 때는 복숭아의 산미? 뻥치시네 했었다.
오늘 새로 산 에예레-를 드립하는데, 어 이건 진짜 딸기향이네, 했다. 딸기맛 커피를 마셨다.
봄이 다갔는데 봄에 먹던 딸기가 먹고 싶다. 요즘 복숭아는 맛없다는 평 뿐이어서 제대로 사 먹지를 못하고 있다. 엄마가 저번에 천도복숭아를 샀더니 너무 맛이 없어서 망했다면서 병조림을 해줬다. 설탕에 졸이니 그나마 먹을 만했다.
올여름은 작년 재작년에 비하면 덥지 않았다. 대신 비가 많이 왔다. 비 덕분에 덜 더웠다.
비, 복숭아, 동그랑땡, 강탈당한 이미지들이 있었다. 비 오는 날이 좋다고 했지.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되었다. 
아, 아침에 커피 마시기 전에 꼬마들이랑 동그랑땡 데워서 아침밥을 먹었다.
이제 강탈한 이미지 반납하세요. 수많은 상징과 배경과 장소와 시간을 다시 무로 돌리도록 합시다. 

커피 포장지에는 얼굴에 뭔가를 발라 단장하고 꽃으로 둘러싸인 사람이 있다. 저번에 에티오피아 시다모 난세보 때 왜 여인 혼자만 외로이 있나요. 했더니 뭔가 다른 사람이 똑같이 눈을 감고 등장했다. 처음에는 이번에는 남자인가 했는데 이제는 여자 남자 구분하고 단정하려는 시도부터 고치기로 했다. 마음 안에 굳어진 이분법을 고치는 일은 힘들지만 꼭 해내야 할 숙제이다. 여자 아님 남자, 사랑 아님 미움, 내 편 아님 적, 이런 거 말고, 규정되지 않은 성, 규정되지 않은 마음, 관계, 그냥 그대로 두는 여유와 체념이 내게는 꼭 필요하다. 그런 마음을 갖출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십 년 전까지 나보다 좋은 머릿결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다니던 같이 사는 사람을 동아리 친구들은 언니라고 불렀다. 성남에 모란시장을 구경할 일이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들이 뒤에서 ‘난 남자가 저따위로 머리 기르고 다니면 뒷통수를 딱 패버리고 싶어’ 하는 폭언을 날렸다. 졸업식 날 내 짐을 들어주던 그를 멀찍이서 처음 본 우리 아빠는 ‘니 친구 참 예쁘게도 생겼다’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남자친구인 줄 모르고 여자애가 되게 못생겼네 하는 평가였다. 세상에나, 나는 그런 인간들을 싫어하면서도 점점 닮고 있는 것 같아서 창피하다. 어쩌면 나는 그런 경계에 있는 모호하고 독특한 존재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좋아하면서도 규정하고 구분짓고 명확하게 만들려는 폭력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살면서 군대를 다녀와야 해서 긴 머리칼은 다 잘려나갔고 이후로는 길어져본 적이 없다. 미용실 가서 매직스트레이트에 매니큐어에 온갖 치장하던 머리는 이제 미용실 갈 돈 아낀다고 덥수룩하게 머털이마냥 어설픈 길이가 되곤한다. 나는 좀 짧게 바짝 깎고 오라고 잔소리를 또 하지. 회사갈 땐 못하고 주말에만 양쪽에 건 귀걸이를 보며 금속 알러지도 심한 걸 여태 안 막냐고 잔소리도 하지. 난 참 쓰레기구나. 아버지가 빈 자리에서 내가 나쁜 아버지를 하고 있구나. 
하여간에 커피 포장지의 예쁜 사람은 그냥 좀 두겠습니다. 마음껏 예쁘소서. 

어제 아침에는 사육신공원에 다녀왔다. 큰꼬마가 방학숙제로 답사보고서를 써야 한다고 했다. 
집이랑 노량진 가깝다. 마을버스로 이십 분. 오랜만에 비가 안 오는 건 좋았는데 무척 습하고 더웠다.
열 살 세 살 꼬맹이 끌고 나무 아래를 걸었다. 보라색 길다란 꽃이 잔뜩 피었는데 이름을 모르겠다.

