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 99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소연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20200329 버지니아 울프.

내 자리. 쇼파 앞에 폭 60센티미터의 간이 책상을 놓고 그 위에 폭 30센티미터의 독서대를 올렸다. 여기 앉아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다. 그나마도 마련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옆에서 가족들이 55인치 텔레비전으로 명탐정 코난 극장판을 보면 3M귀마개로 귀를 틀어막고 책을 읽는다. 꼬맹이들이 달려들면 핑크퐁을 틀거나 스티커북이나 만화책을 쥐어주고 독후감을 쓴다.
나에게는 나만의 방 뿐 아니라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픽션을 쓰는 걸 바라지만 이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은 동안은 한 글자도 제대로 쓸 수 없다. 소설을 쓰지 않은 지 거의 넉 달 가까이 지났다.

이 책을 읽으며 몇 번을 멈추어야 했을까. 겨우 마지막 몇 쪽을 남겨두고 세탁기를 돌리고, 떡볶이를 만들고, 꼬맹이들을 먹이고, 설거지를 했다. 머릿속에 가물가물 남은 흔적이나마 끄적이는 동안 또 몇 번을 멈추어야 할까. 꼬맹이가 겨우 낮잠에 들고 더 큰 아이들이 식탁에서 방탈출 보드게임을 하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자리에 앉아 아무말잔치를 벌인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던 시대에 매년 500파운드가 어느 정도 가치였는지는 모르겠다. 10여년 차 경력의 내가 이백여만원을 벌기 위해서는 하루 최소 여덟 시간 근무와 한두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들여야 한다. 초과근무를 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귀가하면 집안일, 육아.
휴직하는 동안 집안일과 육아 시간 외에는 읽고 쓸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렇지만 돌아가야지, 맞벌이의 삶으로. 한쪽에게만 부양과 대출상환의 부담을 지우는 건 부당하고 미안하다.
저에게 매년 500파운드의 유산을 물려주실 숙모님 안 계신가요.

100년 전쯤 미래의 우리에게 열심히 쓰라고, 돈을 벌고 자기 방을 마련하고 그 안을 어떻게 꾸밀지 궁리하라고, 세상이 달라질 거라고 말해준 버지니아 울프는 참 똑똑하고 재치있어 보였다. 대부분 옳은 말이고 여성을 향한 부당한 평가와 편견과 그늘과 제약을 제대로 인식하고 지적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나아진 시대에 사는 듯 보이는데도, 아이가 없고 유산을 받고 글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울프가 왜 부럽냐 나는. 아냐 안 부러워 나도 열심히 쓸 거야. 일기도 쓰고 독후감도 쓸 거야. 픽션도 쓸 거야. 아무말에 못생긴 글이라도 마구마구 쓸 거야.
그러기 위해 시간과 공간을 확보할 방법을 궁리한다. 새벽에 일찌감치 깬 동안 빈 자리를 눈치챈 꼬마가 울며 뛰어나오지 않기를 간절히 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얼른 사라져서 퇴근 후 한두 시간이라도 카페에 들러 뭐라도 끄적이고 올 수 있길 바란다. 아이들이 얼른 자라나고 나는 얼른 늙어버렸으면 좋겠다. 어른이 된 아이들이 각자의 삶과 사랑을 향해 날아가고 혼자 외롭게 남고 싶다. 막상 그런 날 닥치면 또 징징댈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못난 마음은 그런 먼 미래를 바란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0-03-29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읽으셨군요!!

반유행열반인 2020-03-30 06:45   좋아요 0 | URL
크 다락방님께서 먼저 읽고 독려하셔서 부지런히 좇았습니다!!!

공쟝쟝 2020-04-03 0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ㅠㅠ 얼른 늙어버리고 싶다...는 말이 참 서글프고 공감되요...

2020-04-03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3 1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4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4-05 0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