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니가 보고 싶어
정세랑 지음 / 난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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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5 정세랑

달달한 소설은 취미에 없었는데, 누가 자꾸 그런 달달한 게 있다고 알려줘서 가끔 연애소설들을 주워 읽는다. 이 소설은 표지가 너무 안 예뻐서 안 보고 싶었는데 단 게 필요한 마음이라 빌려 읽었다. 지난 번에 지구에서 한아뿐 읽고는 숙원 과제 같은 연애단편 어설프게라도 하나 완성하긴 했었지. (중딩 화자 흉내내기는 30대 아줌마한테 무리수라고 읽어준 친구 한 명에게 까이고, 당연히 공모전에도 떨어졌지만. 좋다는 사람 한 명은 건졌다. 히히.)

연인이 헤어진 뒤에 이야기는 시작된다. 장르 소설 작가인 재화가 쓴 소설 속에서 구남친 용기는 매번 죽는다. 그런데 갑자기 용기의 몸에 재화의 문장들이 돋아난다. 설정 보소. 재화와 용기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정세랑 소설은 항상 드라마 보는 것 같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으으 하고 닭살을 오소소 돋아가면서도 꾸역꾸역 읽게 된다. 용기의 새 애인과의 이별이 난 사실 더 슬펐다. 용기 몸을 무지하게 밝히는 어린 여친 정말 귀엽단 말이다. 나중에 소원을 이루니 좀 봐줘요 하는 전개는 역시나 한아뿐이랑 비슷한 느낌이었다.
연애소설이다 스릴러다 판타지다 에스에프다 시대소설이다 왔다갔다 했다. 소설 속에 수많은 액자 소설을 담으니 가능한 일이다. 이야기를 조각조각 잘 쪼개서 큰 하나의 이야기로 엮는 게 정세랑의 특기다. 그게 반복되니까 식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단맛나는 해피엔딩은 수요가 풍부하니까 양질로 공급하면 뭐 그걸로도 존재 가치가 있겠지. 시니컬한 나한테도 조금은 설탕가루 묻혀 주겠지.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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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 부분 읽는데 되게 서글퍼졌다. 일자 막대 정말 다 끝난 거니.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용기 몸에 전여친의 소설 문구가 새겨지는 걸 눈치챈 새여친이 이별을 고한다. 이 정도면 좋게 헤어지는 편 같은데 그래도 모든 이별 순간은 슬프다.
‘용기가 손을 뻗어, 여자친구의 손을 잠시 잡았다. 핑크와 옐로의 도트 무늬 손톱을 들여다보고 웃었다. 지지난주엔가, 이쑤시개로 애써 점을 찍으며 네일 따위 돈 주고 받을 여유 없다고 툴툴거렸었다. 그 정도는 시켜주고 싶었다. 또 뭐가 해주고 싶었었지? 아, 편한 신발을 사주고 싶었다. 발가락뼈를 튀어나오게 하지 않는, 균형이 잘 잡힌 신을. 샴페인 색깔의 화장품도 사주고 싶었다. 볼살이 빠지면 그런 골드가 어울릴 것 같은 얼굴이었는데.
가볍게 손톱 하나하나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친구도 입맞춤의 의미를 깨닫고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대단한 사랑, 세계가 기억할 사랑을 얻기를. 나는 줄 수 없었지만 꼭 그랬으면 좋겠어.
용기는 여자친구와 그렇게 헤어졌다.

-나도 아무도 안 죽는 이야기를 쓰고 싶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아무도 안 죽는 이야기를 써서 내 몸에 글자가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

-닭살 돋는 재화 첫 책 작가의 말.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써 제낄 수 있는 뻔뻔한 사람이 되고 싶다. (안 될 걸.)
‘언젠가 여기 쓴 걸 후회한다고 해도, Y, 내 덧니는 네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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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1-25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전여친의 문장이 몸에 새겨진다니! 저도 이 소설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반유행열반인님!

반유행열반인 2020-01-25 18:46   좋아요 0 | URL
저는 보면서 자꾸 현여친에 이입해서 그놈의 문장들 사포로 갈아내고 레이저로 지져버렷! 하고 싶어졌어요....ㅋㅋㅋ
다락방님 늘 좋은 글 좋은 책 소개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무식쟁이 2020-01-27 0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관심없었는데 (표지보면 자꾸 입이 벌어져서 페이지 후딱 넘기느라 바빴음; ) 열반님 리뷰보니 보고싶어 졌음요. 열반인님의 사랑 김금희 책 읽고나니 명랑소설 읽고 싶어졌어요. ㅋ

반유행열반인 2020-01-27 00:23   좋아요 0 | URL
원조 김금희 사랑님은 따로 있어요. 저는 짭퉁 후계자... ㅋㅋㅋ...(적당한 전해질 농도 소금물) 김금희가 훨씬 더 좋지만 가끔 설탕물 한 사발 드링킹해 주셔도 ㅋㅋ

무식쟁이 2020-01-27 00:28   좋아요 1 | URL
사랑에 원조가 어딨어요. (캬. 트로트 제목같다.) 내사랑은 내가 원조지.