사당에서 위패 일곱 개를 보았다. 큰 아이는 향냄새가 너무 강해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했다. 작은 아이는 주변에 조경 돌보는 아저씨 일꾼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낯설어했다. 가기 전에 아이에게 왕위찬탈과 복위 시도와 실패에 관한 이야기들을 대강 했다. 세종의 여러 아들 중에 문종이 다음 왕이 되었는데 아버지왕 시절에 너무 혹사 당해서인지 일찍 죽었어. 그래서 문종 아들 단종이 왕 될 준비도 충분히 못하고 어린 나이에 다음 왕이 됐어. 세종 아들 중에 왕위 욕심낸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쫓아내고 새 왕이 되었어. 이걸 의리 없다 옳지 않다 생각하고 다시 단종을 왕으로 돌려놓으려다 들킨 사람들이 역적이라고 처형당했어. 역모까진 참가 안 했어도 세조가 왕이 된 걸 반대해서 벼슬 안 하고 물러나 살았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 몇을 골라 생육신이라 한대. 그 생육신 중 하나가 단종 복위하려다 죽은 사람 중 여섯을 골라 육신전이라는 위인전을 썼대. 겨우 여섯만 죽었겠어? 그냥 누군가 중요도를 정하고 마음가는대로 고른 게 어쩌다보니 사육신으로 굳어졌어. 한참 후대 왕들이 단종 복위하면서 당시 역적으로 죽은 신하들도 복권시켰는데, 사육신 말고도 여러 타이틀 붙여서 기렸대. 그 중 하나를 사육신 묘에 추가해서 이 공원에는 무덤도 위패도 일곱이야. 

계단을 여러 개 올라가면 한강 쪽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멀리 이름 모르는 한강 다리랑 한강물이랑 가까이 63빌딩이랑 존나 똑같이 생긴 건물(김애란 소설에 노량진 나오는 이야기 참고)을 구경했다. 

너무 더워서 오래 머무르기 힘들어서 무덤 가는 길은 제대로 못 찾고 멀찍이서 무덤 두 세 개 귀퉁이만 보고 더 찾지 않았다.
공원이라는 건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잖아. 계속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잊지 말라고 그냥 묘역이 아니라 공원으로 만든 것 같아. 그런데 잘 모르겠어. 정말 그만큼 기리고 기억해야 할 만한 죽음인지는. 신의와 의리를 지킨다는 건 어려운 일이지. 누군가를 향한 마음과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죽음도 감수하는 건 대단한 일인지도 모르지.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마지막 도박처럼 주도권 투쟁을 하다가 실패한 것이라면 그렇게 아름답게 포장할 일도 아니지 싶어서.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그 마음은 더 알 길이 없고 이들을 강등시키거나 다시 복권하고 기리기로 결정한 사람들조차 다 죽어버려서 이제는 정말 알 수가 없다. 

알 길이 없어질 때까지, 더 궁금하지 않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지나면 좋겠다. 
커피를 마시면 이렇게 길고 긴 아무말잔치를 쏟아낼 수 있지. 그러니까 이 원두를 사고 한 잔 내리시지요. 
요즘은 하여간에 소설 빼고는 많이 주절댄다. 일기만 수천자 쓴다. 부치지 않는 편지도 썼다 지운다. 읽고 싶은 책은 많아졌는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소설은 주말에 과제 마감이라 써야 하는데 소설못써요 병에 걸렸다. 뭐 어쩌냐 안 되는 걸. 되는대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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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8-13 1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 저도 이거 마시고 있다요! 유열님 근데 맛있어 지난 것보다 더!

반유행열반인 2020-08-13 10:25   좋아요 1 | URL
달고 상큼한데 진하고 고소해요. 그런데 그런 건 있다. 제일 맛있는 커피는 오늘 처음 마시는 커피.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부에나비스타쏘셜클럽 짭퉁) 노래 중에 가사 개빻긴 했는데 처음 보는 여자-라는 노래 있거든요. 여자 남자에 대한 건 동의 못하는데 커피는 확실히 첨 마시는 커피가 최고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수이 2020-08-13 10:51   좋아요 1 | URL
아침부터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처음 읽는 책도 항상은 아닌데 책껍데기 막 들출 때 설레여

공쟝쟝 2020-08-23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가체프는 셔서 좋아요. 제가 유일하게 외우는 원두. 그리고 또 커피리뷰인데 고퀄 ㅋㅋㅋㅋㅋㅋㅋㅋ

반유행열반인 2020-08-23 05:20   좋아요 1 | URL
오랜만에 공쟝쟝님
댓글 폭탄 받으니
넘 좋네요
마트에서 케냐AA샀는데 맛없어서 망했스요...그냥 알라딘 살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